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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포스터, "민족지학자로서의 예술가?" The Artist as Ethnographer? (1995)

Marcus and Myers, The Traffic in Culture (1995)에 실린 할 포스터의 The Artist as Ethnographer?를 초벌번역한 것입니다. 

 

이 제목은 벤야민이 1934년 4월에 빠리의 파시즘 연구소(the Institute for the Study of Fascism)에서 처음 발표한 텍스트의 제목인 "생산자로서의 저자"를 떠올리도록 지은 것이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러시아의 혁명문화의 영향 아래, 벤야민은 좌파 예술가들로 하여금 "프롤레타리아의 편에 서도록" 요구했다.[각주:1] 전위적인 1934년 4월의 빠리에서 이러한 요구는 급진적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접근법은 급진적이었다. 왜냐하면 벤야민은 "진보한"advanced 예술가에게 혁명적인 노동자처럼 예술적 생산수단에 개입하고 기존 매체의 "기술"technique을 바꾸고 부르주아 문화의 "장치"apparatus를 변혁하도록 요청했기 때문이다. 올바른 "경향성"tendency만으로는 부족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곁"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리는 어떤 것인가?"라고 벤야민은 물었다. "그 자리는 자선가의 자리, 이념적 후원자의 자리, 즉 불가능한 자리입니다." 이 구절은 아직도 혹독하게 다가온다. 

  오늘날 좌파 예술계에서 이와 관련있는 패러다임이 존재한다. 바로 민족지학자로서의 예술가 패러다임이다. 논쟁 대상은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아직 독립된 예술분야의 부르주아적 제도권, 그리고 이 제도권이 추구하는 예술, 관객, 그리고 정체성에 대한 배타적인 정의이다. 하지만 유대의 주체는 변하였다. 오늘날 예술가는 문화적, 혹은 민족적 타자의 이름 아래 주로 투쟁한다.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생산주의적 모델의 가장 기본적인 가정들은 이아직  새로운 준準인류학적 예술 패러다임에 속에서 남아있다. 그 중 첫번째는 예술적 변화의 장이 바로 정치적 변화의 장과 다름없고, 거기에 더해 이 장은 항상 다른 곳elsewhere, 타자의 필드에 위치해 있다는 믿음이다. 생산주의적 모델에서는 이것이 사회적 타자, 즉 착취당하는 프롤레타리아의 것이었다. 준인류학적 모델에서는, 이것이 문화적 타자, 억압받는 탈식민지, 서발턴, 혹은 서브컬쳐의 것이 된다. 두번째는 이 타자는 항상 바깥에 있고, 이러한 외부성alterity이 지배문화 전복의 주요 거점이라는 믿음이다. 세번째는, 여기서의 예술가가 사회적 타자 혹은 문화적 타자로 인식되지 않는 경우, 이 예술가는 이러한 변혁적인 타자성에 제한적인 접근만이 가능하며, 타자로 인식되는 예술가는 자동적으로 접근이 가능하다는 믿음이다. 이것들을 전체적으로 고려해 보면, 벤야민의 생산자로서의 저자 패러다임과 또 다른 연결점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바로 민족지학자로서의 예술가가 "이념적 후원자"가 될 위험성이다.[각주:2]

   엄격한 맑스주의자는 이 예술에서의 준인류학적 패러다임에 문제를 제기 할 수도 있다. 계급과 자본주의적 착취를 인종과 식민주의적 억압으로 바꿔치기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이다. 엄격한 후기구조주의자는 정 반대의 이유로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생산주의적 문제의식을 제대로 대체하지 못한다는 것, 즉 정치적인 것의 구조를 그대로 가져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근거로 말이다. 정치적인 것의 구조란, 역사의 주체라는 개념, 그리고 이러한 위치성을 "진실"이라는 용어를 통해 정의하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진실을 "타자성"alterity라는 용어를 통해 찾으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준인류학적 태러다임은 생산주의적 패러다임과 마찬가지로 각 패러다임이 기반해 있는 "실재주의적 믿음"realist assumption에 대한 반성이 없다. 이 사실주의적 믿음이란, 타자 (탈식민지의 타자 혹은 프롤레타리아)가 사회적으로 탄압받고 정치적으로 전환적이며, 물질적으로 생산적이기 때문에, 이념계가 아닌 실재계에 있다는 믿음이다.[각주:3] 이러한 실재주의적 믿음은 주로 원시주의적 환상과 맞물린다. 원시주의적 환상이란, 타자가 (백인 [쁘띠]부르주아 주체는 접근하지 못하는) 원초적인 정신적 그리고 사회적 과정에 접근할 수 있다는 환상이다.[각주:4] 물론 나는, 몇몇 지점에서는 이런 실재주의적 믿음이 적합하기도 하고 원시주의적 환상이 전복적일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차이를 정체성으로, 그리고 타자성을 외부성outsideness으로 자동적인 방식으로 코드화하는 것에는 이의를 제기하고자 한다. 이러한 코드화는 오랫동안 소외성marginality의 문화정치학을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오늘날은 이런 코드화가 내재성의 문화정치학을 불가능하게 하는데, 이러한 정치학이야말로 중심과 변방을 나누는 지정학적 모델이 더이상 적용되지 않는 다국적 자본주의 아래의 탈식민 상황에 더 적합할 수 있다.[각주:5]

  원시주의적 환상은 동시대 예술계의 준인류학적 패러다임에 앞서 존재했던 두 움직임 속에서 활성화 되어있었다. 하나는 미셸 라이리스와 조르주 바타이가 관련되어 있는 1920년대 후반~30년대 초반의 반체제적인 초현실주의dissident Surrealism이며, 다른 하나는 레오폴 셍고르와 에이메 세제르가 관련되어 있는 1940년대 후반~1950년대 초반의 네그리튜드 운동négritude movement이다. 두 움직임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문화적 타자의 급진적 외부성radical alterity과 무의식의 저항적 잠재력을 연결시켰다. 하지만, 두 움직임 다 바로 이러한 원시주의적인 연상법으로 인해 제한적이게 된다. 반체제 초현실주의가 부분적으로는 자신의 타자화self-othering의 의식에 심취하기 위해 문화적 타자성을 탐구한 것처럼, 네그리튜드 운동 또한 문화적 타자성을 자연화해버림으로써, 이 제2의 천성에 의해 제약받게 되었다. 오늘날의 준인류학적인 예술에서는 이러한 원시주의적 환상은 잔여물로만 남아있다. 하지만, 실재주의적 믿음, 즉 타자가 "실재에 가깝다"dans le vrai는 믿음은 강력하게 남아있고, 이 결과로 그때나 지금이나 예술가는 패싱detour된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보기보다 단순하다. 생산주의자가 부분적으로 후원자의 자리에 앉기 위해 프롤레타리아의 현실에 서려고 했던 것처럼, 오늘날의 준인류학적 예술가는 정치적인 활동과 제도권에 저항하려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필드의 공동체와 협업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부분적으로, 이 예술가의 후원자들에 의해 사회적 봉사활동, 경제발달, PR...또는 예술의 형태로 기록되기 위해서일 수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예술가가 커리어에 있어 전략적으로 행동한다거나 미술관과 미디어가 온전히 악의만으로 모든것을 흡수한다는 (우린 사실 이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있다), 즉 개인의 타협이나 제도적 흡수에 대한 단순 불평이 아니다. 나는 정치적, 여기서는 준인류학적 예술에서의 실재주의적 믿음이 끼치는 구조적인 영향, 특히 정치적 진실을 투영된 외부성에서 찾으려는 시도의 영향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가를 외부성에 맞춰 자동적으로 코드화하는 것의 문제점을 언급했는데, 여기엔 추가적인 문제가 있다. 첫번째로, 타자로서의 그리고 외부로서의 정치학을 투영하는 것은 지금 여기의 정치학으로부터 초점을 돌릴 가능성이 있다. 두번째로, 이것이 부분적으로 투영이기 때문에, 여기서의 외부란 단순한 의미에서의 타자가 아니다. 

  이 문제들을 하나하나 다뤄보도록 하자. 일단 외부성outsideness에 대한 믿음. 우리가 오늘날 거의 전지구적인 경제체계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온전한 외부라는 것은 더 이상 바로 상정될 수 없다. 이러한 인식은 세계체제를 전체화하려는 데에서 비롯하는 게 아니라, 그러한 전체화에 대한 내재적 저항(초월적인 것이 아닌)을 구체화하려는 데에서 비롯한다. 또한, 낭만주의적인 단순 대립항을 설정하는 것보다, 복합적 겹쳐짐complex imbrication의 전략적 의미야말로 오늘날 우리의 탈식민 상황에 더 적합하다.[각주:6] 두번째는 타자성alterity의 투영. 이 타자성이 우리의 무의식과 항상 겹쳐지게 되면, 타자가 "자신화"selve the other되는 것보다, 자신이 타자화되는 효과가 더 커지게 된다. 오늘날 많은 비평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신을 타자화 하는 것은 인류학과 정치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있어 핵심적일 수 있다. 혹은, 좀 더 우회적으로, 초현실주의와 같은 지점에서 인류학을 자기분석auto-analysis (미셸 라이리스가 했던 것처럼)이나 사회비판 (조르쥬 바타이가 햇던 것처럼)으로 의제화 하는것이 문화적으로 저항적이고 심지어 정치적으로 중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뻔한 위험성도 도사리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러한 자기 타자화는 자아도취로 쉽게 흘러가고, 여기서 "민족지학적 자아성립"ethnographic self-fashioning은 철학적 나르시시즘의 실천으로 변모한다.[각주:7] 물론, 이러한 반성성reflexivity은 주체 위치성에 대한 자동반사적인 가정들을 뒤흔드는 데 큰 역할을 했지만, 그만큼 동일시성의 가면무도회a masquerade of the same를 추구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 이론계에서의 고해성사 유행은 종종 감성비평의 재림을 야기하고, 예술계에서의 유사민족지학적 보도의 유행은 세계 예술시장의 여행지travelogues from the world art market의 둔갑한 형태를 낳았다. 학계나 예술계에서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산책자flânerie를 목격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인류학, 예술, 그리고 다른 담론들 사이에 무슨 오해가 있었던 걸까? 지난 10년간의 여러 기획과 반성을 지적해 볼 수 있겠다. 첫번째로, 몇몇 인류학 비평가들이 일종의 예술인 선망을 형성했다 (제임스 클리포드의 "민족지학적 초현실주의"의 병치법juxtapositions을 향한 열정이야말로 영향력 있는 사례이다).[각주:8] 이 시점에서 보면, 예술가는 우연성에 열려있고 차이에 민감한, 형식적 자성성formal reflexivity의 귀감이 된다. 하지만 여기서, 예술가가 과연 모범적인 사례인걸까, 아니면 어떤 특정한 이상적인  자아(콜라쥬 작가, 기호학자, 전위자로서의 인류학자)의 투영인 것일까?[각주:9] 즉, 이 예술가를 향한 선망이 자기 이상화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러한 방식의 투영이 이 지점에서 멈추는 것은, 예술계에서나 인류학계에서나, 아니면 더 나아가 신 역사주의나 문화연구계에서조차 흔치 않은 일이다. 이러한 투영방식은 자주 탐구의 대상, 즉 문화적 타자에게까지 이어지며, 문화적 타자는 인류학자, 예술가, 비평가, 혹은 역사학자의 이상적인 상을 비추게 된다. 물론 이러한 투영방식은 인류학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 학제의 고전(예를 들어 루스 베네딕트의 문화의 패턴)들은 모든 문화를 예술가 집단으로 제시하거나 문화를 상징적 실천들의 미학적 "패턴"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이들의 방식이 보다 대놓고 하는 것이었다면, 오늘날의 인류학 비평가들은 이러한 투영방식을 탈신비화demystification라고 부른다.[각주:10]

  오늘날 이 선망의 방향은 거꾸로도 흐르기 시작했다. 예술가 또한 민족지학자 선망에 잡아먹히고 있다. 이 선망은 비평가들, 특히 문화연구와 신역사주의의 비평가들에게도 적용되는데, 이들은 둔갑한 형태로 민족지학자의 역할을 맡는다. 팬으로 가장하는 문화연구 민족지학자 (정치적 연대를 근거로 들지만, 어떤 사회적 불안감이 여기에 도사리고 있을지!), 그리고 전문 아카이비스트로 가장한 신역사주의 민족지학자 (학자적 품위를 이유로, 역사학자들을 추월하기 위해)에 대한 선망이 그것이다.[각주:11] 하지만 대체 왜 동시대 예술계에서  인류학에 이런 특정한 위상을 부여하는 것일까? 또, 여기에는 선례가 있다. 초현실주의에서 타자는 무의식으로서 상정된다. 아르 브뤼art brut에서 타자는 반문명적인 존재로 표상된다. 추상표현주의에서 타자는 원초적인 예술가를 나타낸다. 이러한 방식은 1960년대와 70년대의 예술속에서 다양하게 드러난다 (대지예술의 원시주의, 인류학적 장으로서의 예술계 등). 하지만 오늘날의 전환에서 특수한 것은 무엇인가? 첫째로, 인류학은 타자성alterity의 학문으로서 추대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인류학은 예술적 실천과 비판적 담론에서 정신분석학 다름으로 많이 쓰이는 공용어나 다름없다. [각주:12] 두번째로, 인류학은 문화를 대상으로 하는 학제이며, 이렇게 참조점이 넓은 분야는 포스트모던 예술 및 예술비평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했던 것이다. 셋째로, 민족지학은 맥락적contextual이라고 여겨지며, 이것에 대한 기계적인 수요는 동시대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의 종사자들 (이중 몇몇은 일상에서의 필드워크를 추구한다) 또한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로, 인류학은 간학문적인 것the interdisciplinary을 중재하는 분야로 여겨지며, 이는 동시대 예술계와 이론계에서 기계적으로 가치를 부여받는다.[각주:13] 마지막으로, 다섯째, 인류학의 자기비판이야말로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며, 이로 인해 비판적 민족지학은 중심부의 자성성reflexivity at the center을 불러오면서도 동시에 변방 낭만주의romanticism of the margins를 보존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을 근거로, 독자적인 인류학적 탐사는 정신분석학에 대한 퀴어 비판과 마찬가지로 선구자의 지위를 갖는다. 비판의 날이 가장 날카롭게 느껴지는 이유다. 

  이러한 민족지학적 전환이 외부에서 오는 유혹만이 아님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적어도 앵글로계 미국 중심지의 예술에 내재되어 있는 위력에 의해 움직이고 있기도 하며, 이에 대해서 나는 여기에 그저 윤곽선을 그릴 수 있을 뿐이다. 다성주의자들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예술은 지난 35년간 일련의 탐사 과정에 의해 형성된 궤적을 그리고 있다. 예술 작품의 객관적인 구성 요소들로부터 시작하여 지각의 공간적 조건들을 거쳐 이러한 지각의 신체적 기반들에 이르기까지, 이는 60년대 미니멀리즘 작업, 개념주의 미술, 퍼포먼스, 신체 예술, 70년대의 장소특정적 작업 등에서 보여졌던 전환들을 가리킨다. 이 과정 속에서 예술 제도권은 단순히 물리적 공간(작업실, 갤러리, 미술관 등)으로만 이야기될 수 없게 되었다. 예술 제도권이란 다른 기관들과 실천들로 이루어진 담론망discursive network, 그리고 다른 주체성들과 공동체들 또한 포함했다. 예술의 관찰자 또한 현상학적으로 제한되지 않게 되었다. 이들은 이제 다양한 언어로 규정되고 다양한 차이 (성, 민족 등)로  나타나는 사회적 주체가 되었다. 물론 이러한 인식은 예술에만 내재된 것이 아니다. 다른 사회적 운동들 (특히 페미니즘)은 물론 다양한 이론적 발달 (페미니즘, 정신분석, 그리고 필름의 종합, 그람시의 재발견, 알튀세르 적용법, 푸코의 영향 등) 또한 여기에 중요하기이는 마찬가지였다. 중요한 점은 미술이 이런 방식으로, 인류학이 조망한다고 여겨지는 확장된 문화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결과가 나왔는가? 하나는 주어진 기관이나 관련된 공동체를 민족지학적으로 도표화 하는 것이 오늘날의 장소특정적 예술의 주된 형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건 물론 좋은 것이지만, 유사민족지학적 비판은 매우 자주 후원되고 프랜차이즈화 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유예술appropriation art이 미학적 장르가 되었던 것처럼, 오늘날의 장소특정적 작업 역시 미술관의 한 범주가 되버릴 위험을 안고 있다. 여기서 제도권 예술은 예방을 목적으로 비판을 수입한다 (예방의 대상은 제도권 안에서 제도권을 향해 가해지는 내재적 비판이다). 이것이 제도권 안의 아이러니이다. 다른 종류의 아이러니는 장소특정적 작업이 제도권 밖에서 후원을 받을 때, 즉 주로 로컬 단체들과 협업할 때 생겨난다. 여기서 진정성, 독창성, 단일성 등의 가치는 포스트모던 예술의 비판적 금기 아래에서 사라지고, 예술가가 참여하고 있는 장소, 지역동네, 혹은 공동체의 속성으로서 돌아간다. 이러한 대체과정에 대해서 내재적으로 잘못된 것은 없지만, 여기에서도 기억해야 할 것은 후원자 또한 이러한 "속성"들을 개발을 위한 가치로서밖에 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점이다.[각주:14] 물론 제도권 또한 위에 언급한 이유들을 기반으로 (사회적 봉사, PR, 경제개발, 예술 투어리즘 등) 자신의 활동을 확장하기 위해 이러한 장소특정적 작업을 착취할 수 있다.[각주:15] 이 경우,제도권은 내세워야 할 작품을대체할 수도 있다. 전시는 문화자본 축적을 위한 스펙터클이 된다.

  이러한 과정들에 대해 나는 오로지 냉소적인것만은 아니다. 몇몇 예술가들은 이러한 기회를 창조적인 방식으로 공동체들과 협업하기 위해 사용했다. 예를 들어, 몇몇이 보다 더 효과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특정한 방식으로 형성된 억압되어 있는 역사를 복구하거나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예술가에게 주어진 혹은 예술가가 직접 자처하는 유사민족지학적 역할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이러한 설정은 민족지학적 권위에 대한 편견을 이에 대해 문제제기 하는 것만큼이나 촉진시키고 제도권 비판을 설파하는 것만큼 회피하도록 한다.

  다음과 같은 가정을 해보자. 물론 이것이 풍자라는 것을 난 인정한다. 한 예쑬가가 큐레이터에게 장소특정적 작업에 대해 연락을 받는다. 이 예술가는 제도권에 의해 어떤 공동체와 협업하기 위해 한 마을에 보내지지만, 이 공동체와 충분히 상호작용하기에 쓰일 돈도 시간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상호작용의 형태들은 주로 재현을 위한 레디메이드로 구성되기 일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획은 만들어지고 미술관에 설치될 작업 혹은 그 공동체에 주어질 작업이 만들어진다. 몇가지의 민족지학적 참여관찰자 규칙들이 보여지고 비판된다. 예술가의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포착된 타자와의 제한적인 관계만이 결과로 나올 뿐이다. 거의 자연적으로 초점은 협업적인 탐사에서 "민족지학적 자아성립"으로 빠진다. 여기서 예술가가 탈중심화decentered되는 정도는 타자가 예술의 탈을 쓰게 되는 정도에 비하면 별로 높지 않다.[각주:16]

  다시 말해, 이러한 투영방식은 민족지학적 모델을 (은밀하게든 아니든) 따르는 다른 실천들에서 작용하고 있다. 타자는 재현을 활용하고, 젠더를 전복하는 등의 행위를 하는 자로서 받아들여지며 선망받는다. 이 모든 방식에서 예술가, 비평가, 혹은 역사학자는 자신의 실천을 타자의 영역에 투영한다. 타자의 영역은 진정으로 토착적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혁신적인 것으로 해석된다! 물론, 이것은 과장이고, 이러한 방법론의 적용은 많은 혜안을 가져왔다. 하지만 이는 또한 타자의 영역에서 타자의 이름 아래 많은 것들을 지워버렸다. 이것은 적어도 내가 이해하는 한, 민족지학적 권위 비판의 정반대이고, 민족지학적 방법론의 정반대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불가능한 자리"는 예술가, 비평가, 그리고 역사학자들의 공통된 직업이 되어버렸다. 

 

참고자료:

루이 알튀세르 (1990) "Philosophy and the Spontaneous Ideology of the Scientists." In Philosophy and the Spontaneous Ideology of the Scientists and Other Essays. London: Verso.

발터 벤야민 ([1934] 1978) "The Author as Producer." In Reflections. Ed. Peter Demetz, trans. Edmund Jephcott, pp.220-238. New YorkL Harcourt Brace.

발터 벤야민 (1968) "The Work of Art in the Age of Mechanical Reproduction." In IlluminationsL Essays and Reflections. Ed. Hannah Arendt, trans Harry Zohn, pp. 217-251. New York: Schocken Books.

할 포스터 (1993) "The Politics of the Signifier: A Conversation on the Whitney Biennial." October 66(4): 3-28.

미셸 푸코 (1977) Language, Counter-Memory, Practice.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스티븐 그린블랏 (1980) Renaissance Self-Fashioning.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데니스 홀리에 (1992) "The Use-Value of the Impossible." October 60(2):3-24.

장 자미 (1986) "L'ethnographie mode d'inemploi. De quelques rapports de l'ethnologie avec la malaise dans la civilisation." In J. Hainard and R. Kaehr, eds., Le mal et la douleur. Neuchâtel: Musée d'ethnographie.

조셉 코수스 (1975) "The Artist as Anthropologist." Fox 1. 1991. Reprinted in Art After Philosophy and After, Collected Writings, 1966-1990, pp. 107-128. London and Cambridge, Mass.: MIT Press.

 

  1. 스탈린이 1934년경 이러한 문화를 비난한 것은 오늘날 "생산자로서의 저자"의 해석을 왜곡하는 아이러니한 요소들 중 하나일 뿐이다. ("기계적 재생산 시대의 예술 작품"에 대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나의 글의 제목은 또한 조셉 코수스Joseph Kosuth의 "인류학자로서의 예술가"The Artist as Anthropologist를 유추하고 있기도 하지만, 두 글의 관심사안은 꽤 다르다. [본문으로]
  2. 이 위험은 "타자"로서 상정된 예술가에게 있어 오히려 더 커질 수 있다. 이 예술가가 현지의 정보제공자로서의 역할을 떠맡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념적 후원자"의 비판은 "타자를 위한 말하기의 수모"와 헷갈려서는 안된다. 1972년 들뢰즈와 푸코 사이의 대화에서 나온 이 금기는 1980년대 미국의 좌파 비판에서 폭넓게 활용되었고, 대체발언에 힘을 실어준 만큼이나 극단의 죄책감을 낳았다. 푸코 (1977) 209쪽 참조. [본문으로]
  3. 이러한 주장은 나중에 정 반대의 주장을 한 인물의 초기 저작에서 내세워졌다. 롤랑 바르트는 『신화론』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러므로 신화적이지 않은 언어가 있으며, 이는 생산자로서의 인간의 언어다. 현실을 이미지로서만 보존하지 않고 바꾸기 위해 인간이 말을 할 때마다, 그가 언어를 무언가를 만드는 행위와 연결시킬 때마다, 메타언어는 언어-객체를 가리키게 되고 신화는 불가능해진다. 이것이 왜 제대로 된 혁명적 언어는 신화적일 수 없는가에 대한 이유이다." ([1957]1972) 146쪽. [본문으로]
  4. 이 환상은 생산주의적 모델에서도 작용한다. 프롤레타리아 또한 주로 이러한 의미에서 "원시적"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5. 이와 관련한 논의는 Foster (1993) 참조. [본문으로]
  6. 이런 의미에서 호미 바바와 같은 비평가들이 "제3공간"third spaces과 유예된 시간deferred times같은 개념을 고안해 낸 것이다. [본문으로]
  7. 자신의 저작 The Predicament of Culture (1988)에서 제임스 클리포드는 "민족지학적 자아성립" 개념을 발전시키는데, 부분적으로 이는 스티븐 그린블랏Stephen Greenblatt (1980)에서 파생한다. 이 참조점은 신 인류학에서의 민족지학 비판과 신역사주의에서의 역사 비판의 공통성을 가리킨다. (더 많은 것은 아래 참조) [본문으로]
  8. 클리포드는 앞서 언급한 저작에서 또한 이 개념을 발전시킨다. "모든 민족지학자들이 어느 정도는 현실을 재창조하고 재조합하는 초현실주의자이지 않은가?" (147쪽). 몇몇은 얼마나 예술과 인류학이 초현실주의에서 상호적이었나에 대해 문제제기한다. Jean Jamin (1986), Denis Hollier (1992) 참조. [본문으로]
  9. 즉, 오래전에 피에르 부르디외가 Esquisse d'une théorie de la pratique (1972)에서 비판한 구조주의적 투영방식과 닯아있는 후기구조주의적 투영방식이 있는 게 아닌가? [본문으로]
  10. 우연히도 이 예술가 선망은 신 인류학에만 유일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예술가 선망은 1960년대에 시작되었단 역사담론의 수사학적 분석에서도 작용하고 있었다. 헤이든 와이트Hayden White는 "The Burden of History" (1966)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토록 화자된 현대 역사학자들의 '예술적 기교'에도 불구하고, 이 세기에서 초현실주의적, 표현주의적, 혹은 실존주의적 역사학을 향한 (소설가와 시인들 본인들은 제외하고) 의미있는 시도는 없었다. (1978) 43쪽. [본문으로]
  11. 물론 다른 차원의 크로스오버도 있다. 지난 10년간의 학과과정을 둘러싼 논쟁이 그것이다. 몇몇 인류학자들은 문학비평에서의 텍스트 방법론을 적용했다. 오늘날 문학비평가들은 문자문화의 유사민족지학으로 응답한다. 이 과정에서 몇몇 역사가들은 양쪽에서 쥐여짜지는 느낌을 받는다. 대학 행정에서 수업 등록하는 학생 숫자를 면밀히 관찰하는 시대에 이 현상은 하찮은 충돌 같은게 아니다. 몇몇 이들은 과거의 학제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하고 다른 이들은 간학문적 시도를 가성비를 위한 시도로서 모색하는 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본문으로]
  12. 어떤 의미에서 포스트모던 담론에서의 이 두 인문학에 대한 비판은 모더니즘 담론에서 이 두 인문학을 설파하는 것만큼 핵심적이다. [본문으로]
  13. 루이 알튀세르는 간학문성interdisciplinarity를 "모호한 정신주의와 기술관료적 실증주의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모든 전문가들의 '의식'을 조용히 내포한 공통적인 이론적 이념the common theoretical ideology"라고 표현했다 (1990). 97쪽. [본문으로]
  14. 이 내용에 대해서는 Document 4 (1994)에 수록된 "장소특정성에 관한 라운드테이블"Roundtable on Site-Specificy 에 나와 함께 참여했던 르네 그린Renee Green, 미첼 케인Mitchell Kane, 미원 권Miwon Kwon, 존 린델John Lindell, 그리고 헬렌 몰즈워스Helen Molesworth에게 빚지고 있음을 밝힌다. 미원 권은 이러한 지역 동네라는 "장소"가 도심 "공간"에 배치되는 방식이 차이 대 동일성과 같다고 제시한다. 권은 또한 이러한 장소들과 관계맺고 있는 예술가들이 정체성 정치를 장소특정적 실천과 연결하는 방식과 비슷하게 이루어진다고 본다. 여기서 하나의 정통성은 다른 이의 정통성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내세워지는 것이다. [본문으로]
  15. 최근의 사례들을 언급하자면, 스컵쳐 시카고Sculpture Chicago의 공공예술 기획인 "컬쳐 인 액션Culture in Action"에서의 사회봉사가 있다. 여기에 선정된 예술가들은 지역 공동체의 단체들과 협업했다. 타임스퀘어의 미래 재개발을 위해 이미지 개선만을 했을 뿐인 "42번가 거리예술 프로젝트42nd Street Art Project"에서의 경제개발도 있다. 최근 유럽의 여러 도시들 (예를 들어 앤트워프)에서 행해진 기획에서는 장소특정적 작업들이 부분적으로 투어리즘과 정치적 프로모션을 동기로 활용되었다. [본문으로]
  16. 1993년 여름에 프랑스의 르 코르뷔지에 유니테 다비타시옹에 속한 마흔 몇명의 예술가들 및 예술단체들의 장소특정적 작업을 전시한 "프로젝트 유니테Project Unité"를 예로 들어보자. 이 기획에서, 신개념주의 듀오 글렉Glegg과 굿먼Guttman은  디스코텍을 지을 때 쓰려고 유니테 거주민들에게 최애 카셋을 기증하도록 요청했다. 이 테이프들은 나중에 편집되고 모아지고 아파트 동과 층에 따라 전시되었다. 여기서 조장된 자기재현self-representation에서 드러나는 사회학적 하대sociological condescension는 비범하다고 할 수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