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회 광주비엔날레에서 선보인 기후범죄법정 작업으로 한국에서도 알려진 네덜란드 작가 요나스 스탈(Jonas Staal)이 2024년 4월에 이플럭스에서 공개서한을 게재했다. 독일학술교류처장 조이브라토 무커지(Joybrato Mukherjee) 앞으로 쓰인 이 편지에서, 스탈은 (1) 자신이 독일학술교류처(DAAD)의 베를린 예술가 레지던시 프로그램(Berliner Künstlerprogramm) 롱리스트에 올랐지만 이를 거절하는 의사를 표했고, 거절의 이유로 (2) 쾰른대학교의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초빙교수로 내정되어 있던 미국의 정치이론가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의 초청 취소를 들며, 결정권자인 독일학술교류처장 무커지를 규탄했다. 프레이저의 초청이 취소된 이유는, 그가 이스라엘이 가자에서 자행하고 있는 학살을 규탄하고 팔레스타인에 연대하는 성명서에 이름을 올렸기 때문이다. 지난 가을에 시작된 하마스 공격 및 이스라엘의 가자 침공 이후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무자비하게 탄압받고 있는 독일과 대부분의 '서방' 유럽사회에서, 스탈의 공개서한은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예술인들의 많은 지지를 얻었고, DAAD 베를린 레지던시 참여기회를 자발적으로 내려놓았다는 점이 스탈의 행위에 정당성을 더해줬다. 1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점이 있다. 베를린 레지던시에 있어서, 독일학술교류처장은 물론 인원이나 예산을 자를 수 있는 힘이 있겠지만, 레지던시 운영의 세부적인 사항에 대해 일일이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지 않다. 프로그램의 실질적인 운영은 당시 그리고 현 총괄디렉터인 실비아 페어만(Silvia Fehrmann)과 그 아래 각 분과별 디렉터들이 맡고 있다. 독일의 공기관(학술교류처도 독일의 연방기관이다)들은 공식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지하며,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반유대주의로 규정하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연대 물결을 경찰 동원, 해고, 예산 자르기 등을 통해 탄압하고 있지만, 기관도 결국 여러 사람들이 함께 운영하는 것이고 당연하게도 베를린 레지던시 내부에서도 이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유수의 외국인 작가들을 대상으로 60년동안 운영되어 온 프로그램인 만큼, 베를린 레지던시 또한 팔레스타인인 작가나 친팔레스타인 성향 작가들과도 연을 맺고 있으며 이팔전쟁 이후에도 이들을 가능한 방식으로 물밑 지원해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요나스 스탈의 공개서한은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예술계뿐만 아니라 친이스라엘 독일 언론 및 공기관의 이목을 베를린 레지던시로 돌렸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팔레스타인 작가들을 물밑 지원하던 기관 인원들의 운신의 폭을 매우 협소하게 만들었다. 스탈은 관계성이 아주 희박한 프레이저 초청 취소와 자신의 레지던시 선정 기회를 엮어가며 레지던시의 기회를 관심경제와 맞바꿨지만, 이로 인해 오히려 베를린 레지던시의 도움을 받던 팔레스타인 및 친팔레스타인 작가들에게 리스크를 초래했다. 하지만 극단적 갈등 상황은 편들기와 흑백논리를 강요하고, 이러한 분위기에서 아무도 스탈을 공개적으로 비판할 수 없었다.
아트스페이스 풀 (전) 디렉터 안소현이 공동기획으로 참여한 《우리가 그랬구나》 전시에 대한 문제제기를 보면서 요나스 스탈이 떠오른 이유는 두 사례 모두 섬세한 문제제기 방식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제제기 이후 예술계 사람들은 안소현 비판/옹호로 갈려 소셜네트워크에서 쌈박질 중이고 연구소 사람이나 연구소와 관련된 사람들은 목소리를 선뜻 내지 않고 있고, 누구는 갑자기 진흥원장에게 검열의 혐의를 걸고...점점 초점을 잃은 채 중구난방 아사리판이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먼저 중요한 것을 확실히 하고자 한다. (1) 공동체 내 성폭력 문제에서 운영진의 책임에 대한 공론화 모색을 위해 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2) 《우리가 그랬구나》 전시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러한 모색에 도움이 되었는가? 나는 문제가 된 기획자가 과연 위안부 문제를 다룬 전시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문제제기 자체에는 동의하지만, 이 문제의 책임을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에서 찾으려는 방식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러한 방식은 결국 공론화의 여지를 협소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우리가 그랬구나》 전시
《우리가 그랬구나》 전시는 성수동 더페이지 갤러리에서 2024년 10월 4일 - 10월 31일 사이에 열렸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과 진흥원 산하의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지원을 받아 안소현과 서영걸이 공동기획자로, 고이즈미 메이로, 김지평, 서평주, 송상희, 안해룡, 엄지은, 이토 다카시, 전진경, 정정엽, 주용성, 홍이현숙 등 총 11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이 중 저널리스트 출신 참여작가, 즉 안해룡, 이토 다카시, 그리고 주용성은 영상 및 사진 작업으로 참여했다. 식민주의 문제를 다루며 아카이브 자료와 창작을 아우른다는 점, 그리고 안해룡 작가가 참여했다는 점에서 《우리가 그랬구나》는 2021년 세마벙커에서 열렸던 강제징용 관련 전시 《있지만 없었던》을 생각나게 한다. 다만, 이번 전시에 걸린 아카이브 자료는 양도 적고 폭도 좁으며, 무엇보다 송신도 할머니의 소송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를 프로젝션이나 TV스크린 상영이 아닌 태블릿으로 아카이브 자료처럼 전시해 놓은 것은 의문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년 도쿄 여성국제법정을 담은 촬영분이나 위안소 터를 기록한 사진 등(WAM 소장) 평소에 접하기 어려운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어 분명 의미있다. 아트스페이스 풀의 성폭력 문제를 축소・은폐하려는 시도 끝에 공간 폐쇄를 결정했다는 의혹을 받는 안소현이 기획으로 참여했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전시에 대한 긴 리뷰가 대신 나왔을 수도 있겠다.
문제제기에 대한 문제제기
몇몇 미술인들이 어떻게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전시에 공동체 내 성폭력을 축소 은폐하려던 이력을 가진 사람이 기획자로 선정될 수 있냐는 민원을 여성인권진흥원에 제기했고, 이에 진흥원은 "전시 기획자 선정은 계약을 체결한 용역 업체에서 자체적으로 진행한 사항"이라는 지극히 공무원스러운 답변을 냈다. 이후 비슷한 시기에 2정은영과 권김현영은 각자의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해당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했고 여성예술인연대(AWA)의 동조가 뒤따랐다. 셋의 문제제기를 정리해보면, (1) 부적절한 이력의 전시기획자 선정, (2) 전시 하나에는 너무 큰 3억4천만원이라는 예산규모, 그리고 (3) 이상하리만치 촉박했던 사업공모기간에 대한 것으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이러한 문제의 근원을 '이번 정권/정부'의 성향에서 찾고 이를 연구소와 결부시키려는 시도도 눈에 띄는데, 성급한 일반화와 섣부른 단정은 현명하지 못하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우여곡절이 많았던 기관이고, 지금도 많은 한계가 존재한다. 2018년 8월,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의 하부기관으로 연구소의 설립이 공표되었을 때, 이러한 구조로는 연구와 운영의 독립성이 보장되기 어려울 뿐더러 예산 또한 터무니없이 적게 배정된 탓에 졸속설립이라는 비판이 따랐다. 결국 초대 원장인 김창록 교수가 취임 3개월만에 사퇴하는 일이 벌어졌고 2020년 정의연 사태의 여파로 인해 연구소의 인원도 몇차례 바뀌게 되었다. 내가 연구소에 처음 방문한 2021년에도 대부분의 연구원들은 계약직이었으며, 지금은 그 당시보다도 축소된 인력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그때와는 다르게 대부분 정규직으로 채용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연구소의 설립은 한국에서 '위안부'문제가 공론화 된 이래 30년동안 축적되어 온 활동과 연구 결과를 정리하고, 개인 몇 명의 '좋은 일'에 의존하거나 산발적이고 단발적인 연구 형태가 아닌 앞으로의 간학문적・중장기적인 연구를 가능하게 하는 기관의 출범을 원했던 활동가와 연구자들의 노력과 소망의 결실이라는 점이다. 졸속설립이라는 비판 이후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연구소의 자율성과 예산 확보를 위해 부단히 문제제기해 온 덕에 연구소도 나름의 자율성과 예산을 확보할 수 있었다. 여전히 진흥원 산하 기관이기에 진흥원장과 (그 위의) 여가부장관의 결재권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고 게다가 정권이 바뀌면서 발생하는 애로사항도 있을거고 이에 따른 윗선 눈치를 안 볼수 없겠지만, 그러한 한계 속에서도 연구원들은 재량을 발휘해 연구 및 출판, 학술대회, 영화제, 아카이빙 등 다양한 방면으로 사업을 기획하고 진행하고 있다. 같이 일해보면 공기관인만큼 제도적 한계에서 오는 치명적인 답답함이 있지만(나도 쓴소리 하려고 하면 정말 한바가지 할 수 있다), 국가기관임에도 과거의 위안부 운동 및 연구가 치중되어 있던 한일외교관계나 국제법 프레임에 한정되지 않는 다각화된 기획을 위해 힘쓰는 모습이 무척 의외였다.
현 정권의 성향이나 연구소에 대한 편견은 배제하고 위의 세 가지 문제제기를 하나씩 뜯어보겠다. (1) 전시기획자 선정에 큰 비리가 있었을 확률은 희박하다. 내가 들은 바로는 연구소에서 외부인력에게 사업을 맡길 때는 심사를 외부인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에게 위탁한다. 때에 따라 다르겠지만 심사위원은 보통 8명으로 구성되며 이 중 한 명이라도 심사대상 사업에 대해 뭐가 됐든 강하게 반대하는 경우 선정은 불가능하다. 이 8+-명의 심사위원들이 안소현의 문제적인 이력을 알아내고 조사해 볼 생각을 할 가능성은 전무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언론 기사화가 되었던 풀의 성폭력 가해자와 관련된 자료는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풀 디렉터로서의 안소현의 행적을 문제삼는 자료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있는 거라곤 누군가의 소셜네트워크 포스트, 프라이빗 노트, 또는 블로그 글뿐이다. 이러한 흔적들조차 이미 풀에 대해 알고 있지 않는 상태에서 기적적으로 우연히 발견하게 되지 않는 이상, 파악할 길은 없다. AWA는 "몇 해 밖에 지나지 않은 사건을 조사하지 않고 심사를 진행했다면 무책임하다는 질타를 면할 수 없다"고 썼는데, 서울예술계 속의 대안공간 하나에서 일어난, 대중매체는 커녕 독립매체나 작은 지면에도 등장하지 않고 예술인들의 소셜네트워크 사이에서만 회자되다가 사그러든 이 사건에 대해 위안부연구소 외부 심사위원이 파악하고 있어야 할 터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언론을 탄 양철모 사건을 다룬 기사에는 풀이나 안소현에 대한 언급이 없다). 무엇보다 지금의 서울예술계 내에서도 풀에 대해서 몰랐던 그리고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더 많다. 우리의 세계가 우주는 아니다. 이러한 현실을 객관적으로 냉철하게 인식하고, 스스로의 폐쇄성에 대해 돌아볼 필요가 있다.
(2) 3억4천만원이라는 예산규모도 그렇게 문제될 게 아니다. 참여작가에게 작품 제작지원을 했다면 충분히 말이 되는 규모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시장에 가봤다면 쉽게 알 수 있는 사안이기도 하다. 전시에는 제작년도가 2024년이라고 표시된 작업이 대부분이고 이 중 영상으로 된 작품 말미에 크레딧을 확인하면 해당 전시 기획을 통해 작품 제작지원을 받았다는 표시가 나와 있다. 공개적으로 문제제기 한 사람들 중 이러한 사실을 아무도 제대로 확인해보지도 않고 감사의 필요성 운운했다는 건 반성해야 될 일이다. 그리고 마지막 사항인 (3) 사업공모기간의 경우, 해당 기획에 대해 어느정도 (연구소와 위탁받을 인원 사이에) 사전 조율된 상태에서 공모를 진행했을 가능성이 있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문제가 될 수도 있지만, 기획 인력 부족에 시달리는 기관에서 외부 기획자와 협력할 때 종종 쓸 수 있는 방식이다. 3
물론, 안소현의 이력에 대해 연구소도 심사위원회도 몰랐고 알 길도 없었으니 어쩔수 없다고 치고 끝내자는 말은 아니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현명한 대처가 필요하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연구원들 중에도 아트스페이스 풀 문제에 대해 알고 나면 해당 전시의 공동기획자로 안소현이 선정되었다는 사실에 문제의식을 가질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문제제기한 분 모두 예산과 심사과정에 대해 잘 알아보지도 않고 "공기관의 세금 남용 및 도덕적 해이의 혐의"를 들먹이며 연구소를 몰아붙여, 기관쪽에서 방어적으로 나올 수 밖에 없는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했고, 오히려 그간 연구소에서 발휘할 수 있었던 재량권을 윗선(예: 진흥원장)에서 제한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줬다. 따라서 연구소 내부에서 문제제기에 동의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힘들어졌다. 이 분들이 공기관 하루이틀 상대해 본 사람들이 아닐텐데, 연구소도 안소현과 한통속일거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서야 이렇게 섬세하지 않은 방식으로 문제제기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여하튼, '문제의 껀덕지' 내지는 '더이상의 구설수'를 방지한다는 명목하에, 윗선들은 연구원들이 나름 관료사회의 줄타기를 하면서 결재받을 수 있었던 여러 프로젝트를 취소하고 축소할 것이고, 실제로 이미 예정되었던 몇몇 기획이 잘리고 있다. 아무 발표도 해명도 없이 《우리가 그랬구나》의 공식 웹사이트에서, 공동기획자 이름이 삭제된 것도 이러한 과정의 일부일 것이다. 섬세하지 않은 문제제기 방식은 이렇게 동조할 법할 사람들의 운신의 폭을 협소하게 만들고 심지어 피해까지 초래할 수 있다.
무엇보다, 진흥원이나 외부 기관에서 조사에 나선들 도대체 어떤 결과를 도출할 수 있을지가 가장 의문이다. 일단 연구소에는 조사권한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이 안소현에게 소명을 요구한 것일 테다. 그리고 조직도를 보면 알겠지만, 연구소에 제기된 민원은 연구소의 상위기관인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산하의 다른 부서에서 처리한다. 《우리가 그랬구나》 전시 토크에 참여한 박세영의 문제제기에서 볼 수 있듯, 진흥원장은 애초에 《우리가 그랬구나》 전시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갖고 있던 것 같다. 일단 민원이 제기되었고 원장 입장에선 감사를 막을 이유가 없으니 아마 연구소는 감사대상이 될 것이다. 감사가 끝나기 전에 진흥원으로부터 입장표명 등이 있을 것 같지 않고, 무엇보다 이 감사결과에서 '공동체 대표로서 내부의 성폭력 문제를 축소/은폐하려 한 문제적 이력이 있는 사람을 기획자로 선정한 것'에 책임을 묻는 내용이 발표될 확률이 얼마나 될까. 공기관의 입장에서는 '위안부'문제 관련 전시 기획자로서의 안소현의 자질에 대해 공개적으로 문제삼을 타당한 근거가 마땅치 않다. 풀에서 일어난 일을 가지고 안소현에게 사법적 책임을 묻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듭 말하지만 풀과 안소현의 문제는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나 기사가 아니라, 누군가의 프라이빗 노트, 소셜네트워크, 혹은 블로그를 통해서밖에 알 수 없다. 공기관이 조사에 나서더라도 이를 근거로 적격・부적격을 판단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심사를 진행하는 사람들이 안소현의 문제적인 이력에 대해 파악할 길이 없었음에도, 관심은 끌렸고, 감사는 해야겠고, 더 이상의 문제제기와 구설수는 피하고 싶으니 최대한 연구소의 재량권을 축소하고 문제될 싹을 모조리 자르는 보수적인 방식으로 운영될 것이다. 특히 현 정권의 성향을 조금이라도 거스른다고 판단되는 주제나 내용을 가진 기획은 모두 퇴짜맞을 것이다.이게 문제제기 한 분들이 원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연구소를 통해서 해당 사안을 공론화하려는 게 목적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세금 유용의 혐의를 걸 게 아니라 연구소에 물밑 접촉하여 (아니면 해당 전시에 작가로든 토크 패널로든 참여한 분들 중 동조할 만한 분을 물색하여) 공론화 방식을 꾀해보는게 가장 그럴듯한 방법 아니었을까. 공개적으로 문제제기를 한 분들이 왜 연구소나 참여 인원에게 물밑으로 먼저 접촉해보지 않았는지는 나도 모른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이유가 뭐였건, 이렇게 배타적인 스탠스를 취하고 섬세하지 못한 방식으로 잘 알아보지도 않은 채 세금 유용이라던지 도덕적 해이라던지 혐의를 걸며 문제를 제기해야 했는지는 의문이다. 연구소나 전시 관련자의 목소리는 전무하고 그저 예술계 사람들이 안소현을 비판하거나 옹호하는 쪽으로 갈려 아사리판인 이 상황을 외부인이 보면 풀을 둘러싼 알력싸움을 여기저기서 벌인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왜 예술계 내지는 풀과 관련된 사람들이 진작에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가지고 섬세하지 못한 방식의 문제제기로 연구소에 불똥을 튀기냐는 소리를 들을 법도 하다. 하지만 연구소와 관계된 사람들은 대부분 매우 점잖은 사람들이니 그런 말을 대놓고 하진 않을 거다. 그냥 점잖아서만이 아니라, 연구소의 난처한 상황을 이해하는 동시에 풀 사건에 대한 문제의식에도 동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은영은 그간 안소현이 "대학에서 페미니즘이나 퀴어 관련 수업을 맡고 있음을 알게 된 때에도, 외교부 지원을 크게 받아 이스라엘 전시를 만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떄에도, '풀'에서 저지른 자신의 만행을 '성비위를 해결한 업적'으로 둔갑시켜 모 지역 문화재단에 입사했다는 제보를 받았던 때에도, 여성사박물관 설립 TF팀에서 맹활약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에도, 모 지역 비엔날레의 감독직에 최종 후보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듣고, 각종 관제전시의 심의위원으로 등장하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에도, 이렇게까지 분노하지는 않았"지만, 이번 '위안부'문제를 다룬 전시에 기획으로 참여한 데에서 "분노의 팽팽한 끈이 완전히 끊어졌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왜 이 사안에 특히 더 크게 분노해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똑같이 분노해야 되는 것 아닌가? 동일하게 일관적으로 문제제기해야 했던 것 아닌가? '위안부'문제가 성폭력 내지 여성억압의 가장 최상위 혹은 특별한 지위를 가진 사안이라고 생각해서인가? (만약 그렇다면 나는 그러한 생각방식은 문제적이라고 말하겠다) 풀 해체 이후 쌓은 이력은 기획자로서의 안소현의 공신력을 다져주었고 결과적으로 이번 전시 기획자로 선정될 수 있게 했다.
대안
문제제기에 대한 문제제기, 그러니까 섬세한 문제제기의 필요성의 피력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풀 문제도 외면할 수 없다. 앞서 썼듯, 풀에서의 안소현의 행적은 사법적으로 처리될 수 없는 성격의 것이다.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 모두 정황만을 근거로 들고 있는데 회의록, 대화녹음, 메신저 내용 등의 물증은 제시하지 않았고, 제시된다 하더라도 왜인지 귀책이 전혀 될 것 같지 않은 예감이 든다. 연구소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위에서 설명했듯 선정 과정에 거대한 허술함이나 비리가 있을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허술한 것은 예술계 내에서 안소현의 문제가 지금껏 publicize된 방식일 뿐이다.
그래서 돌고 돌아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공론화'다. AWA는 성명문에서 "해결되지 않은 사안을 외면하지 않고 거듭 이 이야기를 수면 위로 올려 공동체 차원에서 논의하는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맞는 말이다. 다만, 이제 연구소를 통해서 해당 사안을 공론화 할 수 있는 방법은 물건너 갔다. 연구소 쪽에서 문제의식에 동의하는 분들의 조력을 통해 웹진 결에서 좌담회를 열거나 기고를 해 볼 수도 있었을 것 같지만, 이제 이는 불가능하고 결국 위안부 문제에 관한 공론화 창구를 하나 잃어 문제제기하는 분들의 입지만 협소해 진 셈이다. 블로그나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개개인을 고발하거나 call out하는 방식에는 한계가 있다. 이미 4년 전 사건이 터졌을 때에도 같은 방식을 통해 안소현을 규탄했겠지만, 그러한 이력이 성공적으로 은폐되어 지금 이 사태에 이르른 것만 봐도 그 한계를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접할 수 있는 매체와 지면을 통해 보다 세심하게 그리고 치밀하게 공간/단체 운영자의 성폭력 은폐 혹은 축소 문제를 제기하고 논의, 즉 '공론화'해야 한다. 그러한 매체와 지면이 없다면 만들어야 한다. 관련 문제를 다뤄온 인사를 초빙해서 아예 이름을 박아넣은 공개 세미나를 여는 방식도 있다. 이런 방식은 시간도 걸리고 지난하고 누군가 책임지고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어렵겠지만, 공식적인 지면이나 매체를 통해 문제가 제기된 이상 최소한 문제가 되는 이력을 공적 공간에서 완전히 은폐하는 것은 어려워질 것이다.
나는 2018년 S 대안연구공간에서 공동체 내 성폭력 문제가 제기되고 처리되는 과정을 겪었다. 공동체 내부에서의 해결을 원한다는 피해자의 바램에 따라, 공동체 내부 조사위원회이 꾸려져 합리적인 프로토콜을 따라 조사를 하고 마찬가지로 합리적인 근거로 성폭력에 해당한다는 판단이 있었는데, 조사위원끼리의 의견이 갈리고 전체회의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결국 그 안에서는 제대로 된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항의의 의미로서 뜻이 일치한 다른 구성원들과 함께 탈퇴를 결정했다. 이후 공동체 내 성폭력 사건 처리를 주제로 권김현영을 강연자로 모시고 세미나를 열었고, 얼마 뒤 이에 관해 정희진이 신문 칼럼을 내기도 했다(다만 공간의 이름과 실명 언급은 피하셨다). 비슷한 시기에 중앙대 강사 최철웅의 성폭력 문제가 불거졌고 그가 소속되어 있던 M 대안연구소가 (마찬가지로 그가 소속되어 있었지만 추방시킨) 자유인문캠프와의 공방 끝에 폐쇄라는 수순을 밟은 것도 목도했다. 내가 보고 겪은 것은 풀 사건과 닮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그래서 풀 사건에 대해 문제제기한 분들과 공감되는 점도,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점도 있다. 6년이 지난 일이지만, 성폭력에 대한 판단이나 가해자에 대한 처분이 아닌 성폭력이 발생한 공간 운영진의 책임에 대한 문제는 아직도 제대로 공론화되거나 논의되지 않았고,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결국 지금부터라도 다시 혹은 계속 차근차근 논의를 진전해 나가는 것 말고 방법은 없다.
- 물론 롱리스트에서 최종선발되려면 심사를 더 거쳐야 한다. DAAD레지던시는 외국인 작가에게 1년의 기간동안 베를린에 집, 작업실, 생활비를 지원하고 전시나 기획 등에 대한 재정지원 또한 별도로 제공한다. 유사사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외국인 작가에게 많은 혜택을 부여하는 프로그램이다 (독일인 혹은 이미 독일에서 일정 기간 이상 거주하고 있는 작가는 원칙적으로 대상에서 제외된다). 1963년부터 전세계의 수많은 유명 작가들이 이 레지던시를 거쳐갔다. [본문으로]
- 용역 업체는 (주)에이앤티스토리 (대표 유지연)으로 나와있다. [본문으로]
- 예를 들어 송상희 작가의 신작은 86분의 길이에 육박하고 대부분 위안소가 있었던 오키나와와 인도네시아에서 촬영한 푸티지로 구성되어 있다. 모두가 이 정도 규모의 작품은 아니지만, 열 몇 점의 작품제작비, 11명의 작가 사례비, 장비 대여료 및 공간대관료 등등을 생각해보면 납득이 가는 예산 규모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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