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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와라 노도카小田原のどか, 「보이지 않는 기념비」 (2020)

*오다와라 노도카(小田原のどか), 『모뉴먼트 원론: 사상적 과제로서의 조각モニュメント原論: 思想的課題としての彫刻』 (세도샤[青土社] 2023) 중 1.4장인 「보이지 않는 기념비不可視の記念碑」 (78-103쪽)를 일부 번역한 것입니다.

 

 
유이 주노신(由比忠之進),


에토 고사부로(江藤小三郎),


헤더 하이어(Heather D. Heyer),

그리고 
'소실'된 1억 4천만 명의 여성들에게
 
1.

레이와(令和) 원년[2019] 10월 19일, 나는 미나마타(水俣)에 있다.



『현대사상』에서 이소자키 아라타(磯崎新) 특집을 구성한다고 한다. 기고 의뢰를 받았을 때, '와' 하고 탄성이 나왔다. 단게 겐조(丹下健三)였다면 몰라도, 이소자키를 평할 논점을 갖추고 있지 않은 차였다. 머리를 굴려본다. 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미나마타 메모리얼〉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이소자키 혼자만 심사위원을 맡은 국제 공모전을 통해 만들어진 위령을 목적으로 한 시설이다. 이 기념시설을 심사하기 전 이소자키가 제시했던 비평의 기준은 실로 흥미롭다. 덧붙여, 여기에는 수전 손택 그리고 이시무레 미치코(石牟礼道子)와의 공동심사가 좌절되었던 사실 등의 알려지지 않은 '드라마'가 있다.



어쨌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나마타 메모리얼〉이 대대적인 홍보를 받으며 완성했음에도 지금은 폐허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이다. 내가 아는한 , 이 사실은 지방 신문 이외의 매체에서 보도된 바가 없다. 왜 이 기념시설은 고장난 채로 방치되어 온 것일까. 왜 위령자 명단은 다른 위령비가 있는 곳으로 옮겨버린 것일까. 조사해 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좋은 기회였다.



마나마타병 희생자 위령식은 매년 5월 1일에 개최된다. 왜 그런 것인가? 이 날이 미나마타병의 "공식 발견일"이기 때문이다. 2019년도의 위령식은 "개원(改元; [역주: 일본에서 천황이 바뀌며 새로운 연호가 시작되는 것. 5월 1일은 레이와令和가 개원한 날이다])의 영향"을 감안하여 5월 1일에서 10월 19일로 연기되었다. 위령식 때문에 미나마타에 갈 예정은 없었고, 그보다 한 달 전인 9월 초순에 아마쿠사(天草)의 석조 조각을 조사하러 규슈에 갔고, 이참에 미나마타에도 들러 자료관과 소시샤(相思社)의 역사고증관을 방문했다. 무엇보다 당시 나는 휴가중이었다. 



10월 14일에 아이치 트리엔날레가 개막했고, 그 다음날부터 일주일간 나는 배우자와 함께 교토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아이치 트리엔날레를 둘러싼 여러 일로 인해 마음이 지쳐 있었다. 이후에 미학자 이토 아사(伊藤亜紗)씨와 하는 워크숍이 12월 국립국제미술관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그것까지만 머리를 식히고 싶었다. 아이치 트리엔날레에서 작품 철수는 10월 중에만 하면 된다고 큐레이터가 말해주었다. 곧 쿄토에서 빈둥거리다가 반출하면 되겠지 하는 계획을 세웠다.  

모아둔 휴가는 교토에서 자주 보냈다. 정해놓은 숙소 중 하나는 빨강, 파랑, 먹물색 등 여러 색을 통일한 객실이 3개밖에 없는 호텔로, 이번의 객실은 빨강색으로만 되어 있었다. 관광은 별로 하지 않았다. 18일에 카라이모북스를 방문했다. 미나마타에 대한 고서가 충실하다고 알려준 것은 미술사학자 하야시 미치오(林道郎)씨였다. 


카라이모북스는 9월에 니시진(西陣[역주:교토에 있는 동네 이름])으로 이전한 지 얼마 안 된 상태였다. 골목 골목에 점포들이 들어서 있었다. 점포 천막 사이를 빠져나와 끼익 하고 미닫이문을 연다. 바닥에는 저렴하고 균일한 선반이, 생활감있는 복도 안쪽에 점포 공간이 보였다. 실례합니다. 목소리를 내고 신발을 벗으며 멋대로 들어간다. 복도를 빠져나오니 8미터는 될 것 같은 천장 가득 늘어서 있는 고서 냄새가 풍긴다. 진열된 책을 일별하는데, 배우자가 심각한 얼굴을 하는 것이 웃겼다. 


굉장히 잘 갖춰진 콜렉션이었다. 미나마타, 원폭, 오키나와, 여성학, 사회운동. 전문서가 공간이 비좁게 느껴질 정도로 늘어서 있다. 의지가 있는 책장이다. 집중해서 표지를 살핀다. 시간이 지나간다. 미나마타병 자료관이 리뉴얼되기 전 교원을 위한 팜플렛이 300엔. 그 외에도 발굴한 것이 많다. 책과 함께 미나마타산 녹차도 사려고 했다. 그것들을 보고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서점 분은 오쿠다 쥰페이(奥田順平)씨였다. 부부가 여기를 운영하고 있었다. 미나마타는 벌써 몇년째 오가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지난 달 미나마타를 방문했던 일, 일반재단법인미나마타병센터 소시샤에서 미나마타병 환자의 위패 앞에서 합장했던 일, 특히 에코파크 미나마타와 미나마타 메모리얼에 관심이 있는 것 등에 대해 조금 경계하면서 이야기했다. 오쿠다 상에게는 어떤 지역 고유의 문제에 관련되어 있는 사람이 외부인을 상대할 때 보이는 특유의, 끝까지 확인하려 드는 몸짓이 전혀 없었다. 나는 이제 몇번이나 나가사키에서 그것을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에, '준비 자세'가 나오고 만다. 조금 경계심이 녹아내려, 왜 미나마타인가, 하고 묻는다.


"흥미롭기 때문이죠." 오쿠다씨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누군가가 내게 왜 나가사키인가 하고 질문을 하면 나는 오쿠다씨처럼 대답할 수 없다. 조각가로서 느끼는 양심의 가책이 그런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오쿠다 씨의 목소리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가게를 나오면서 배우자에게 내일 혼자 미나마타에 갈지도 몰라, 하고 말했다. 자, 그럼 일은 해 둘게,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결국 휴가는 명칭 뿐, 일은 끊이지 않고 들어온다. 킨코스(Kinko's[역주: 페덱스 혹은 킨코스에서 만드는 인쇄용지])로 교정지를 출력해, 스캔하고 되돌려 놓는다. 새빨간 객실에 놓여진 커다란 다이닝 테이블에서 연일 일하고 있었다. 나와 배우자는 교열 일을 한다. 이번 휴가 중에는 둘이서 담당하는 전문지에 관련된 일이다. 이 날도 새벽 3시가 넘어갈 때까지 호텔에서 일하고 난 뒤, 당일치기로 다녀올게, 하고 몇 시간 동안 잠에 든다.


처음에는 하카다(博多)로. 사쿠라 선으로 갈아타서 신미나마타역에 도착했을 때는 11시가 되기 전이었다. 역 구내부터 출입구까지 삼엄한 경비체제가 펼쳐져 있다. 왜 그런가 하고 검색해 보니 환경상(環境相[역주: 한국의 환경부 장관과 유사한 직책])이 도쿄에서 오는 것이 이유라고 한다. 위령제는 오후부터 시작한다. 참가하기 전에 식전회장을 둘러싸고 있는 에코파크 미나마타에서 산책했다. 한달 전과 변한 것이 없다. 


여기는 매립지다. 미나마타 병의 원인이었던 고농도의 오염 헤도로(역주: 공장 폐수가 뒤섞인 진흙덩어리. 여기에 고농도의 메틸수은이 직접적인 발병 원인이 되었다)가 지금 내 발 밑에 봉인되어 있는 것이다. 바다로 흘러들어가지 못하도록 헤도로를 강판으로 억제하고 있지만, 그것의 최대 사용 가능기간은 50년 정도라고 한다. 준공으로부터 벌써 30년이 지났다. 헤도로는 정화되고 있지 않다.  



여기는 은폐의 땅이다. 그 표면에는 무수히 많은 환경조각이 놓여져 있다. 그 중 이 장소의 역사와 기억을 환기시키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인접한 〈미나마타 메모리얼〉에 사람은 없었다. 원래는 여기서 위령식이 개최되었다. 지금은 콘크리트가 갈라진 것이 눈에 띈다. 사용되지 않은 기념시설만큼 슬픈 것은 없다. 만(湾)이 한눈에 보인다. 쾌청하여 10월이라고는 생각도 못할 정도로 일교차가 심하다.
 
위령제는 신설된 위령비에서 행해졌다. 미나마타 메모리얼에서 도보로 몇 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다. 시라누이해(不知火海)에 면하고 있고, 주위에는 '본원本願 모임'에 의한 수제 석상이 건립되어 있다. 식이 시작할 때까지 그것들을 촬영하면서 회장 주위를 산책하며 시간을 보내고있었다. 특설텐트 뒤쪽의 석상을 찍으면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더니 어떤 여성 2인조가 말을 걸어왔다.
 
"신지로(進次郎)씨 일행이신가요?" 장발의 여성이 아양스러운 몸짓을 하며 물었다.
 
"엇." 나는 멈칫했다.



"대기실이 어딘지 아세요?"



중간 길이의 머리카락을 한 여성이 물었다.



"아닌데요." 초조해하며 대답했다. 나는 고이즈미 신지로의 팬이 아니다. 주위를 열심히 배회하고 있던 것 뿐인데, 대기실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 같다. 여성 2인조는 내 어머니보다 10살 정도 아래의 나이대로 보였다. 롱스커트와 청바지를 입고 있었고,그 중 한 명은 폴더폰으로 따닥 따닥 소리를 내며 현외에서 '날 것의 신지로'를 보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고 말하며 웃었다. "그쪽은 어디서 오셨나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어째서인지 터무니없게도 부끄러워져서 "아닙니다"하고 반복해서 대답한 뒤, 당황한 채 그곳을 벗어났다. 
 
일반 참가자로 기입되어 있어, 뒷자리에 배석되었다. 800명 넘는 위령식 참석자들의 대부분은 상복 아니면 교복이다. 평복차림에, 그것도 희고 기장이 긴 원피스를 입고 있던 나는 그곳에서 눈에 띄었다. 좀 전의 아이도 있다. 되도록 눈에 띄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위령식은 정각에 시작했다. 환자 및 유가족 대표 우에노 에이코(上野エイ子)씨의 '기도의 말'이 마이크를 통해 울려 퍼졌다. 땅의 굴곡처럼 바람이 낮게 웅성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전율했다. 이것은, 이것이 사람의 목소리인가.



시커먼 사람들의 맨 뒤쪽 줄에 내가 있다. 휠체어를 탄 에이코 씨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목소리만이 스피커로 증폭되어 고막을 울린다. 에이코씨는 미나마타 병으로 장녀, 남편, 부친을 잃었다. 



쇼와昭和 2년(1927), 미나마타만 근처에서 태어나 성장.


쇼와 31년(1956), 부친이 쓰러지다.


쇼와 32년(1957), 부친 사망.
쇼와 33년(1958), 아들을 얻다.


같은 해, 남편이 발병. 난폭해지고 바닥을 구르며 고통에 몸부림치다 사망. 발병부터 타계까지 불과 13일 소요.

쇼와 33년, 남편의 장례 6일째 되는 날 딸 출생. 출생 당시 마비로 인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게 됨.


쇼와 35년(1960), 딸이 두살 반의 나이로 사망.
 
부검 뒤에 돌아온 딸아이의 몸은 정말로 가벼웠던 것. 전염병이라는 오인 때문에 주위로부터 철저하게 차별받아 온 것. 



"제발 여러분, 미나마타병에 대해서 잊지 말아주세요."
 
에이코씨의 목소리 음색은 도저히 글로 표현할 수 없다. '말하다言う' '이야기하다話す/語る' '호소하다訴える' 중 그 어떤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떨림이었다. 더듬거리는 떨림 속에서 몇 번이나 "쇼와"라는 원호가 반복되었다. 그 연속된 호명은 증언의 정확함을 기하기 위함이며,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다시 더듬어 가려는 의도 또한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에이코씨가 몇번이고 '쇼와'를 입에 올렸을 때, 나는 마치 얻어맞은 것처럼 깨달았다. 쇼와라고 하는 것은 이 나라를 상징하는 자의 이름이다, 라고. 원호에는 의미가 있다. 그것은 천황의 이름이며, 시간 그 자체이다. 식전이 끝나고 나서도 혼자 망연자실한 상태였다. 기자가 다가와 왜 위령식에 참가했는지 이야기해 달라고 요청한다. 내가 외부인이라는 것은 차림새로부터 분명히 알 수 있다. 몇 미터 앞에 좀 전에 만났었던 여성 2인조가 활기차게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가벼운 현기증이 났다. 고사했지만 "부탁합니다"하고 놔주지 않는다. 순간 "사적인 일이라"하고 무심코 내뱉었다. 사적인 것이 뭘까.



 

2.


레이와 원년(2019) 8월 3일. 나는 나고야에 있다.


아이치 트리엔날레 2019는 2일 전에 개막했다. 여기에 초빙되어 새해부터 몇 번씩 아이치를 방문하고 있다. 배우자가 동행할 때는 나고야 역 근처의 전망좋은 호텔을, 혼자 올 때는 후시미(伏見)에 있는 서점이 메인인 캐주얼한 호텔을 이용한다. 나는 2일 전부터 혼자 와서 후자의 숙소에서 머물고 있다. 병설 카페는 24시간 영업하는 북카페다. 책 선별에 있어 진지함이 느껴진다. 하야카와 미스테리(역주: 범죄미스테리 소설로 유명한 출판사의 출판물 시리즈 중 하나) 등은 기간본의 대부분이 갖춰져 있었다. 내가 교열을 봤던 책도 있다.



카페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전화가 울렸다. 예술감독 츠다 다이스케(津田大介)씨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요점은 두 가지. 하나는 《표현의 부자유전 ・ 그 후》를 아직 보지 않았다면 꼭 오늘 중으로 보러 가 달라는 것. 또 하나는 나와 같은 전시장에 있는 〈평화의 소녀상〉을 피사체로 한 사진 작품에 대한 것.



리셉션 파티는 7월 31일에 있었다. 이 날, 아이치현 미술관에서 열린 《표현의 부자유전 ・ 그 후》에 〈평화의 소녀상〉이 전시될 것이 밝혀진다. 파티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문화청 직원은 갑작스럽게 참석을 취소했다. 불온함이 감돌았지만, 그래도 파티는 처음부터 끝까지 좋은 분위기에, 축의로 가득했다. 전시장인 도큐(東急)호텔은 정말 나고야스럽게도 호사스러운 모양새다. 나를 포함한 참여 작가들은 설치를 끝내고 다음 작품이나 프로젝트에 대한 생각으로 전환하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초빙작가 중에는 나의 대학원 동기도 있었다. 반가운 재회였다. 그녀는 유럽을 거점으로 하고 있다. 직접 만나서 이야기한 것은 9년만이었다. 다른 작가나 미술 관계자들과도 캐주얼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이튿날부터는 취재 등이 있어 분주할 것이기 때문에 나고야 시내에서 작품을 볼 시간은 없을 것이다. 츠다 씨로부터 전화를 받고 아이치현미술관으로 향했다. 미술관이 있는 아이치예술문화센터 앞에 가두선전차량과 보도진의 모습을 보고 긴장했던 것이 떠오른다. 아이치현미술관은 센터 8층과 10층에 있다. 도착한 것은 마침 정오였다. 《표현의 부자유전 ・ 그 후》는 입장객 수에 제한을 걸고 있다. 4-5분 정도 줄을 서서 기다린다. 한명 한명 순번을 기다리는 동안, 주위로부터 흥분이 전해져온다. 마치 뭔가 축제같은 분위기다. 줄을 서 있는 동안, "오늘로 전시중지가 될 지도 모르니까 서둘러 보러 왔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얇은 막 건너편이 전시공간이다. 안쪽은 좁고, 고양된 분위기 같은 것으로 가득 차 있다. 오우라 노부유키(大浦信行)씨의 영상작품 〈원근遠近을 품으며 part II〉를 색다른 분위기 속에서 녹화하고 있는 사람이 여럿 있다. 어쩐지 '검증'하고 있는 것만 같다. 나도 그들 옆에서 20분 정도 전편을 감상했다. 젠더 표상에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작품이라는 감상을 갖는다. 적어도 내가 감상한 1시간 정도의 시간 동안, 폭력행위를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다 보고 미술관 뒷편으로 들어갔다. 츠다 씨와 가볍게 이야기를 나눈다. 츠다씨의 비서인 대학원 선배 I씨, 아이치현미술관 학예사 N씨와도 이야기를 나눈다. 모두 피로에 절어있다. 이상했다. 그들도 츠다 씨도 31일부터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한다. N씨와는 파티장에서 오랜만에 재회해서 껴안은 지 얼마 안된 참이었다. 그 때의 발랄했던 모습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피폐한 모습에 나는 경악했다.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인접한 옆방에서 전화 울리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드디어 이해했다. 행정폭력의 현장을 눈 앞에서 목격하고 있었다.



같은 날 저녁 무렵에 《부자유전》의 중지가 보도되었다. 이에 따라 《부자유전》을 한 번 보려고 미술관으로 달려온 복수의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미술관에 전력으로 뛰어온다는 것은 필시 기분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런 아련한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철회될 작품을 만든 작가들에 대해서도 생각이 미친다. 《부자유전》의 중지에 의해 비판은 거듭 가속화되었다. 참여작가들 사이에서도 전시를 보이콧하는 사람이 나왔다. 협박은 멈추지 않았다. 8월 5일, 현내 다수의 자치체 앞으로 "8일 아이치현 내 초중고 및 유치원에 가솔린을 산포한다"는 테러 예고가 들어왔다. 7일에는 문예센터의 엘레베이터 안에서 "가솔린이다"라고 하며 액체를  뿌리는 사람이 나타났다. 


9일, 도요타 산업문화센터에서 공개좌담회를 개최하기로 되어있었다. 예술감독 츠다 씨와 후쿠시마현 이와키 시에 거주하는 활동가이자 문필가 고마쓰 리켄(小松理虔)씨 그리고 내가 패널이다. 주제는 "정情의 시대의 공공・조각에 대하여."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 사고의 유구화(遺構化)와 기념비화에 대한 내용이 될 예정이었다. 개최 여부는 전날 오후까지 판단이 갈리고 있었다. 중지에 대하여 아이치현 지사와 도요타 시장의 의견이 갈렸다. 테러 예고가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안전 확보가 가능하지 않은 점을 들어 연기하기로 결정되었다.



 

아이치 트리엔날레는 3년에 한번 개최되는 국제예술제다. 4회차인 이번 회차는 나고야시와 도요타시에서 열렸다. 내가 전시했던 도요타의 전시장의 백미는 싱가포르 출신 작가 호추니엔의 신작 〈호텔[旅館] 아포리아〉일 것이다. 도요타가 고로모(挙母)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때부터 역사를  요정([료테이]料亭)여관에서 전시되었다.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郎)와 요코야마 류이치(横山隆一)의 필름을 소재로 다양한 텍스트를 편집해 넣은 영상이 요정여관 설비에 그대로 투사된다. 음향에 대해 깊게 생각한 작품으로, 굉음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건축 자체가 흔들린다. 그것은 근대의 비명이며 공명이었다. 여기서 부각되는 것은 쿄토학파의 "오시마[大島]메모"를 둘러싼 문제의식이다. 걸작이었다. 1976년생의 호추니엔은 나보다 9살 연상. 앞으로 9년 안에 이정도의 작품을 만들수 있을까. 만들어 보이겠다, 라고 이를 악물며 몇번씩이나 전시장으로 발을 옮겼다. 
 



좌담회가 협박의 여파로 중지된 9일, 질려버릴 것 같은 더위 속에서, 이 전시장 앞에 같은 참여작가 다나카 코키(田中功起)씨를 마주쳤다. 호추니엔의 신작에 대하여 의견을 나눴다. "사진을 못 보여주게 되어버렸네요." 다나카씨가 말한다. 나의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다나카 씨의 목소리에는 석연치 않은 울림이 있다. 내 작품이 전시되고 있던 장소는 세 군데였다. 그 중 하나는 나가사키 원폭의 표상을 둘러싼 것, 또 하나는 패전과 점령이 얼마나 여성의 신체를 필요로 하는가라는 숨겨진 역사를 조명하는 것으로, 양쪽 모두 일본의 근대와 조각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조각작품과 평면작품과 텍스트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장 중 한 군데에 〈평화의 소녀상〉을 찍은 사진을 전시하고 있었다. 베를린 레닌 동상의 머리 부분, 나가사키 우라카미 천주당(浦上天主党)의 피폭된 성상을 접목한 세 점의 사진 작품이다. 8월 5일부터 〈평화의 소녀상〉의 사진만 뒤집어 놨다. 나는 품고 있던 생각을 다나카씨에게 온전하게 전할 수 없었다. 일세일원(一世一元[역주: 메이지유신 때 정립된 하나의 천황에게 하나의 원호만을 부여하는 제도를 가리킴])이 되고나서 처음으로 붕어(崩御)에 따르지 않은 개원(改元)을 통해 헤이세이(平成)는 레이와(令和)가 된다. 그 최초의 8월. 나는 역사가 찢어지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3.



쇼와 44년[1969] 2월 11일, 나는 국회의사당 앞에 없다. 


 

오후 11시 40분 쯤, 국회의사당 전면에서 200미터 정도 떨어진 이이 일가 집터 앞(井伊家止屋敷跡)에서 불길이 솟는다. 순찰중이던 순사가 소화기로 불을 꺼 멈춘다. 그것이 사람인 것을 알아차린 것은 불이 꺼지고 난 뒤의 일이다. 유체 옆에는 빈 파란 플라스틱 양동이, 타고 남은 성냥 잔해, 그리고 가솔린 냄새가 자욱하다. 분신자살이었다. 성별도 연령도 사람인지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까맣게 타 있었다. 도스킨 재질로 만들어진 더블 재킷이 남겨져 있었다. 주머니에는 '각성을 촉구하는 서한'(覚醒書)이라고 쓰여진 유서와 잘게 부스러져 있는 세 통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수학자 오카 키요시(岡潔), 참의원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郎),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 앞으로 적혀 있었다. 갈기 갈기 찢어져 있던 편지는 다시 붙여져 글자를 알아볼 수 있게 됐다. 짧은 문장이다. 



 

건국기념일을 맞아 일사(一死)로 일본민족을 각성시키고자 합니다. 뒷일을 부탁드리겠습니다.



 

편지의 발신인의 이름이 밝혀지고 신원도 판명되었다. 에토 고사부로(江藤小三郎). 유신 십걸(維新十傑)로 꼽히는 에토 신페이의 증손이었다. 에토 신페이는 에토 준(江藤淳)이 에가시라(江頭)에서 에토(江藤)로 개명한 계기가 된 인물이다. 에토 신페이는 정한론을 주장한 것 때문에 관직에서 물러나고 '사가[佐賀]의 난'의 주모자로 추대되었다. 일본국의 초대 사법경[사법성司法省의 수장]으로서 사법제도의 정비에 크게 기여했음에도 최후에는 사가성 안에서 참수당해 옥문에 목이 걸렸다. 당시의 법률로 따지자면, 효수는 금지되어 있지 않았다. 이 나라의 형법의 초석을 쌓은 자는 이렇게 죽었다. 아이러니하다.



그로부터 100년 뒤. 고사부로는 신페이의 증손이라는 자각이 강한 사람이었다. 중학교 졸업 후에는 자위대에 뜻을 두어 육상자위대 소년공과학교에 입학한다.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심신불건전'이라는 이유로 퇴학. 그 후 사가와 도쿄 사이를 오가며 일했다. 각성을 촉구하는 서한에는 ''혼돈의 세계, 먹구름이 자욱한 황국," "천황의 자식, 황민일환[皇民一丸] 되어," "우리 건국일에 혼백이 되어, 민족의 위기에 맞서는 자 되리(当たる者成)"이라는 문자가 적혀 있다. 향년 23세. 고자부로가 선택한 세 명은 이렇게 답장했다. 



 

에토 군의 죽음은 결코 의외의 것이 아닙니다. 일본은 이미 그정도까지 와 버린 것입니다. 에토 군 덕분에 이러한 청년도 아직 일본에 있구나 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대로라면 일본은 멸망해 버릴 것이라고 계속 이야기해 왔지만, 에토군처럼 나라를 생각하는 젊은이도 있었다는 것이지요.


—오카 키요시

 



인간의 죽음은 가장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행동입니다. (...) 그러므로 살면서 죽을 용기를 활용하고 싶었습니다. 저도 세상이 이대로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사람으로서 더욱 행동에 나설 생각입니다. 같은 우국 지사라면 힘을 빌려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제가 현재 하고 있는 것에 돌진하는 것이 에토 군의 유서에 부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시하라 신타로

 



어엿한 인간인가를 판단하는 것은 마지막 죽음에 의해 증명될 수 있다. "일사(一死)로"라는 것은, 시간(屍諫 [역주: 자신의 죽음을 통해 간諫하는 것])의 전통, 즉 사무라이의 전통으로 이는 가장 일본인다운 행위다. 에토 군의 죽음으로 인해, 나 자신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다. 


—미시마 유키오

 



4.



쇼와 42년[1967] 11월 11일. 나는 수상 관저 앞에 없다.



 

오후 5시 45분 쯤, 관저 정문 앞의 도로를 사이에 둔 도보로부터 3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불기둥이 인다. 일본공산당계 전학련 데모대가 관저앞에 도착하기 직전에 발생한 일이다. 데모대에 맞서 경비를 서고 있던 경관이 서둘러 달려온다. 한 남성의 몸에 불이 붙어 있었다. 상반신은 온통 화염에 휩싸여 있다. 사복경관이 상의를 덮어 씌워보지만 불길은 여전하다. 지나가던 택시에서 소화기를 가져와 결국 불을 끈다. 분신자살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경찰차로 긴급호송된 남자는 다음날 사망한다. 천으로 된 보스턴백이 남겨져 있다. 안에는 자살할 때까지의 심정이 담긴 유서와 '항의서'가 들어있다. 표서에는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귀하"라고 적혀있다. 편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사토 수상에게 죽음으로 항의한다.


 


그리고 편지는 다음과 같이 끝난다.

 



전쟁당사국, 즉 베트남 및 미국민도 아닌 제3국의 내가 분신하는 것은 조소거리가 될 지도 모르지만, 진정한 세계 평화와 베트남 문제의 조기해결을 염원하는 사람들이 나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다. 


 


항의는 미국의 베트남 정책을 지지하는 일본정부의 자세와 어중간하게 이뤄지고 있는 오키나와 반환교섭에 대한 것이었다. 린든 존슨 및 미국군부에 압력을 넣을 수 있는 것은 아시아에서 일본 뿐이라고 남자는 주장한다. 그것을 행할 의지가 없는 사토 에이사쿠에게 죽음으로 항의를 표했다. 


항의자의 이름은 유이 주노신(由比忠之進). 73세였다. 유이는 메이지 27년[1894] 후쿠오카현 이토시마시(糸島市)에서 태어났다. 오늘날의 도쿄공업대학교 전기과에서 공부하며 에스페란토어를 습득한다. 전후에는 직장을 다니면서 에스페란토어 사용자[에스페란티스토]로서 활동에 정력적으로 임했다. 차남인 유이 신[由比信]은 "피의 메이데이 사건"의 피의자 중 하나였다. 신이 피고가 된 메이데이 재판은 사건이 발생한 쇼와 27년[1952]부터 1심 판결이 내려지기까지 17년 9개월이라는 긴 시간동안 이루어졌다. 심리에 허비한 시간은 실로 길고 무겁다. 신은 직장을 잃는다. 주노신은 이 나라의 제도를 향한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유이 주노신은 특정 정치단체와 연결점도 없으며 철두철미하게 에스페란토를 통한 "인도주의적 평화주의자"였다는 것이 사후 보도에서 강조되었다. 유이의 죽음과 그 평화사상은 널리 알려진다.
 
1년 3개월 뒤, 유이가 분신했던 장소로부터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에토 고사부로는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인다.



 

5.



레이와 2년[2020] 1월 18일. 나는 나가사키 시청 앞에 있다.



 

현내의 고등학교 교원 조합에 초대받아 저녁 시간부터 강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강연 전에 『나가사키신문』과 인터뷰를 했다. 오전에는 나가사키 시청 현관 앞을 방문했다. 30년 전인 헤이세이平成 2년[1990] 1월 18일, 당시 나가사키 시장 모토시마 히토시(本島等)는 이곳에서 천황의 전쟁책임에 대해 언급했다는 것 때문에 총격을 당한다. 회복 후, 모토시마는 총격을 가한 우익단체 간부 남성에게 "용서한다"고 말했다. 



토요일의 시청에는 사람이 없다. 현관 앞에 나는 혼자 서있다. 도로 건너편에는 다음달부터 시작할 나가사키 원소절(랜턴페스티벌)을 위한 거대한 등불이 설치되고 있다. 사건이 일어난 날에도 있었던 것일까. 여기서 총성은 어떻게 울렸을까. 나는 딱 한번 손으로 두드린다. 마른 소리가 난다.



나가사키에서는 시장을 향한 총격이 2대에 걸쳐 이어졌다. 흉부에 총격을 당한 모토시마는 목숨을 건졌지만, 모토시마의 후임 이토 잇쵸(伊藤一長) 시장은 사망했다. 왜 나가사키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내게 있어서 이것은 나가사키의 폭심지(爆心地)가 무수히 많은 조각으로 수놓아져 있는 것과 연결된 문제이다. 
 
저녁 시간부터 시작되는 강연의 주제는 "평화의 조각에 관하여"로 정했다. 전날까지 나는 한국에 있었다. 〈평화의 소녀상〉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평화의 소녀상〉과 〈평화기념상〉. '평화'의 관을 쓴 일련의 조각을 보는 일은 나의 염원이었다. 강연에서 이것과 아이치 트리엔날레를 둘러싼 역사인식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계획이었다. 
 
하네다에서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들어갔다. 서울 시내는 이가 떨릴 정도로 춥다. 서울에서 KTX로 부산행. 부산에서 배를 타고 하카다博多에 간 후 전차를 타고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마지막으로 〈평화의 소녀상〉을 봤던 2016년 (헤이세이 28년)부터 4년 뒤, 소녀상의 숫자는 착실하게 늘고 있다. 이번에는 북조선과 한국의 군사경계선 국경[DMZ]에 인접한 임진각에 막 건립된 〈평화의 소녀상〉과 서울시내에서 아직 보지 못했던 소녀상, 부산의 일본대사관(역주: 일본 영사관을 잘못 표기한 것 같음)의 소녀상과 〈징용노동자상〉을 중심으로 보았다.

서울에서 묵은 곳은 서머셋 팔레스 서울. 객실 바로 아래에 김서경씨와 김운성씨가 제작한 〈평화의 소녀상〉 제1호가 보인다. 이 조각은 일본 정부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기 위한 지원운동단체에 의해 시위 1000회를 기념하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당시, 상 앞에는 일본 대사관이 있었다. 다른 건물에 입주한 대사관은 이곳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셈이다 (역주: 일본 대사관은 대사관 건물 재건축을 위해 2015년 종로 트윈트리 타워로 이전했지만 재건축이 백지화되자 그대로 트윈트리 타워에 있기로 했다). 지금 조각 앞에는 공백의 토지가 펼쳐져 있다. 지원단체의 24시간 농성은 조각 설치 이후부터 쭉 계속되어 왔다. 이곳의 경비관들도 24시간 경비체제다. 그 모습을 호텔의 객실에서 쭉 지켜보고 있었다. 〈평화의 소녀상〉이 설치된 것은 2011년 (헤이세이 23년)의 일이다. 이 조각이 한일 국민감정을 현저히 악화시켰다고들 말한다. 조각을 둘러싸고 사람들이 대립한다. 분석의 소용돌이 속에는 조각이 있다. 그것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다.


나가사키에서 강연이 끝나고, 가까운 분들과 회식을 했다. 나가사키 신문사의 이누즈카 이즈미(犬塚泉)씨로부터 총격 당일의 상황을 상세하게 듣는다. 나가사키 전후사 연구자인 아라키 타케시(新木武史)씨, 사회학자 야마구치 히비키(山口響)씨도 있다. 나가사키에 대하여 그들의 논문으로부터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다음날은 롯폰기의 국립신미술관에서 토크가 있다. 이른 아침에 비행기를 타야 한다. 과음하면 안되지만 그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 기뻐 나는 꽤 취할 정도로 마셨다. 야마구치씨에게 당신은 정치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야마구치씨의 '꿈'이 뭐냐고 물었다. 야마구치씨는 빙긋 웃으면서 꿈이라고 하는 설정 자체가 신자유주의적인 좋지 않은 발상이지 않을까요, 하고 일도양단의 대답을 했다. 나는 그게 웃겨서 배를 잡고 웃는다. 
 
모두 흩어지고 밤이 밝아질 무렵, 나는 〈평화의 소녀상〉 앞으로 간다. 이 거대한 조각을 앞에 두고 몇번이나 생각한다. 평화를 기념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평화란 무엇인가. 《표현의 부자유전 ・ 그 후》는 명백하게 현 정권에 대한 비판의 의도를 가진 기획이다. 실행위원회 분들은 '꿈'이 있었을 것이다. 그건 좋다. 하지만 '부자유전'은 '위안부'문제에 대한 '진실된 사죄'로는 이어지지 않는다. 〈평화의 소녀상〉을 각지에 설립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일본정부를 움직이게 하려면 일한청구권 협정을 무너뜨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무슨 말인가. 한국 지원운동단체가 사용하는 수법을 보면 알 수 있다. 지원운동단체가 고민하는 문제가 백일하에 드러나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운동에 의해 정권을 움직이는 방법론에는 눈을 번쩍 뜨게 하는 것이 있다. 위헌판결을 갖고 정부에 압력을 가한다. 일본에 대해서도 그것 밖에 방법은 없는 것인가. 패전으로부터 75년이 지났다. 시간은 이제 많이 남아있지 않다. '위안부'문제의 해결에는 100년이 걸릴 거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는 말과 같은 뜻이 아니다. 피해를 호소하는 여성들이 한명도 남김없이 죽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다. 



공립미술관에서 〈평화의 소녀상〉을 설치하는 것, 오우라(大浦)씨의 영상 등 천황의 도상을 불태워버리는 작품군과 함께 이것을 전시하는 것은 '해결'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도발이다. 도발을 통해 환기되는 것은 논의가 아니라, 의분(義憤)이다. 《부자유전》에서 오우라 씨와 시마다 요시코(嶋田美子)씨에 의해 쇼와 천황의 도상을 불태운 작품이 전시되었다. 그것은 모두 '도야마현립 근대미술관 사건'을 발단으로 한다. 이 작품들은 결코 단순한 천황제 비판이 아니다. 하지만 그 의도는 의분에 사로잡힌 항의자들에게는 닿지 않는다. 



작품의 의도나 배경은 이제 상관없는 일이다. 보도 그리고 SNS에 의해 의분은 확산된다. 의분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항의행동을 개시한다. 전화에 대응하던 현청 직원들의 이름을 폭로하고 질책한다. 당신의 아이가 다니는 보육원으로 찾아갈 거라고 협박한다. 항의는 자유로워도 좋다. 하지만 그 때 아이치에서 일어난 것은 인권을 훼손하는 용납하기 어려운 행위였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의분에 사로잡힌 자들을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잘라내 버려도 괜찮은 것일까. 



나고야 시장은 아이치 트리엔날레를 "일본인의 마음을 짓밟은 것"이라고 표현했다. 이것을 일소로 대응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럴 수 없다. 일본인의 '마음'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일본인의 '긍지(誇)'란 무엇인가. 고민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이 물음의 근간은 "일본에 있어 제국주의란 무엇이었나"라는 질문이다. 이 나라는 한번 그것을 손에 넣었고, 빼앗겼다. 스스로 내던져 버린 것이 아니라, 타의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다. 전쟁에서 패배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패배를 인정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패전기념비라는 것은 어떠한 형태를 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의 실패, 우리의 옮지 않음, 우리의 패배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필요한 것이다.  
 
미나마타 메모리얼, 평화기념상, 평화의 소녀상. 그것들은 바로 이러한 질문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게 있어 패전기념비를, 국립전쟁박물관을 만들려는 논의는, 역사인식을 분석하고 직시하지 않고는 시작할 수 없다. 레이와 원년(2019년) 8월. 내가 참여한 전시장에는 '〈평화의 소녀상〉의 사진'이 있다. 그 사진이 인터넷에 공개되어 확산되고 있을 때, 나의 작품은 '아직 있다'는 증거가 되어, 의분을 증폭시킬 수 있지 않을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8월을, 8월 15일을 넘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분신자살하는 사람이 나온다. 그렇게 생각했다. 아이치 트리엔날레 때 잇따랐던 협박과 소동속, '가솔린'이라는 단어에서 많은 사람들은 그 해의 7월에 있었던 교토 애니메이션 방화살인사건을 떠올렸다. 한편 나는 유이와 에토에 의한 '시간屍諫'을 상기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나의 작품을 봉封했다. 



레이와 원년 8월, 미술관에 누군가 불을 지를 때, 분신자살이 일어날 때, 나는 그곳에 없을 것이다. 설치가 끝나면 작가의 일은 끝이다. 작품의 관리와 전시장 유지작업은 운영자의 관할이다. 미술관이 공격대상이 된 것. 내가 참여한 전시장이 공격대상이 된 것. 미술관이 불타는 것. 그러한 의미를 몇번씩 생각했다. 나는 그곳에 없다. 그곳에 있는 것은 직원, 자원봉사자, 관객, 일반 시민이다. 나는 없다. 없다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에토 고사부로와 유이 주노신이 어떤 몸짓으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는지 궁금했다. 주위를 가득 채웠을 인간이 불탈 때 나는 냄새와 가솔린 냄새가 궁금했다. 쇼와 44년 2월 11일. 쇼와 42년 11월 11일. 이렇게 이 날짜들을 쓰는 것을 몇번씩 반복하고 있다. 문제는 분신자살 그 자체가 아니다. 자살한 사람의 사후, 그 죽음이 미화되는 것. 유지를 이어가려는 자가 그러한 생각을 확고하게 만드는 것이다. 미시마처럼. 


"뒷일을 부탁합니다."



 

6.



헤이세이 29년(2017년) 8월 12일, 나는 샬롯빌(Charlotteville)에 없다. 



전날인 11일 밤, 활동가들이 저항행동을 위해 결집했다. 이 거리에 모인 사람들이 내건 슬로건은 이런 것이었다.

"백인 목숨이야말로 소중하다 white lives matter."

공원에 설치되어 있던 로버트 E. 리 장군의 동상을 철거하기로 한 시 의회의 결정이 발단이 되었다. 리 장군은 남북전쟁 시대의 군사령관이자 남부군의 영웅이다. 동상철거에 대한 항의 의사를 표시하기 위해 결집한 것은 극우(ultra right) 및 KKK 등의 백인지상주의자들이었다. 다음날의 극우집회에서 백인지상주의자들과 반대파 사이의 격한 충돌이 일어났다. 히틀러를 신봉하는 남성이 차로 반대파를 들이받아 35명이 부상을 입고 한 명이 사망했다. 그녀의 이름은 헤더 하이어(Heather Heyer). 나와 같은 32세의 여성이었다. 사회적인 공정함 문제에 관심을 가진 활동가였다. 같은 날 오후, 버지니아 주지사는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미국에서는 90년대부터 콜럼버스 동상 파괴행위가 일어나고 있다. 남부연합의 기념비 동상에 대한 문제제기도 이전부터 계속되어 왔다. 하지만 사망자가 나온 것은 샬롯빌이 처음이었다. 공공공간에 남부연합의 영웅상이 내걸리는 것, 남부연합의 깃발이 공공시설에 휘날리는 것이 상징하는 것은 '축의祝意'이다. 이것은 즉, 남부연합의 가치관을 긍정한다는 태도의 표명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백인 이외는 인간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과 같다. 



역사는 항상 견디기 어렵고 부끄러운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조각은 몇번이고 무너뜨려지고 질질 끌려다니고 파괴되어 왔다. 페인트로 낙서가 칠해져서, 도끼로 머리가 잘려서. 기념비는 왕왕 축의에 기반하여 만들어진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 또한 영원히 계속되지 않는다. 새로운 소수자, 억압받는 자, 차별받는 자는 계속해서 '발견'된다. 



예를 들어 여성들의 '대량소실.' 



UNFPA(유엔 인구기금)은 〈세계인구백서 2020〉에서, 남아선호에 의해 여아가 '소실'되고 있다고 발표했다. 여기서 생명의 선별은 방치 및 중절 등을 통해 이루어진다. 중절에 주목해 보고 싶다. 태아의 성별은 수정이 이루어질 때 결정된다. 하지만 그 판정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태아가 성장한 뒤에 초음파 검사를 통해 음경을 눈으로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판정은 큰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유전자의 성性,' '생식샘[性腺]의 성,' '호르몬의 성 ・ 성기의 성,' '뇌의 성,' 마음, 몸, 지향, 여러 요소가 뒤얽혀 있는 것이 '성性'이다. 중절에 있어 남아선호라는 것은 남근숭배다. 이 세계는 남근에 계속해서 의존하고 있다.



예를 들어 2025년에 찾아올 문제.



국민의 4분의 1이 후기고령자가 되는 날을 대비한 「인생 최종 단계의 의료」(역주:일본 후생노동성에서 발표한 지침서. '인생 최종 단계의 의료∙케어 결정 프로세스에 관한 지침'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것은 의료가 아니다. 연명을 하지 않는 것의 의미, 되도록 신속히 죽어주는 것의 의미를 기술한 것이다. 



예를 들어, 이 나라의 수많은 자살.



그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항상 계속해서 '발견'된다. 그러한 많은 죽음을 어떻게 기념(記念/祈念)할 것인가. 

어떠한 기념비(monument)로? 

어떠한 조각으로? 

계속해서 '발견'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기념비가 필요한 것이다. 부끄러움을 계속 견디는 행위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7.


헤이세이 24년(2012년) 1월 20일, 나는 교토에 없다. 



오후 5시 50분 쯤에 남성 한명이 산조 오오하시(三条大橋)의 다릿목으로 다가오고 있다. 남성은 2미터가 넘는 높이의 대좌(臺座)를 기어오른다. 대좌 위에는 다카야마 히코쿠로(高山彦九郎)의 조각이 세워져 있다. 에도후기의 근왕[勤王]사상가다. 이 조각은 천황궁을 향해 예배하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쇼와시대가 끝나고, 헤이세이 시대가 끝난 뒤, 다카야마 히코쿠로가 머리를 숙이고 뭘 하는 것인지, 이제는 모르겠다. 그 사이, 이 조각은 '도게자상[土下座像]'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그 사이, 천황을 향해 예배하는 몸짓이 '도게자'로 변해있다. 



남성은 대좌를 올라 지참하고 있던 페인트를 도게자상의 머리 부분에 뿌린다. 다카야마의 상투를, 얼굴을 하얗게 물들인다. 그리고 대좌에서 내려와 자전거를 타고 떠난다. 남성은 잡히지 않는다. 성명도 내지 않는다. 페인트는 지워져서 이 사전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사라진다. 누구도 말하지 않는. 이것은 항의이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여기서 견디지 못했던 '역사'란 무엇일까. 그것을 '발견'하기 위해 이 글이 쓰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