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주: 2025년 SeMA 비평연구프로젝트 마지막 연재글 「망각의 장치 과정으로서의 기념비」의 한 꼭지를 담당하는 섹션이었지만, 분량 문제로 최종 원고에 포함하지 않은 부분이 아까워서 블로그에 올립니다.
... 조각의 설치 배경을 조명하는 이유는 공공 조각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설치 경위를 결코 소홀히 다룰 수 없기 때문이다. 이념이나 사상의 선전과 무관한 공공 조각은 존재할 수 없다. 어떤 조각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 조각이 어떤 배경에서 그 장소에 놓여지게 되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조각 그 자체와 그 조각이 어떤 배경에서 설치되었는가에 대해서 분리하여 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1
기념비라는 것은 건립 경위뿐만 아니라 건립지의 성격과 역사를 자세히 살피지 않고는 제대로 분석할 수 없다. 베를린이라는 도시가 기념비건립이라는 측면에서 가진 특이성을 고려한다면, 이 지점은 더욱 중요해진다. 〈평화의 소녀상〉이라는 것은, 독일, 일본, 한국을 아우르는 가해-피해 또는 승자-패자의 이분법으로 소급되지 않는 특이한 형태의 글로벌한 기념비 양상이 드러나는 장으로서 기능하기도 한다. '기념비'가 기념해야 할 장소를 벗어나 전혀 다른 문화와 역사가 깃든 곳에 '이식'되는 현상에 깃든 함의는 무엇일까.2
〈평화의 소녀상〉은 2011년 수요집회 제1000회를 맞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현 정의기억연대)가 김서경・김운성 작가에 제작을 의뢰하여 처음 만들어졌고, 최초 건립지는 당시 일본대사관이 들어서 있던 건물 앞이었다. 허가받은 건립은 아니었고, 2017년 서울 종로구에서 해당 〈평화의 소녀상〉을 공공조형물로 지정하기 전까지는 불법 노상 적치물에 해당했다. 이후 〈평화의 소녀상〉은 점점 숫자가 늘어 한국 전역에서 세워졌고 아시아, 유럽, 북미로도 진출하기 시작했다. 해외 건립의 경우, 현지의 교민 혹은 시민단체와 긴밀한 협력이 없었다면 대부분 성사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독일의 경우를 살펴보자. 유럽 최초로 프라이부르크에 설치될 예정이었던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 정부의 압박으로 무산되고, 2022년 카셀대학교 학생회의 주도로 교정에 설치되었던 상도 학교 측에 의해 2023년 철거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베를린에서는 철거가 쉽게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데,3 그 이유는 〈평화의 소녀상〉 건립을 주도한 코리아협의회의 활동이 1980년대 초부터 특정 민족의 틀을 넘어서 이어져온 베를린 내의 다양한 여성 커뮤니티 간의 연대 이력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1990년에 창립된 코리아협의회는 2008년 에센에서 베를린으로 이전하고 이듬해 일본군'위안부' 행동그룹(AG "Trostfrauen")을 출범시킨다. 현 시점에서 독일 내 〈평화의 소녀상〉과 관련한 활동을 주도하는 그룹인데, 사실 그들보다 앞서 베를린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공론장을 형성하고 있던 것은 재독한국여성모임(koreanischen Frauengruppe in Deutschland)과 베를린 일본여성회(japanische Fraueninitiative Berlin)다. 1978년에 창립된 재독한국여성모임은 서독 정부가 1977년부터 한인 간호사들의 체류 연장을 불허하고 마지막에는 강제추방에 이르게 만들려는 시도에 대해 조직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하면서 탄생한 단체다. 재독한국여성모임은 독일의 '방문노동자(gastarbeiter)' 제도에 대해 공부하고 서독 정부가 이를 통해 전후 재건 비용을 얼마나 절감할 수 있었는지를 배워가며, 독일의 이주노동자 권익 보호를 주 목적으로 삼았다.4 처음에는 이렇게 지금 이곳의 당사자 문제에서 시작했지만, 1980년대부터 한국의 노동운동, 특히 여성 노동자들과 연대하고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독일 내에서 목소리를 내며 외연을 확장해 나간다. 독일 시민사회 전반의 관심을 끌고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문화운동을 겸하기 시작했는데, 1981년에 시작된 재유럽 오월민중제를 주도하고 독일인들과 보다 적극적인 문화교류를 위해 1986년 베를린에서 한독문화협회(Koreanisch-Deutscher Kulturkreis, KDK)를 결성하기도 했다.5
베를린 일본여성회 역시 처음에는 당사자 문제에서 출발한 단체다. 기존의 일본 국적법상 국제결혼의 경우 아버지가 일본인인 경우에만 자녀에게 일본 국적이 부여되는 '부계혈통주의'의 개정을 목적으로 1982년 '국적과 인권을 생각하는 모임(国籍と人権を考える会)'이라는 이름의 국적법 및 여성주의 공부 모임으로 시작하여 1991년 '베를린 일본여성회'(ベルリン・女の会)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6 베를린에서 거주중인 일본 여성 중에는 국제결혼한 사람이 많았던 만큼, 국적법 문제는 그들 자신의 삶과 직결된 사안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시작된 여성 인권에 대한 관심이 한국에서 '기생관광'을 하는 일본 남성들에 대한 비판적인 의식으로 확장되고, 재독한인여성모임과 함께 공부회를 조직해 이를 바탕으로 기생관광 반대운동을 시작했다.
재독한국여성모임과 베를린 일본여성회는 이미 1982년 3월 베를린에서 일본 여성 작가 도미야마 다에코(富山妙子)의 광주항쟁을 다룬 전시를 함께 개최했던 것을 계기로 교류하고 있었다. 도미야마는 1988년에 다시 베를린을 찾아 전시를 열었는데, 이 때의 작품은 대부분 일본의 조선인 강제징용과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룬 것이었다. 이 전시와 1991년 김학순의 공개증언을 계기로, 재독한국여성모임과 베를린 일본여성회는 본격적으로 '위안부'운동에 뛰어들게 되었고, 1993년 남북한과 필리핀, 네덜란드의 생존자를 초빙하여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Kreuzberg)구에 위치해 있는 베르크슈타트 데어 쿨투렌(Werkstatt der Kulturen; 현 오윤[Oyoun])에서 유럽 최초로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국제심포지움 《전쟁과 강간》(Krieg und Vergewaltigung)을 개최한다.7

베를린 일본여성회와 재독한국여성모임 모두 당사자의 권익과 직결된 사안에서 시작되었지만, 당사자성에 한정되지 않도록 공부와 활동을 확장하고 더욱 넓게 연대해 나갔다.8 이들은 당사자성에 매몰되어 독일 내에서 고립된 '소수민족' 공동체가 아니라, 다양한 문제에 대해 보다 넓게 연대하고 활동할 수 있는 운동 단체로 거듭나며 '호스트 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도미야마 다에코는 두 단체의 계급적 배경 차이와 식민주의 역사에서 비롯한 감정의 골을 언급하며, 이를 극복하는 것은 분명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적은 바 있다.9 어렵게 이뤄낸 그들의 연대의 자산이 오늘날 베를린에서의 〈평화의 소녀상〉 건립과 유지의 큰 동력이 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한국 정부 및 국내 시민단체나 독일 내 한국계 단체만이 벌인 활동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했을 것이다.

이제 앞서 인용한 오다와라의 주장이 여기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알 수 있다. '같은 조각'이라 여겨진다 하더라도 한국에서의 〈평화의 소녀상〉과 베를린의 〈평화의 소녀상〉을 다른 시점에서 바라봐야 하는 이유는 그 건립 배경은 물론, 실제 건립지에서의 경위 또한 등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베를린이라는 특이한 장소성에 대해서도 간과할 수 없다. "일본에 있을 때보다도 독일에 있는 편이 한국분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훨씬 많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한국도 일본도...독일을 하나의 만남의 장소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째서 일본에서는 의외로 기회가 없는 걸까 하고 생각해보면 커다란 물음표가 머리에 떠오릅니다."10 재독일본인 작가 다와다 요코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기념비'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 모든 요소들에 대해 세심히 살펴보는 일은 그곳에 뿌리내리고 활동의 터전으로 삼으며 기념비와 실제로 마주하게 되는 구성원들의 문제를 바라보는 일이기도 하다. 베를린의 〈평화의 소녀상〉은 보다 넓은 연대와 참여를 것을 전략이자 자산으로 삼아온 네트워크라는 것을 의식해야 할 필요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베를린의 기념 경관에 이주민 출신으로 구성된 커뮤니티가 으레 '남의 일'로 간주되는 사안이 어떻게 '자기 일'이 될 수 있을지 접점을 모색하여,11 자신들의 요구를 적극 관철시키는 과정과 결과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점이 무엇일지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 小田原のどか[오다와라 노도카], 「「過去」との絶え間ない対話のために:《平和の少女像》をめぐって」[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를 위하여: 〈평화의 소녀상〉을 둘러싸고], 『美術手帖』[미술수첩] 2020년 4월 4일, https://bijutsutecho.com/magazine/insight/21563 (2020년 7월 15일 확인). [본문으로]
- 〈평화의 소녀상〉은 구체적으로 일본군'위안부'제도를 겨냥하고 그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동시에 보다 넓은 차원에서 여성 폭력에 대한 경각심과 평화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보다 넓은 맥락을 강조한다고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을 옅어지게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해서도 안된다. 오다와라의 다음 구절 참조. "또, 〈평화의 소녀상〉이 세계 각국에 설치되는 상황을 로절린드 E. 크라우스의 '확장된 장에서의 조각'이라고 하는 논점에 입각하여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확산되는 것과 같은 위치에서 논하는 경향도 있다. 하지만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모체인 〈지옥의 문〉으로부터 잘려나가 당초의 맥락으로부터 탈착되었다는 점에서 〈평화의 소녀상〉의 양상과는 크게 다르다는 것은 지적해 두고싶다. 덧붙여, 로댕의 조각에 대한 '열광'과 〈평화의 소녀상〉이 각지에 설치된 배경에 있는 '운동'은 같은 위치에 두고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차이야말로 논의되어야 할 터이다." 小田原のどか, 「「過去」との絶え間ない対話のために」. 오다와라가 참조하고 있는 크라우스의 논의는 다음 참조. Rosalind E. Krauss, The Originality of the Avant-garde and Other Modernist Myths (Cambridge MA: MIT Press, 1986), 277-290. [본문으로]
- 이 글이 쓰여진 것은 2025년 8월경으로, 현시점까지의 전개과정을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은 2025년 10월 17일 새벽에 미테구청에 의해 고용된 용역업체와 경찰에 의해 기습 철거된다. 2026년 1월부로 베를린 ZKU에 다시 임시설치된 바 있지만, 1년 뒤의 운명은 불투명한 상태이다. [본문으로]
- 서독은 전후 재건을 위한 노동력 수입을 위해 1960년대부터 '방문노동자'(gastarbeiter) 제도의 일환으로 한국을 비롯해 터키, 그리스 등 여러 나라에서 인력을 받아들였지만, 1970년대에 경제성장이 둔화하기 시작하면서 점점 외국인 유입을 거부하고 이미 들어와 있는 '방문노동자'마저 내보내려고 한 바 있다. [본문으로]
- 이유재 저・박주연 역, 「초국가적 관점에서 본 독일 한인 디아스포라」, 『역사비평』 110 (2015): 338-339; 어수갑, 「5.18과 80년대 독일에서의 민주화운동」, 『트랜스내셔널 광주 II: 5・18과 한인 디아스포라』, 학술대회 발표집, 튀빙겐대학교, 2024년 10월 25-26일, 36. 다음 링크에서 PDF 확인 가능. https://miri518.or.kr/resources/board/academic/20241120160900_1_%EC%9E%90%EB%A3%8C%EC%A7%91.pdf (2025년 7월 15일 확인). [본문으로]
- 하지만 단체의 독일어 명칭은 처음부터 일관되게 'Japanische Fraueninitiative Berlin'이었다. 小林淳子[고바야시 준코], 「1985年国籍法改正と海外在住日本人女性配偶者のトランスナショナルなシティズンシップー‘ベルリン・女の会’の活動を事例にー[1985년 국적법 개정과 해외거주 일본여성 배우자의 트랜스내셔널 시민권: '베를린 일본여성회'의 활동 사례]」, 『国際ジェンダー学会誌[국제젠더학회지]』 5 (2007): 105; 107. 皇甫康子(환보 칸댜), 第78回 ベルリンの壁を見て[베를린 장벽을 보며] (2015) https://www.a-atoms.info/exchange/column_detail.php?id=576&c=1 (2025년 7월 15일 확인). 1985년 일본 국적법이 결국 개정되어 부모양계혈통주의가 도입되었다. 한국의 국적법이 부모양계혈통주의로 바뀐 것은 1998년이다. [본문으로]
- "2020: Bleiberecht für die Friedensstatue in Berlin gewährt," Deutsche Ostasiamission, 2020년 12월 1일, https://doam.org/projekte/menschenrechte/trostfrauen/berlin-friedensstatue/5123-2020-bleiberecht-fuer-die-friedensstatue-in-berlin-gewaehrt (2025년 7월 15일 확인). 이 페이지에 첨부되어 있는 서한 중 한국녹색당 유럽지부장의 "Offener Brief an den Bezirksbürgermeister Stephan von Dassel" 참조. [본문으로]
- 1993년 첫 일본군'위안부' 국제심포지움에서는 그 당시 현재진행중이던 구유고슬라비아 내전에 관한 세션도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유고 내전에 대한 독일의 책임과 전시성폭력 문제를 함께 다뤘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구유고슬라비아 내전의 성폭력 문제에서 시작한 독일 여성단체인 메디카 몬디알레(Medica mondiale)와 코리아협의회가 적극적으로 교류・연대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배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전시 여성 폭력이라는 사안을 통한 '넓은 연대'의 기반은 운동 초기부터 마련되고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본문으로]
- 이는 간과할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지점인데, 재독한국여성모임의 구성원들은 대부분이 파독간호사였고 따라서 독일 내에서는 노동자의 위치였던 반면, 베를린 일본여성회의 구성원들은 대부분이 유학생이었다. Tomiyama Taeko, "The Pilgrimage of a Painter: An Encounter with the Soul of Minjung," The Japan Christian Review 61(1995): 66. [본문으로]
- 서경식・타와다 요오꼬著, 서은혜訳, 『경계에서 춤추다: 서울-베를린, 언어의 집을 부수고 떠난 유랑자들』(창비, 2010) [본문으로]
- 실제로 독일 사회에서는 2차세계대전 당시 국가에 의해 이루어진 조직적인 강제성노동에 대해 이야기가 거의 되고 있지 않다. 나치는 강제수용소 수감자들의 '생산성' 향상을 위해 '특별 시설(Sonderbauten)'이라는 이름으로 매춘소를 운영하는 등 국가에 의해 조직적으로 강제성노동이 행해졌지만 이에 대한 연구는 굉장히 미진한 편이다. 특히 당사자 구술증언 등의 1차사료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며, 있는 자료도 번역되지 않고 있다. Samantha Moon, "Puffkommandos: The Instrumentalization of Gender in Concentration Camp Brothels," Princeton Historical Review 10.1(2025): 5-6. 다음 링크에서 해당 문헌 열람이 가능하다. https://history.princeton.edu/undergraduate/princeton-historical-review/winter-2025-issue/puffkommandos (2025년 7월 15일 확인). 따라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직면하는 것 또한 그들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는 일이 될 수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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