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번역

오쿠이 엔위저, "아카이브 열병: 역사와 기념비 사이의 사진 Archive Fever: Photography Between History and the Monument" (2008)

Archive Fever: Uses of the Document in Contemporary Art (2008) 전시와 연계된 도록 출판물에 수록된 큐레이터 오퀴 엔위저의 글을 급하게 발번역한 것입니다.

아카이브란 첫번째로 무엇이 말해질 수 있는가에 관한 원칙, 즉 발언statement들을 특별한 사건으로서 관장하는 체계이다. 하지만 아카이브라는 것은 말해진 이 모든 것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덩어리로 축적되지 않도록 결정하는 것이기도 하고, 우연하게 발생한 외부의 사고로 인해 사라지지 않게 결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들은 뚜렷하게 별개의 개체로 그룹지어져서 복수의 관계들에 의해 구성되고, 이러한 구분들은 특정한 규칙성에 의해 유지되거나 흐려진다. 아카이브란 이것들이 같은 속도로 사라지지 않도록 결정하고, 이들이 마치 별과도 같이, 우리가 가깝다고 느끼도록 멀리서 밝게 빛나게 한다. 이에 반해 우리에게 실제로 가까이 있는 것들은 이미 창백해져 간다.

-------------미셸 푸코 [각주:1]

 

푸코의 사유에 담긴 아카이브라는 개념이 가진 복잡한 요소들을 다 담아낼 수 있는 단 하나의 정의는 없다. 표준적인 관점에서 아카이브란 서랍과 파일 캐비넷, 그리고 오래된 문서들이 가득한 어둡고 쿰쿰한 장소, 역사적 유물들을 위한 비활성된 저장고와 같다. 이는 활성화되고 규제의 기능을 하는 담론체계로서의 아카이브에 대비된다. 최근 아주 많은 동시대 예술가들의 관심을 얻은 것은 이 후자의 아카이브 개념이다. 아카이브 열병은 예술가들이 아카이브적 구조와 아카이브 자료들을 전유하고, 해석하고, 재구성하고, 그리고 탐구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살펴본다. 이러한 예술적 실천들의 주요한 매체vehicle (사진과 영상)는 널리 쓰이는 아카이브 자료 형식이기도 하다. 이 전시는 다양한 양식의 예술적 프로덕션을 다루며, 여기서 나타나는 사진과 영상 자료의 흐름은 단순히 대중매체 산업 발달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 흔적으로서 남은 사진의 정확성exactitude에 맞서, 새로운 구도적pictorial 그리고 역사학적 경험들을 여는 작업에 기반한 비평적인 교류에 뛰어들고자 한다.

 

사진과 아카이브

 

사진매체가 아카이브에 대해 갖는 관계성을 관장하는 미학적 그리고 역사적인 사안들은 무엇인가? 처음부터 사진 기록은 "특별한 사건으로서의 발언statement"으로서 구현됐다. 모든 사진적 이미지는 이러한 특별성uniqueness의 원칙을 부여받는다. 이 원칙속에서 사진이라는 개념의 핵심이 깃들어있다. 여기서 사진의 핵심은 아카이브 기록, 그리고 구현된 실재 혹은 자연 속에 존재하는 기정 사실putative fact과 맞먹는 것이다. 기계적으로 뭔가가 새겨지는 것이 가능한 점, 그리고 사진으로서 피사체의 존재가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 되도록 하는 직접적인 참조성의 질서야말로 사진과 영상의 기반을 형성한다. 무언가를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고, 뚜렷하게 구분되는 시간, 사건, 이미지, 그리고 문서의 관계들을 정립할 수 있다는 점은 엄격한 의미에서의 아카이브 생산의 조건들을 이러한 기계적 매체의 언어에 따라 규정하게 되었고, 이 기계적 매체들은 각자 이미지로서의 세계에 대한 새로운 현상학적 관점을 제공했다. 사진은 증거 기록물이자 동시에 아카이브 기록이다. 카메라 자체가 말 그대로 아카이브 기계이기 때문에, 모든 사진과 영상은 선험적으로 아카이브적 객체archival object이다. 이것이 왜 사진과 영상이 주로 아카이브 기록, 문서, 그리고 기록된 사실의 존재의 시각적 증언pictorial testimonies, 즉 보여지는 것의 과잉an excess of the seen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이다. 무한히 재생산될 수 있고 복사될 수 있는 이미지는 정지영상still image이건 동영상moving image이건, 음화 혹은 디지털 카메라로부터 파생되고, 기계적 재생산 혹은 디지털 유통 혹은 다중영사의 영역에서 진짜 아카이브적인 이미지가 된다. 따라서 시간이 지나면 사진적 이미지는 복잡한 형태의 흥미를 유발하는 대상이 되고 수많은 제도적, 산업적, 그리고 문화적 목적에 따라 전유된다. 여기에는 정부의 프로파간다, 광고, 패션, 엔터테인먼트, 개인적인 기념, 예술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용도로 인해 사진과 영상은 아카이브적 모더니티의 핵심적인 도구가 된다.

 

  발터 벤야민이 1930년대의 예술에 관한 에세이[각주:2]를 출간했을 때, 사진은 이미 사용된 지 1세기가 되었었다. 벤야민의 성찰은 아우라의 문제보다 더 많은 것을 다루었다. 벤야민은 손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로부터 기계적으로 생산되고 무한히 재생산될 수 있는 이미지로의 전환이 완전히 새로운 그림적 유통pictorial distribution의 양식으로 구현되는 것에 관심을 두었고, 이러한 전환은 그저 지시적인 것만이 아니라 시간적인 것이었다. 카메라로 인해 조성되는 손과 눈을 같이 조정하는 능력hand-eye coordination은 현실에 색다른 모습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에, 이미지 생산으로부터 손이 자유로워진 것은 인지능력과 행동에 관한 논의에 깊은 영향력을 끼쳤다. 이러한 예술적 그리고 그림적인 변수들의 변화는 모더니티의 구체적인 한 현상이 되었다. 기계적 재생산의 발달은 사진 기록에 관한 모든 관계들, 즉 생산과 유통, 그리고 보다 더 최근의 디지털 아카이브화와 기록inscription의 과정들의 체계를 지배하는 아카이브적 형성을 촉발했다. 19세기 말 코닥의 상업사진 발명 이래로, 네게티브에서 파생된 아날로그 사진은 원본에 충실한 복제품들을 끊임없이 생산했을 뿐 아니라 (이를 통해 손으로 만들어진 이미지의 그림적 아우라가 의존하던 원본성에 대한 근본적 주장에 대해 문제제기가 이루어진다), 온 세계의 사용자들로 하여금 그림적 생산과 축적의 속도를 열풍적으로 올리게 하였다. 이 아카이브적 광기, 자연을 그림적 사실 (그리고 뒤이어 아카이브적 체계)로 옮겨내려는 "불타는 욕망"은 루이 다게르가 그의 사업 파트너 니세포르 닙스에게 쓴 편지에 충분히 잘 표현되어 있다. "나는 자연에 대한 자네의 실험을 보려는 욕망으로 불타고 있다네."[각주:3] 곧 다른 많은 이들의 욕망이 이를 뒤따랐고, 자연의 범주 밖으로도 나아갔다. 그림 속에서 조성된 세계를 사유하는 양식의 전체를 아우르게 된 것이다. 사진을 만들어내려는 욕망, 사건을 기록하려는 욕망, 발언statement을 특별한 사건으로 만들어내려는 욕망은 아카이브를 생산하려는 열망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아카이브의 특징은 W.J.T. 미첼의 "이미지의 잉여가치" 개념에서 포착되어 있다[각주:4]. 이 개념에 따르면, 사진 또한 상품의 세계에 들어간다. 사진 아카이브에서의 흐름은 이미지가 생산할 수 있는 잉여 가치를 상정하는 것에 기반한다.

 

  스냅샷을 비롯한 사적 사진물 생산의 급증은 이러한 과정을 명료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가장 단순하고 감정적인 형태를 한) 모습의 이미지 생산 뒤에는, 사진을 만들어 내는 것은 끊임없이 기억 보조장치를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 기억장치는 시간여행을 위한 거대한 기계이며, 목적론적인 것 만큼이나 기술적이다. 스탠리 카벨Stanley Cavell은 이러한 현상을 오토마티즘과 연결지어[각주:5] 우리가 과거로 돌아가 대조표와 사실관계의 도표를 모으고 이를 통해 이들만의 공적 그리고 사적인 의미를 창출하는 매커니즘으로서 설명한다. 인생의 많은 전환점들의 장면(생일, 휴일, 그리고 온갖 종류의 사건들)을 기록하는 스냅샷 사진이야말로 이미지 생산의 사적인 동기의 가장 흔한 요소를 대표할 것이다. 스냅샨 사진은 아카이브적인 것을 향한 불타는 열망을 기록할 뿐만 아니라, 강력한 민족지학적 의미 또한 장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진적 이미지는 한 사회의 구성원들과 제도가 그 사회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성찰하는 방식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인류학적 공간과도 유사성을 띄게 된다. 가족 앨범에서 시작헤 경찰 문서철을 거쳐 구글, 야후, 페이스북, 마이스페이, 유투브, 이동전화, 디지털 카메라, 하드드라이브, 그리고 선별된 파일공유 프로그램들에 저장된 디지털 파일들에 이르기까지, 광활하고 형체 없는 이미지의 제국이 축적되었다. 어떤 형태의 표준적 통일성을 세워서 이들을 정리하고 이들로부터 의미를 창출해 내는 작업은 오늘날 불가능하다. 동시에, 일상의 사용자들이 아카이브적 컨텐츠를 규제되지 않는 이미지 공유의 장으로 배포함으로써, 우리는 프로페셔널과 아마추어, 그리고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사이의 장벽이 허물어지는 것을 목격했다.[각주:6] 이러한 일상적인 형태에서 사진은 정체성, 기억, 그리고 역사의 주체적 유사체가 되어, 과거와 현재, 가상과 실재를 연결시키고, 따라서 사진적 기록에 인류학적 유물이 가진 아우라와 사회적 도구가 가진 권위를 부여한다.

 

  스냅샷의 영역 너머에는 또다른 제국--좀 더 구체적으로는 제국령이라 불러야 할--이 있다. 이 제국은 보다 규제적이고 관료주의적이며 제도적인 질서와 연결되어 있으며 이러한 질서 속에서 신체와 정체성들은 감독되고 컨트롤된다. 19세기에 이 질서의 억압적인 기능으로 인해 오구스트 꽁트의 철학적 실증주의, 권력의 해석학, 그리고 다양한 출처에서 온 지식을 영토화하고 통일하는 체계가 합쳐지고, 이 체계에 과학적 신뢰도를 부여했다. 이 체계의 통일성이 인위적이었음에도 말이다. 실증주의는 많은 유사과학적 사진 생산의 도래를 촉발시켰고, 이 중에는 알폰스 베르시옹Alphonse Bertillon의 빠리 경찰 아카이브가 있다. 여기서 베르시옹은 [사진의 피사체에 대한] 규격화된 실험과 측량을 통한 "범죄자 타입"을 제시하였다. 기념비적인 저서 "신체와 아카이브The Body and the Archive"[각주:7]에서 저자 알란 세쿨라는 베르시옹의 작업과 영국 통계학자이자 우생학의 선구자인 프란시스 갈튼Francis Galton에 대해 사유한다. 이 둘 모두 사진이라는 매체에서 사회적 통제의 도구로서의 기능을 보았고 의심스러운 과학적 원칙에 의거한 구분법을 발견해냈다. 세쿨라에 의하면 그들의 기획은 "사회적 일탈 행위를 규정하고 규제하려는 실증주의적 시도의 두가지 방법론적 기둥을 구성한다."[각주:8] 베르시옹에게 있어 범죄자, 그리고 갈튼에게 있어 열등한 인종은 사진 아카이브의 사후세계에 존재하며, 그 아카이브 속에서 이러한 이들의 자리가 확보될 때야말로, 그들을 [사회로부터] 떼어낼 때이며, 그들의 차이점, 즉 일반적 사회로부터 그들이 아카이브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밝히고 주장할 순간이다.

 

형식으로서의 아카이브

 

사진 아카이브는 예술의 맥락에서 아카이브 생산이 발달되었던 수많은 방식 중 하나이다. 마르셀 뒤샹이 자신의 작업군 전체의 미니어처 사본으로 만들어 구성한 디럭스 에디션은 La boîte-en-valise (1935-41)[각주:9]라는 이름의 움직이는 미술관(mobile museum)이라는 아카이브 시스템으로서 코드화되고 정리되었었다. 이는 물론 아카이브로서의 예술 작품이라는 것을 체계적으로 다루었던 최초의 시도는 아니지만, 이러한 것이 가장 심도있게 다뤄진 예시 중 하나로 남아있다. 이러한 원시 미술관(ur-museum)을 뒤샹이 수트케이스에 담아다니기 시작한 이래, 예술계에서는 아카이브로서의 미술관이라는 것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각주:10], 아카이브로서의 미술관이라는 것은 역사적 유물, 이미지, 그리고 이들 사이의 관계성을 관장하는 다양한 분류법에서 비롯한 거대한 양의 생산물에 대한 사유의 장으로서 이해되었다. 자신의 작업 원본에 충실한, 마치 사진 패시밀리같은 사본들을 만들어내고, 동시에 이들이 자신의 작업군 전체이자 아카이브로서 정렬되고 수용되도록 하기 위한 조건들을 형성함으로써, 뒤샹은 자신의 작업을 (푸코의 매우 적절한 표현을 인용하자면[각주:11]) "전통과 잊혀짐" 사이에 위치시키는 딜레마와 씨름하는 것처럼 보였다. La boîte-en-valise는 제도권으로서의 미술관과 유물로서의 예술작품에 대한 능청스러운 비판일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형식과 개념에 관한 것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발언들(statements)을 생존하게 하고 정기적인 변형이 가해지도록 하는 실천의 규칙들을 폭로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발언들의 형성과 변화의 일반적인 체계인 것이다."[각주:12] 몇십년 뒤, 이러한 체계는 마르셀 브루드테이어스Marcel BroodthaersMusée d'Art Moderne, Départment des Aigles (1968)에서 증폭되었다.[각주:13] 뒤샹의 가방을 위한 틀이 단일하고 일관적인 예술적 정체성의 신화를 나타낸다면, 브루드테이어의 끊임없이 나열된 독수리 사진과 관련된 피사체 사진의 복사본들은 균질한 통일성의 논리를 따르지 않는, 비위계적인 이질성의 장에 위치한 아카이브를 구성한다.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자신이 명명한 "포스트 매체의 조건post-medium condition"이 브루드테이어스의 작업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한다.[각주:14]

마르셀 브루드테이어스, Musée d'Art Moderne, Départment des Aigles (1968)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아틀라스Atlas는 사진 패널과 타블로로 이루어진 현재진행중인 콜렉션(open-ended compendium)이며, 이는 작가가 사진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 사이의 관계에 대해 성찰하기 위해 시작한 프로젝트이다. 이에 대해 분석하며 벤저민 부클로Benjamin Buchloh는 집산화collectivization의 규칙들(미술관과 아카이브에 있어 중요한 기능)이 사진 매체의 태동기부터, 사진 방법론에 핵심적인 부분이었다고 암묵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부클로에 의하면, 아틀라스와 같은 프로젝트들은 "작업의 형식적인 구성을 이루는 규범들을 사진의 내재적인 구조적 질서(아카이브로서의 조건)에서 가져오며, 이것은 무한해 보이는 다중성, 연속화의 가능성, 그리고 포괄적인 총체성과 맞아 떨어진다..."[각주:15] 하지만 부클로는 이러한 실천의 역사적인 일관성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지고, 이러한 실천들을 "아방가르드 미술사의 용어법과 분류법 안에서는 범주화가 불가능하다"고 규정하며[각주:16], "역사적 과정에 대한 교육적이고 기억보조적인 추적, 분류법, 연대기, 그리고 시간적 연속성들의 형성...은 항상 아방가르드의 자기인식, 즉 즉각적인 존재감, 충격, 그리고 지각적 파열을 일으키는 아방가르드라는 것과 갈등관계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결론내린다.[각주:17] 부클로는 리히터의 아틀라스가 이러한 아카이브적 난관을 구성하는 조건들을 계승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동시에, 사진 매체의 보다 더 특화된 역사에서의 묘사적 조건과 장르는 (이 모두 리히터의 작업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활용되고 있다) 이러한 이미지의 축적을 분류하기에는 똑같이 부적합해 보인다. 『아틀라스』의 첫인상으로부터 느낄 법할 것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진적 콜렉션의 담론적 질서는 아마추어의 사적 앨범이나 다큐멘터리 사진의 축적적인 프로젝트의 그것으로서 규정될 수 없다.[각주:18]

그 어떤 감각으로든 아카이브에 제한적인 질서를 부여하고 싶어하는 한, 이러한 질서를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은 종종 체계와 방법론의 괴리를 관장하려는 고려에 의해 대체된다. 린 쿡Lynne Cooke에 의하면, 아틀라스Atlas의 논리는 통일체로서의 작업의 존재에 하나의 유일한 합리성을 부여하는 일의 불가능성에 의해 방해받는다. "아틀라스Atlas는 아카이브에서 드러나는 분류법적 질서에 대한 희망과 이러한 희망의 완전한 파멸 사이에서 둥둥 떠다닌다."[각주:19]

  위의 구절을 통해 우리는 아카이브가 통제하기 어렵고 통시적diachronic인 사진 매체의 상태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의미에서) 보상compensation과 같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럼으로 인해, 아카이브는 사진 매체의 변변찮은 확산성ungainly dispersion과 그림적 다성성pictorial multiplicity의 재현 형식으로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지식과 정보에 대한 분류법, 범주화, 그리고 주석작업의 재현으로서의 아카이브는 대표적인 역사적 형태, 푸코가 고고학적 탐구의 장으로서 규정하고 역사적으로 선험적인 것이라 규정했던 것, 시공간을 가로지르는 여정이라고 했던 것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탐구의 방법론적 장치는 "판단을 위한 타당성의 조건을 세우지 않지만, 발언을 위한 현실의 조건(a condition of reality for statements)"을 설정한다.[각주:20] 그 어떤 발언이든, 얼마나 많이 축적되고 도표화되고 색인화되고 정렬된 형태의 재현물이 등장하든 간에, 푸코의 다음과 같은 관찰은 틀리지 않는다:

사회, 문화, 혹은 문명, 또는 한 시대 전체의 아카이브라는 것은 완전히 묘사될 수 없다. 다른 한편, 우리의 아카이브를 우리가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규칙들 속에서 우리는 말하기 때문이고, 이는 아카이브라는 것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그리고 아카이브 그 자신, 즉 우리 담론의 대상)이 주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아카이브의 등장 양상, 존재와 공존의 형식, 축적, 역사성, 그리고 사라짐의 체계도 포함된다. 아카이브라는 것은 총체적으로 묘사될 수 없고, 아카이브가 존재하는 한 그것은 피할 수 없다. 그것은 파편으로서, 지역으로서, 층위로서 등장한다...[각주:21]

  아카이브에 위치한 발언들의 정당성은 어떠한가? 자크 데리다에게 있어서, 발언들은 "아카이브의 학문"을 통해 정당성을 얻으며, 이 학문이란 것은 "제도화의 이론...을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말인즉슨, 제도화의 이론이란, 자신을 그곳에 새기는 것을 시작하게끔 하는 법, 그리고 그것을 허용하는 권리에 관한 이론이다."[각주:22] 아카이브는 자신의 권위와 사실성, 즉 증거로서의 기능과 해석의 권력--간단히 말해, 아카이브의 현실--을 구조와 기능을 통합하는 설계를 통해 획득한다. 아카이브 구조는 데리다가 정주화domiciliation이라고 부른 것, 즉 제도적 형식이 완료되는 과정을 규정하며, 물리적 개체로서의 아카이브는 구체적인 영역, 즉 데리다가 "그들이 영원히 머무는 장소...보금자리"라고 부른 것 안에서 구현된다.[각주:23] 그는 이러한 존재조건, 즉 정주화의 과정을 가택연금과 비교한다.[각주:24] 아카이브 형식은 "판단의 정당성의 조건"(푸코)을 형성할 수 있는 아카이브의 능력에 있어 핵심적이다. 데리다는 이러한 기능을 "위탁consignation"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아카이브가 "통일화, 식별화, 그리고 범주화"등의 기능을 행할 수 있는 과업을 의미한다.[각주:25] 하지만 위탁 개념은 "이 단어가 일상적인 의미에서 쓰이는 것처럼 거주지를 부여하거나 뭔가를 맡기는 것과 같이 어떤 것을 어떤 장소나 구조에 저장하는 것 (저금, 수탁) 뿐만이 아니라, 기호를 모으는 행위consigning로서"도 이해되어야 한다.[각주:26] 위탁consignation의 행위는 그러므로 "모든 요소들이 이상적인 배열의 통일성을 표현하고 있는 시스템 혹은 동기성 내에서의 단일한 체계를 조율하는 것을 목표료 한다."[각주:27]

 

  뒤샹의 La boîte-en-valise, 브루드테이어스의 Musée d'Art Moderne, Départment des Aigles, 그리고 리히터의 아틀라스Atlas모두 아카이브에 대한 푸코와 데리다의 각각의 분석과 맞아 떨어진다. 뒤샹이 당시 자신의 작업의 사본들을 정렬해 두었던 간편한 가방이나 브루드테이어의 큐레이션의 이질성, 혹은 기억보조로서의 사진에 대한 리히터의 영속적인 코멘터리는 모두 정주화domiciliation와 위탁consignation(작가의 전체 작업군을 가리키는 기호들을 한데 모으는 행위로서)의 논리는 물론, 각기 개별 작업의 발언statement의 현실의 조건, 이들이 전달해야 하는 서사, 예술적 실천의 선험적인 아카이브를 형성하고, 이들로 거듭난다. 이러한 방법론은 오늘날의 예술적 실천에 스며들어 있는, 할 포스터가 "아카이브 충동"[각주:28]이라고 규정한 것을 따른다. 예술가들은 아카이브의 자명성에 대한 주장을 역독reading against the grain을 통해 취조한다. 이러한 취조는 아카이브 기록의 활용이 기반하고 있는 구조적이고 기능적인 규칙들을 노리거나, 역사, 증거, 정보, 그리고 데이터와 같은 개념과의 고고학적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또 다른 아카이브 구조를 낳을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 이러한 구조는 자기만의 고유한 해석학적 범주들을 탄생시킨다.[각주:29]

 

첩보의 실패 / 아카이브의 실망

 

최근에 일어난 중요한 역사적 순간에 대해 상기해보자. 유엔의 조사단에 의해 행해진, 이라크가 대량학살무기(WMD)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에 대한 몇달간의 광적인 탐색은 결국 2003년의 이라크 전쟁으로 이어졌다. 무기체계의 다양한 부분들에 대한 증거를 담고 있는 기록(설계도, 반입증명서, 설계계획도, 현장 지도, 실험실을 담은 사진 등)을 찾기위해 이들은 이라크의 아카이브를 뒤졌다. 이라크 행정부는 조사단에게 기록물, 종이 꾸러미, 그리고 산처럼 쌓인 정보들로 가득한 양을 제공했고, 여기엔 무기체계를 구성하기 위한 최초 시도들과, 추후에 쓰일 무기를 만들기 위해 현재 체계의 기능성을 해체하려는 시도의 정황이 담겨있었다. 그 동안, 미국은 모든 "첩보intelligence"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 권한을 유지하고 싶어했다. "첩보"가 미국의 관점과 일치한다면, 그 첩보는 부시 정권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강화했다. 한스 블릭스가 이끌던 유엔 조사단과 국제 원자에너지기구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의 관료들에게서도 우리는 이러한 딜레마를 목격했다. 이들은 후에 모두 이라크의 허위 정보를 퍼뜨렸다는 혐의를 받았다.[각주:30] 부시 정권이 자신의 선험적으로 반박불가능한 사실(, 대량학살무기의 존재)이라는 "슬램 덩크" 이론을 전개하면서[각주:31], 이 정권은 이라크를 침략하려는 위협에 대한 윤리적 당위성을 강화하려는 (별 소득이 없었던) 시도를 했다.

 

  우리는 이제 미국과 영보의 첩보가 내세웠던 (진실)주장의 허위성을 다 알고 있다.[각주:32] 이라크 침략 정책에 맞추기 위해 계산된 "첩보"의 생산은 역사적 사건의 복기를 위한 장, 그리고 과거를 해독하고 검증하고 인식하기 위한 참고체계와 지식을 구성하는 원료raw material로서 우리가 알고 있던 기관으로서의 아카이브가 갖는 신빙성을 떨어뜨렸다.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증거를 조작하는 것은 현대 첩보활동의 당위imperative를 뒷받침한다. 이 당위란, 정보와 총체적인 지식의 확보 및 통제를 위한 근본적인 충동과 같다. 물론, 제국이라는 개념에서 "첩보"는 보다 우월한 투시력clairvoyance을 활용해 적을 완전히 정복하고 통제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제국의 아카이브의 저자 토마스 리처드Thomas Richards는 이러한 아카이브 충동이 제국주의가 절정에 달했던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에서 기원했다고 본다. 지식 축적과 첩보 열풍fever에 휘말려, 빅토리아 시대의 아카이브 산업에서는, 인식된 세계에 대한 정보가 동기화되고 통일되는 작업 과정이 시작되었다.[각주:33] 왕립 지리학회the Royal Geographical Society, 왕립 사진학회the Royal Photographic Society, 대영박물관, 식민성()the Colonial Office ,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은 근대 이후 가장 방대한 아카이브 설립이 시작된 시기 중 하나였다. 영국은 넓은 영토를 가지고, 강력한 해군과 육군으로 이를 다스리는 제국이었지만, 사실 무엇보다 문서, 정리된 기록, 그리고 이미지 생산체계 위에 설립된 것이었으며, 이 모든 것들의 생산은 또 다른 기록과 이 기록들을 정리하고 이 기록들의 내용을 분포시키는 체계를 이어서 생산했다. 아카이브 동기화의 과정과 통일화는 개별화되고 측량가능하며 검증된 (실증주의적)지식의 형태를 모아진 데이터에 대한 보편적 법칙과 일치시키는 작업을 통해 완성되었다. 리처드가 지적하듯, 이러한 통일화의 목적은 이데올로기적 조작에 의해 일어났다. "인지하지 못한 채, 아카이브의 시선은 탐구inquiry, 측량measure, 그리고 검증examination3중의 영역과 합쳐져, 권력의 다양한 양상에 의해 활용될 데이터를 준비하는데 쓰였다."[각주:34]

 

  이러한 방대한 데이터(사진, 이미지, 지도, 탐사, 첩보, 분류법, 범주화 등)의 축적을 관장하는 것, 데리다가 "아카이브의 학문"이라 부른 것은 바로 제국의 잠망경periscopic eye이다. 제국의 야망과 서구의 시선이 관통할 수 없었던 티벳의 영토가 지도에 그려진 것이 바로 이 시기이다. 히말라야 지역에 대한 믿을만한 지도가 없던 시절, 그리고 티벳으로 영국인 탐사단을 보낼 수 없었던 때, 영국의 인도 탐사단the British India Survey은 왕립 공병대the Royal Engineers Corps의 토마스 G. 몽고메리Thomas G. Montgomerie 소령이 고안한 창의적인 계획을 쓰기로 했다. 그의 계획에 의하면, 측량조사와 작도mapping작업을 인도의 히말라야 지역에서 온 힌두교 식자층 스파이로 이루어진 원주민 탐험대native explorers가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었다.[각주:35] 1865년즈음부터 시작하여, 이 힌두교도들은 티벳을 지나 여행하는 불교도 성지순례자들로 둔갑하고 이 여정동안 자세한 측량과 통계를 작성했다. 피터 홉커크Peter Hopkirk는 이 대담한 아카이브 첩보활동 이야기를 구글 지도Google Maps와 등치시킨다. 그들의 유사점이 정밀도와 정확도pintpoint precision에 기반한 것을 들어 말이다.

 

  몽고메리는 처음에, 스파이들이 정해진 거리를 이동하는 보행속도를 오르막길이든 내리막길이든 평탄한 길이든 상관없이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철저하게 훈련시켰다. 그 다음에 그가 이들에게 가르친 것은 하루동안 이렇게 걸은 걸음의 수를 정확하고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재는 방법이었다. 이를 통해 이들은 엄청난 거리를 놀라울 정도의 정확성을 가지면서 누군가의 의심을 사지 않고 측량할 수 있었다. 그들은 주로 불교도 성지순례자들로 위장해 여행했고, 이들 중 많은 이들이 고대 실크로드의 성지를 방문하는 길에서 서로를 마주쳤다. 보통 불교도는 108개의 염주알로 만들어진 염주를 갖고 다니며 자신의 기도 횟수를 세고, 나무와 금속으로 만들어진 작은 마니차를 돌리면서 걷는다. 몽고메리는 이러한 점을 활용했다. 염주같은 경우, 8개를 빼서 세기 편한 숫자인 100개로 만들었다. 8개는 적은 숫자라 남이 눈치채기 쉽지 않았다. 이걸 들고 다니는 힌두교도는 100걸음마다 염주알 하나를 넘겼으며, 염주 하나당 만 걸음 걸었다.

 

하루동안의 총 걸음거리는 눈을 피해 이루어진 다른 관찰활동의 결과들과 함께 안전하게 몰래 기록되어야만 했다. 여기서 구리로 만들어진 마니차의 매우 중요한 역할이 등장한다. 이 마니차 속에는 원래 들어있어야 할 수기로 작성된 기도문이 아니라 빈 종이 스크롤이 들어가 있었다. 이 스크롤은 일지로서 활용되었고, 마니차의 뚜껑을 열면 금방 꺼낼 수 있었다... 여기에는 나침반의 문제 또한 있었다. 몽고메리의 힌두교도는 여행중에 규칙적으로 방위를 측정해야만 했다. 그래서 몽고메리는 마니차의 뚜껑을 나침반으로 만들었다. 고도를 계산하기 위해 필요했던 온도계는 이들의 지팡이 윗부분에 숨겼다. 육분의 값을 읽기 위해 인위적으로 수평을 맞추는 데 필요한 수은의 경우, 지역 화폐인 조개껍질cowerie shells 안에 숨겼다.[각주:36]

아카이브 생산이 첩보작전의 원칙으로 인해 확장된 사례인 이 치밀한 작전은 미지의 것에 대한 지식을 향한 제국의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을 위해 수행되었다. 그것을 넘어, 이러한 지식은 모아지고, "기밀화되고classified"[각주:37], 통일화되고, 그리고 규제적 통제의 수단으로서 활용되어야만 했다. 이러한 "지식의 패러다임"을 구성하는 것은 "장거리 제국 통치가 갖는 문제점들을 해결하는 것처럼 보였다."[각주:38] 한 세기가 지날 때 쯤에, 티베트에 대한 아카이브의 세세한 자료들이 "국가의 관할권 아래 놓여진...기밀화된" 정보로 탈바꿈했다.[각주:39]

휴대용 마니차

  정보, 데이터, 혹은 지식을 기밀화classifying 하는 것은 오늘날 널리 퍼진, 아카이브의 규제적 성격의 통제를 위한 방법론과 같다. 이러한 정보의 흐름에 대한 통제는 다른 아카이브 조작망과 데이터 생산망을 통해 강화된다. 예컨대 구글 어스Google Earth는 자신의 공간적 모델링의 몇몇 요소는 공개하지만, 다른 것들은 국가 안보라는 명목하에 제한된다. 국가 안보 체제의 일환으로 아카이브 지식의 제국을 형성하려고 했던 수많은 시도의 사례들 중, 티베트의 그것은 단 하나의 예일 뿐이다. 리처드는 루드야드 키플링의 소설 Kim을 인용하는데, 이 책은 권력과 권위를 쫒는 다는 것에 대한 주제에 맞춰 쓰여진 책이다. 리처드는 이 책을 기밀화된 지식과 국가 안보를 일치시키는 작업에 대한 도착의 한 예시로서 제시한다. 19세기 내내, 제국 확장이라는 "위대한 게임" 은 공간적 지배력을 확보하려는 게임이었지만, 동시에 아카이브를 통해 지식의 흐름을 통제할 수 있는 우월한 능력에 치중되어 있는 것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제국의 아카이브 체계는 "권력을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하는 것"으로서 위치지어졌다.[각주:40] 티베트에 대한 아카이브 구축, 이 폐쇄된 사회로부터 빼낸 밀접한 지식은 첩보와 스파이활동과 연결된, 작도(mapmaking)와 지리학의 작업으로서 시작되었다. 여기서부터 지식 사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제국의 아카이브 생산의 가장 중요한 유산이 되었던 것은 바로 지식에 대해 국가가 독점할 수 있고 민감하다고 판단된 아카이브 자료를 대중의 눈으로부터 차단시킬 수 있는 권력의 근본적인 원칙이다.

 

  이것이야말로 유엔의 중재로 미국과 이라크 정부 사이에서 아카이브 정보를 두고 벌어진 싸움을 해석할 수 있는 적절한 맥락이다. 아카이브의 허위 정보라는 스펙터클 속에서 벌어진 또 하나의 에피소드를 상기해보자.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 콜린 파월Colin Powell이 영국 첩보에 의해 얻어지고 미국의 관리들이 손에 넣은 문서야말로 이라크 정권이 니제르로부터 "옐로케이크" 우라늄을 적극적으로 구하려고 했다는 것에 대한 반박불가능한 증거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파월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이 문서는 조작된 것, 즉 첩보요원의 "완전한 환상"이었다는 게 금방 밝혀졌다. 아카이브와 대항아카이브에 관한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상기하게 되는 것은 아카이브 생산과 근대 이후의 국가 형태가 아주 깊게 얽혀있다는 점이다. 첩보(좀 더 정확하게는 데이터)를 모으고 해석하는 것은 아카이브 형성의 집착적인 원칙에 지나지 않는다.

 

매체로서의 아카이브

 

이 전시를 구성하는 작업들은 동시대 예술에서 아카이브 생산의 역사적 유산을 마주하고 탐구하는, 가장 어려운 해석적, 분석적, 그리고 면밀한 사례들을 대표한다. 이 전시의 예술가들은 물론 축적, 분류, 해석, 혹은 이미지 묘사를 다루기는 하지만, 단순하게 이러한 것들에만 천작해 있지는 않다. 이들은 푸코가 "원래의 선도자 역할을 했던 것들을 역추적 하는 것, 즉 새로운 형태의 이성rationality과 이 이성의 다양한 효과들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설명했던 과정과 같은 동기를 가지고도 작업한다.[각주:41] 여기서 우리가 첫번째로 목격하게 되는 것은 아카이브적인 유산이 어떻게 미적 규칙들로 거듭났는지, 그리고 어떻게 예술의 모델이 역사화의 구성물로 바뀌었는지, 그리고 그럼으로 인해 이 작업들과 이 작업들이 우리 눈 앞에서 보여지는 방식을 통해 우리가 이들의 직접적인 효과들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카이브의 방법들과 예술적 형식들의 다양성과 범위, 그리고 예술가들이 아카이브를 활용할 때 쓰는 기억보조적 전략들을 뒷받침하는 매개적인 구조들, 그리고 각기 작가들이 다루는 개념적, 큐레이팅적, 그리고 시간적 원칙들은 동시대 예술계에서 형식 그리고 매체로서의 아카이브가 갖는 끈질김을 반증한다. 이들 작업에서, 우리는 아카이브와 기억, 아카이브와 공공에게 공개된 정보, 아카이브와 트라우마, 아카이브와 민족지학, 아카이브와 정체성, 그리고 아카이브와 시간 사이의 관계들과 마주하게 된다.

 

  앞서 나열한 주제들은 이 전시에서 풀어나가고자 하는 것들 중 일부이다. 아카이브 열병은 단순히 관람객을 위해 아카이브 형식 혹은 매체의 시각적 효과를 전시나열하려고 하지 않는다. 여기서 제시되고 있는 사례 중 일부에 내재된 아카이브 진실에 대한 비판의 명석함을 평가하는 것에 천착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 전시의 목적은 아카이브의 한 이론을 생산해내려는 게 아니라 아카이브 기록, 정보 축적, 데이터 위주의 시각분석, 대서사master narratives의 모순들, 대항아카이브 그리고 대항서사 창조, 사회적 상상을 증언, 목격 등이 어떤 방식으로 동시대 작가들의 실천에 영향을 끼치고 녹아들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데에 있다.

 

  "아카이브 충동"은 사진의 발명 이래 현대예술의 동력이 되어 왔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주장했듯, 아카이브의 원칙은 대중매체를 통한 사진의 확산의 규제적 질서에서 기원했다. 이러한 확산은 이데올로기적인 시사점이 있는데, 그 중 특출난 것이 바로 프로파간다 형식이다. 대중매체는 대중으로 하여금 사진을 조작하는 것이 가능토록 했고, 다큐멘터리 장치의 지위를 규정하게 되었다. 아카이브 충동에서 할 포스터는 사진 매체의 수많은 이미지들, 특히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의 독일과 러시아 내 초기 아방가르드 포맷, 예컨데 로드쳉코Rodchenko의 포토파일과 하트필드Heartfield의 사진몽타쥬와 같은 것들을 체계화하는 구조적 양상으로서의 아카이브화의 긴 역사에 대해 설명한다. 리히터의 세대로 넘어가면서, 포스터는 초기 모더니즘에서 활용된 사진 인덱스photographic index, 그리고 이러한 활용으로 인해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기록과 주석, 비판과 분석, 권력과 복종 사이에 형성된 아카이브의 속성들이 전후 시대에 특히 더 다양하게 활성화 되어 있었고, 특히 전유된 이미지와 연속화된 포맷(예를 들어 인디펜던트 그룹the Independent Group의 핀보드 미학이나 로버트 라우쉔버그Robert Raucschenberg에서 시작해 리처드 프린스Richard Prince를 아우르는 재매개화된 재현물들, 그리고 개념예술의 정보적 구조들, 제도권 비판, 페미니즘 예술 등)이 일반화되어 가면서 그러했다"고 주장한다.[각주:42]

 

  이렇게 작업의 원칙을 세우는 데 전유된 이미지를 활용하고 사진 기록을 이용하는 다양한 양상들은 아카이브 사진이라는 개념적 체계를 초래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 체계의 기록물들을 통해 우리들 중 많은 이들이 예술 행사와 행위의 아카이브 재생산물에 의존하는 동시대 예술의 다양한 행위와 퍼포먼스, 즉 작업 그 자체 뿐만이 아니라 카메라를 위해 연출된 작업의 세계를 알게 되었다.[각주:43] 행사 혹은 퍼포먼스의 사진 혹은 영상 기록 없이는, 이들의 결과가 예술 작업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현실의 조건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나 멘디에타Ana Mendieta, 해미쉬 풀턴Hamish Fulton, 리처드 롱Richard Long, 가브리엘 오로즈코Gabriel Orozco의 작업들과 같은 듀레이셔널durational 작업들의 각인 활동activities of inscription은 사진 재현의 매체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로버트 스미슨Robert Smithson의 대표작업 등에서 볼 수 있는 물리적 작업과 이 작업의 파생물들이 두 개의 분리된 체계로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지나간 사건과 그 사건의 기록 사이의 관계, 즉 행위와 그 행위의 사진아카이브적 흔적 사이의 관계는 단순히 이미 존재하는 대상이나 사건을 참조하는 일이 아니다. 사진 기록은 대상 혹은 사건의 단순한 기록물이 아니라, 대체제이다. "역사에 있어 기록이란...더이상 사람이 행하거나 말했던 것을 재구성하기 위한, 일어난 사건의 흔적만이 남겨진 비활성화된 재료가 아니다. 역사는 이제 기록물 그 자체 안에서 통일체, 총체, 연속, 그리고 관계들을 규정하려고 하고 있다."[각주:44]

 

기록에서 기념비로: 시간에 대한 고찰로서의 아카이브[각주:45]

 

기계적 재생산 시대에서 동시대 예술의 포맷이 시각적 정보의 긴급성을 다루는 이러한 다양한 아카이브의 영역을 열거하는 것이 아카이브 열병의 참조점 중 하나이지만, 이 전시는 그것보다도 더 많은 것을 다룬다. 여기서 다루는 주제는 예술가가 어떻게 아카이브 논리를 활용하는가라기 보다 예술가가 아카이브적인 것이 샘플링, 공유, 그리고 사용자와 수용자 간 무한하게 다양한 형식으로 재조합되는 시각 데이터의 문화의 일부로서 모색되는 대중문화 혹은 대중매체의 이미지들 혹은 도구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더 가깝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예술가들이 아카이브에 관한 새로운 역사적인 해석뿐만이 아니라 분석적인 해석을 이끌어내고 생성해낼 수 있는 도상적, 분류학적, 지시적indexical, 유형론적typological, 그리고 고고학적인 수단이다. 푸코는 한 구절에서 이러한 아카이브화의 유형들의 기저에 자리하고 있는 "불타는 욕망"을 포착한다. 이러한 아카이브화에서 예술가는 과거의 기념비들을 "'기억하고', 이들을 기록으로 변화시키며, 주로 언어화되지 않거나 말하는 것과 다른 것을 오로지 침묵을 통해 말하는 흔적들에게 발언권을 주는 일에 착수한다."[각주:46]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이 남는데, 이는 시간성과 이미지 (혹은 한 대상과 그것의 과거)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푸코에 의하면 이러한 관계는 도처에 널린 것으로, 그는 "오늘날의 시대에, 역사란 기록을 기념비로documents into monuments 바꾸는 것"이라고까지 주장한다.[각주:47]

 

  크레이기 호스필드Craigie Horsefield의 사진생산은 이러한 시간과 이미지, 기록과 기념비의 조각들에 자리하고 있다. 1970년대 후반, 호스필드는 사진과 시간성 사이를 관장하는 관계성을 주제로 한 가장 지속적이고 독창적인 예술적 탐구를 개시했다. 호스필드는 이때 대형 카메라를 가지고 독립자치노동조합 '연대'가 발족하지 않았던 시기의 폴란드, 특히 산업이 쇠퇘하고 노동환경이 불안정했던 공업도시 크라쿠프를 여행했다. 여행중에 그는 기계, 버려진 거리, 그리고 초상화로 이루어진, 때로는 영웅적 요소가 결여되도록 연출된, 그리고 주로 무거운 흑백 사진들을 찍었다. 대형 포맷으로 인화되어, 날카롭지만 차가운 톤의 흰색과 벨벳 느낌의 검정색 사이의 그라데이션이 돋보이는 이 이미지들은 피사체의 있는 그대로의 사실성을 강조한다. 이 피사체가 침울한 느낌의 빛을 받고 있는 거리의 모퉁이이건, 엄숙하게 비어있는 공장 바닥이건, 젊은 여성과 넘성, 노동자들과 연인들이건 말이다. 호스필드는 한 시대가 느리게 변화하고 있는 것, 그리고 곧 변화의 힘에 곧 휘말려 갈 사람들에 대한 증언자처럼 작업했다. Magda Mierwa and Leszek Mierwa--ul. Nawojki, Krakow, July 1984 (1990)은 수염난 남자와 여자 커플의 섬뜩한 이중 초상화로, 이들은 촬영하고 있는 카메라를 너무 강렬하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데, 이는 마치 이들이 지나가는 시대의 표본이 아니라 목격자처럼 보이게 한다. 조명은 배경이 피사체 뒤로 문자 그대로 사그라드는 것처럼 보이게 비춰져서, 피사체들은 잉크처럼 까만색으로 둘러싸여져 있다. 이 이미지는 이상한 침묵을 생성하는데, 마치 남자와 여자의 감각적인 멜랑콜리를 건드리는 것만 같다. 완고하고 고집스러운 표정과 함께, 남자와 여자는 우리들 앞에 저주받은 모습으로 서 있다.

크레이기 호스필드, Magda Mierwa and Leszek Mierwa--ul. Nawojki, Krakow, July 1984  (1990)

  E. Horsfield. Well Street, East London. August 1987 (1995)도 호스필드의 주의깊고 주석적이며 사진의 명시적인 활용을 이미지를 누르는 시간의 무게로서 사용하는 그의 작업의 대표적 사례이다. 사진 초상화의 원칙은 여기서 신체의 묘사가 되고, 호스필드가 이미지생산을 접근하는 전통적 방식을 규정한다. 그의 작업방식의 두번째 요소는 이를 더 밀고 나간다. 여기서는 이미지의 생산과 몇년 뒤 이미지의 인식 사이에 존재하는 미세한 시간차time lag가 그려진다. 기대어 누워 있는 여성 나체의 흑백 인화본 속에서, 주의의 풍경이 그림자가 지워지고 살짝 고개를 돌린 얼굴과 선명한 톤적인 대비를 이룬다. 호스필드의 많은 사진들이 그렇듯, 캡션으로 정확한 제작 시기를 알수 있고 작업으로서의 완성 연도를 알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이미지를 고려할 때 아카이브 시간이 갖는 중요성에 관객의 집중을 돌린다. 여기서 제작 시기는 대형 인화지 옆에서 그림자 아카이브처럼 작용한다.[각주:48]

 

  호스필드는 의식적으로 아카이브의 시간적 지연성temporal delay을 다루며, 시간의 한 단면과 그것의 느린 방대함을 그려낸다. 장기지속longue durée과는 조금 다를지라도, 사진 촬영과 인화 사이의 시간차는 자주 길어질 때가 있다. 어떤 때는 이미지가 촬영되고 난 뒤 몇년이 흘렀을 때가 있는데, 이것은 캡션을 통해 알 수 있다. 호스필드는 문자 그대로 시간의 아카이브로서의 이미지가 갖는 명시적인 요소를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관객으로부터 요구한다. 마치 사진의 노출과정이 몇년에 걸쳐 이뤄진 것처럼 말이다. 그의 작업은 스탠 더글라스Stan DouglasOverture와 같이 이번 전시에서 근본적으로 시간의 고고학으로서의 사진 기술이 가진 아카이브적 잠재력을 포착하는 두 가지 사례 중 하나로서 작용한다. 호스필드의 사진들은 유일하고 사본이 없고 반복될 수 없으며, 시간성 사이의 단절 속에서, 아카이브의 시간과 선형적 시간 사이에서 작동한다. 이 작업들은 시간의 특성 그 자체와 시간이 어떻게 기억과 경험에 작용하고, 이를 모두 아우르고 느리게 하는지에 대한 능동적인 고찰이다. 이미지가 기록된 순간과 이미지가 인화된 순간 사이의 괴리는 아카이브의 두 가지 사례를 생산해낸다. 첫째로, 이미지의 아카이브적 시간, 그리고 두번째로 사본 이미지의 아카이브적 요소이다. 이러한 차이는 디지털 생산의 즉각적인 성질과 촉각적이고 물리적materialist, 필름이라는 사진 매체의 유비적 조건에서 드러나는데, 호스필드의 작업 방식에서 이러한 차이를 식별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동시에 그의 작업양상에 의하면, 새로운 기술은 우리로 하여금 그가 뛰어난 방식으로 이룰 수 있는것을 따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일종의 구식 선 디지털predigital 사진, 즉 즉각적이지 않은 재생산은 이미지로 하여금 작가의 의식 속에서 교질화하고 한참 후에나 떠오른다.[각주:49]

 

  스탠 더글라스의 Overture (1986)는 비슷하게 아카이브와 시간의 관계, 그리고 서사로서, 동영상으로서 움직이는 시간의 관계에 천착해 있다. Overture는 루프로 돌아가는 16미리 필름이며, 캐나다 록키산맥에 있는 에디슨 사의 사진부서에서 촬영한 두 개의 푸티지들을 이어붙인 것이다. 하나는 키킹 호스 협곡Kicking Horse Canyon1899년에 촬영한 것,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브리티시 콜럼비아 주에 있는 화이트 패스White Pass1901년에 촬영한 것이다. 경험과 의식을 구성하는 시간성이라는 주제를 담구하기 위해, 더글라스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불면증적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의 구절 몇개를 낭독한 오디오 트랙을 활용한다.[각주:50] 프루스트의 소설이 시간과 시간의 사람에 관한 것이며 에디슨 사의 영상과 동시대에 존재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더글라스는 조심스럽게 텍스트와 영상을 동기화시키며, 이를 통해 역사와 정체성, 자연과 문화nature and culture, 실증주의와 낭만주의에 관한 문제들에 영향을 주는 시간의 논리에 대해 고찰한다.

스탠 더글라스, Overture (1986)

  선형적 시간 속에서의 지각적 단절을 중심으로 다루는 호스필드의 사진 작업과는 대비되게도, 더글라스의 작업은 순환적 시간성을 강조한다. 루프 장치를 활용함으로써, 필름의 서사는 마치 빈틈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서로 다른 필름이 이어붙여진 세 군데의 접합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프루스트의 책에서 따온 구절은 여섯 개로 나눠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번의 회전rotations을 통해 루프 장치는 영상이 시간과 이미지의 끊임없는 회전revolution으로 경험되도록 하며, 시간과 이미지에서의 단절을 이어 붙이고 영상의 공간을 폐쇄회로로 변화시킨다.[각주:51] 스콧 왓슨은 이러한 무한회전이 단순히 시간에 대한 기술적 재현이 아니라 (이는 더글라스가 다른 작업에서 탐구한 바 있다) 루프 장치가 바로 "반복을 통해 전개되는 기계적 시간mechanical time, 그리고 기억을 통해 인식되는 인간의 시간" 사이의 접점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하는 수단으로서 작용된다고 주장한다.[각주:52] 이러한 기계적인 시간과 기억보조적 시간 사이의 조심스러운 연동은 영상이 자의식적으로 작동하는 과정이 처음 등장할 때 시작된다. 이 과정에서, 경관을 훝는 카메라의 관점은 카메라가 타고 있는 기차가 터널 안으로 사라질 때 빈 화면을 비추며, 터널에서 빠져나오는 타이밍엔 전혀 다른 푸티지가 연속성을 유지하며 등장하도록 편집되어 있다. 이러한 연속성을 통해 첫 시퀀스의 장면들은 루프의 순환성을 잡아매는 역할을 하고, 비선형적 시간성을 제시한다. 선형성의 단절은 더글라스가 영상매체를 서사적 구성으로부터 끊어내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더글라스는 이 대신 "시간의 깊이와 반복의 경험에서 관객이 느낄 수 있는 리듬적이고 최면적인 효과"를 보여준다.[각주:53]

제프 게이스, Day and Night and Day and...(2002)

  제프 게이스Jeg Geys의 작업 Day and Night and Day and...(2002)은 아카이브가 현재와 과거 사이의 접점, 즉 시간을 구성하는 개별 층위의 제한 없는 전개를 촉발하는 이러한 시간적 범주에 속한다. 게이스의 작업은 시공간chronotope, 즉 시간과 공간의 조율로서의 아카이브와의 상호작용을 촉발시킨다. 이 작업은 시간과 아카이브에 관한 사적이면서 문화적인 고찰이다. 1950년대부터 2002년까지, 40년도 넘는 시간에 걸쳐 찍은 수만장의 사진들 중에서 선별되어 구성된 36시간짜리 영상은 구조적으로 지나간 시간에서부터 현재로의 이미지의 흐름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 한 장씩 전개되는 이 작업의 느린 움직 특성상, 전달의 형식 또한 필름을 인생에 걸친 작업의 인덱스로서 압축해내게끔 하는 능력을 혼동하도록 만들어졌다. 거의 연대기적인 방식으로 재고inventory의 기본적인 포맷을 다루는 이 작업에서 사진들은 느린 디졸브dissolve 효과와 함께 동영상으로서 활성화된다. 이미지들이 릴에서 풀어지면서, 영상에서 톤이 변하거나 단조로운 회색과 빛으로 구성된 그라데이션 말고 영상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거의 없다. 리히터의 아틀라스와 다르게 게이스의 작업은 축적과 수집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단명하는 이미지들의 재고에 가깝다. 이 이미지들은 느리게 그리고 치밀하게 노출된 프레임 하나 하나가 이어지고, 그리고 그 다음날, , next, day and night and day...각 이미지들 사이의 시간적 관계는 밀도에 의해 형성된다. 이러한 원시영화적인 작업의 기본적인 수단은 시간의 궤적으로서, 공동의 공공문화의 공간에 끈질기게 새겨지는 사적 기억으로서의 역사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행위 (마치 더글라스의 Overture에서 나오는 독백처럼)에 깃든 개념적 성질을 배신한다.

 

아카이브와 공공의 기억

『 인종폭동 』 Race Riot (1963  추정 )

근 한세기 간, 예술가들은 사진 기록물의 위상에 관한 전통적 관념들을 변화시키고 역사적 사건들을 통한 새로운 사유의 방식들을 생성하고자 사진 아카이브로 눈을 돌렸다. 최근 몇년동안, 예술가들은 공적 기억과 사적인 역사, 증거와 기록 사이에 존재하는 역사적 장소로서의 사진 아카이브의 위상을 탐구했다. 현대 상상력에 끼치는 사진의 소름끼치는 영향력에 대한 앤디 워홀의 성찰과 맞먹었던 작가들은 많지 않았다. 셀럽과 미디어 스펙터클에 관심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워홀은 이러한 이미지들이 가진 잠재력, 즉 미국인들의 집단적 상상계에 자리한 정신적인 분열들 (미국적 자아의 폭력, 비극, 그리고 트라우마)[각주:54]을 끄집어 내는 수단으로서의 잠재력을 포착했다. 인종폭동Race Riot (1963 추정)과 같은 작업에서 그는 (주로 대중매체에서 생성된) 시각 역사의 아카이브적 분석을 쌓아올리는데, 여기서 다큐멘터리적 정보들 간의 관계에 대한 고찰은 목격 그리고 집단 기억의 요소들과 합쳐진다. 워홀이 대중매체의 아카이브를 활용하는 방법은 공적 기억의 요람으로서의 사진에 대한 가장 지속적인 성찰을 만들어내고 표현했다. 워홀의 이미지들은 사고와 곤고privation에 대한 매체에서의 보도(자살, 차량 사고, 전기의자, 사나운 경찰견과 인종차별주의자 경찰들)에서 발췌한 것인데, 이 이미지들은 사회적 삶의 그리드grid를 규명한다. 찰스 무어Charlse Moore가 처음 Life를 통해 출판한 사진에세이에서 만들어진 워홀의 회화와 판화를 기가 막히게 분석하는 앤 와그너Anne Wagner는 워홀이 역사화가history painter라는 주장을 펼친다.[각주:55]

 

  워홀의 인종폭동은 아카이브와 트라우마 사이의 연결지점을 상징하는데[각주:56], 이는 와그너가 "후기 자본주의 아래 미국인의 삶의 글래머, 잉여성, 그리고 내재된 폭력성의 표명"[각주:57]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인종폭동에서 설명되고 있는 트라우마는 토요일의 재앙연작에서 보이는 충격적이고 선정주의적인 이미지들과는 다른 성격의 것이다.[각주:58] 후자의 경우 대중적 그로테스크의 한 유형을 대표하는데, 대중적 그로테스크란 대중이 희화적인 호러에 매료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차창에 부딪히고 불타는 차량 안에 갇히고 어두운 고속도로와 근교도시의 거리에 설치되어 있는 전주에 꿰뚫린) 피해자들은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연료가 된다. 트라우마적 폭력성을 이런 방식으로 다시 돌아보는 것으로 인해, 죽음의 장면과 이것으로의 다양한 아카이브적 회귀는 일상의 스펙터클의 일부가 된다. "이 결과, 이미지는 재현의 양상 사이에서 끼어 버리고, 알레고리와 역사 사이 어딘가에서 표류된다"라고 와그너는 관찰한다.[각주:59]

  『인종폭동이 어떤 특이한 유형의 세기 중반의 미국의 위기를 알레고리화 한다면, 이러한 위기는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Felix Gonzalez-Torres무제 (총기사망)Untitled (Death by Gun) (1990)에 담긴 이미지의 목록을 위한 사회학적 배경을 구성한다. 이 작업은 198951일부터 57일 사이의 일주일이라는 기간 동안 미국 전역의 도시에서 총격에 의해 사망한 464명의 선명하지 않은 흑백 사진들로 구성된 인덱스이다.[각주:60] 곤잘레스-토레스가 뭔가를 쌓아올려 만든 다른 작업들처럼, 무제 (총기사망)또한 어떠한 이상적인 높이를 맞추기 위해 몇백장의 인쇄물로 구성되어 있고, 관람객은 이를 원하는 대로 가져갈 수 있으며, 가져간 만큼 전시장에서 이를 끊임없이 보충한다. 죽은 이들이 자신들을 보는 관객에게 마비될것만 같은 침묵의 시선을 돌려주는 이 음울한 소재는 작업의 구조를 아카이브용으로 만들어진 인쇄물을 조각 기념비로 변화시킨다. 이 뛰어나지만 현혹적이기도 한 작업의 암시적인 성격은 아카이브적 실천의 두가지 형태의 층위에서 작동한다. 첫번째로, 이 작업은 푸코의 기념비로 바뀌어진 기록 개념을 체현하며, 단순한 재현물을 제단용 작품altarpiece으로 미세하게 변화시킨다. 두번째는 말 그대로의 아카이브로서, 첫번째를 거꾸로 한 것인데, 말인즉슨 이 작업이 기록document과 기념비monument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고 있다는 것이며, 아카이브에서 기념비로, 그리고 기념비에서 다큐멘터리로 계속 전환한다는 것이다. 이 부고들의 수집체에서, 충격적인 집단 트라우마의 한 징후로서의 상처가 드러난다. 피해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성은 무작위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이 무작위성은 이내 그들의 죽음의 시간적 틀을 통해 통일체로 합쳐진다. 이 누적되는 집계는 각 피해자에 관한 내용에 고유한 보도 혹은 다큐멘터리의 경계 안의 이미지를 밝힌다. 흰 종이 위에 나열된 사진들은 어떠한 순서나 위계적 배치를 따르는 것 같지 않아 보이며, 피해자의 인종, 젠더, 계급, 나이, 혹은 사망배경 (자살 혹은 타살)에 대해 고려하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 작업에서는 피해자에 불문한 죽음의 민주주의가 강조된다.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   『 무제  ( 총기사망 ) 』 Untitled (Death by Gun) (1990)

  워홀처럼 곤잘레스-토레스 또한 특히 미국적인 이슈를 다룬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 워홀의 작업과 하나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인종폭동이 기록의 기념화를 역사화로서 재현한다면, 곤잘레스-토레스의 무작위적인 죽음에 대한 아카이브는 피해자들을 기념한다. 기억함의 표현이자, 애도의 작업인 것이다.

 

  일란 리버만Ilán Lieberman 또한 Niño Perdido (2006-7)에서 기념의 형태로서의 아카이브를 활용한다. 이 작업은 멕시코 지역 신문에 실린 실종된 아이들의 사진에 기반한 드로잉 작업 연작이다. 기록과 기념비, 정보와 사진의 사이를 넘나드는 Niño Perdido는 영원히 찾아지지 못할 실종자들을 위한 예비 부고pre-obituary의 한 형태로 기능한다. 리버만은 신문에 실린 실종자 아이들의 사진을 활용함으로써 초상화 사진이 기억의 색인, 동일시화 그리고 때때로 탈동일시화disindentification의 이미지로서 널리 사용되는 것에 대한 경종을 울린다. 세심하게 그려진 각 이미지에서 그가 심혈을 기울여 재창조해내려는 것은 바로 원본 신문 이미지의 구도적인 포맷pictorial format이다. 마치 실종된 아이의 추모비를 만들듯 말이다.

일란 리버만, Niño Perdido  (2006-7)

  9/11을 예술적으로 다루는 것이란 어려운 일이다. WTT의 파괴는 이 로워 맨해튼 지역의 장소를 순식간에 추모와 기념비의 장소로 바꾸어 놓았다.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는 신전이자 성지가 되었다. 수많은 상징적 이미지를 낳았던 이 사건을 거론하려는 것은 아직 생생한 상처를 건드리는 것과 같고, 이 생생함을 경험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생생함은 아직까지도 남아 있어, 이 사건의 기억이 전 세계에서 반향을 불러 일으킨다. 폭발하는 비행기의 위력으로 뚫려버린 이 두 타워는, 불타고 무너지는 거대 구조물들로 이루어진 지워지지 않을 상징성을 남겼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즉각적으로 전 세계에 보도되었고, TV, 인터넷, 신문, 잡지 등에서 물릴만큼 반복되고 매해 기념식마다 재생된다. 최초의 푸티지가 등장하고 다큐멘터리적 이야기에 대한 필요성이 증가하면서, 트라우마적인 이미지들은 아카이브적인 것이 되었다. 9/11은 새로운 도상 경제를 만들어냈다.[각주:61] 아카이브를 트라우마적인 공적 기억과 연결시키는 상징들의 드넓은 경제 말이다. 이러한 이미지들의 유통이 수그러들지 않기에, 우리는 처음에 가늠할 수 없는 폭력의 행위에 대한 증거로서, 즉 다큐멘터리적인 목적 이상으로 이 이미지들이 갖는 위상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이미지들이 사건 그 자체보다 사건의 후폭풍에 관한 상징으로서 더 유효하게 되었다는 것인가? 어떻게 사건 그 자체가 아닌 사건의 후폭풍, 즉 사건의 매체화된 형태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을까? 많은 이들에게, 더 많은 이미지를 통해 9/11을 말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게 많은 말을 하는 것과 다름없고, 천박함으로 후퇴하는 것과 다름없다.

한스-페터 펠드만, 9/12 Front Page (2001)

  한스-페터 펠드만Hans-Peter Feldmann의 신작 9/12 Front Page (2001)에서 우리가 씨름해야 할 질문들은 위와 같은 것이다. 이 작업은 (본 전시에서 처음 선보여지는) 설치 작업으로, 끔찍한 사건 하루 뒤인 2001912일자의 유럽 및 기타 국제 신문매체들의 첫면을 100장을 모아 9/11에 대한 매체의 반응을 기록한 것이다. 이 사건을 먼 발치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인해 이 사건의 근본적인 영향력 혹은 미국에서의 정치적이고 집단적인 의미가 달라진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신문 첫면들을 사건이 발생했던 바로 그 도시에서 7년뒤 보여주는 것은 어떠한가? 이런 지점들을 펠드만은 자극하고 있다.

 

  1960년대 후반, 사진 매체에 오롯이 집중하기 위해 펠드만은 회화를 그만두었다. 그 이후로, 그는 첫번째로 공적 문화의 맥락 속에서 사진 매체가 지닌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인 의미에 천착했다. 두번째로는 이미지의 동시다발성으로 인해 발달된 개인적인 컬트로서의 추모, 그리고 사진 이미지가 텅 빈 기호로 거듭남에 따라 발생한 의미의 상실에 천착했다. 고급적인 것과 대중적인 것,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그리고 예술적인 것과 키치적인 것을 혼합하는 펠드만의 반사적offhanded이고 반미학적이고 "사진적"anti-photographic[각주:62]인 접근방식은 그의 작업주제가 가진 무거움과 상반된다. 이 중의 한 예가 바로 Die Toten, 1967-1993 (1998)인데, 이는 독일 내의 테러리즘에 관한 이미지를 다룬 것으로, 체계적이고 절제된 포맷 속에서 그는 수집되거나 만들어진 사진 이미지들을 새로운 해석의 구조로 연동시킨다. Die Toten과 마찬가지로 9/12 Front Page 역시 윤리적 그리고 정치적 공개라는 것의 다른 결들을 불러일으킨다. 펄럭거리는 신문 종이들은 과연 9/11의 어두운 사건을 조명하는가, 아니면 그저 이를 일상화하고 결국에는 사건의 영향력을 감소시킬 뿐인가? 9/11은 세계의 대중에게 그저 매체적인 사건일 뿐인가? 동반되는 주석 없이, 다양한 나라의 다양한 도시의 그리고 다양한 언어로 된 매체로부터 수집된 작업의 재료들은 관객에게 이 작업이 예술작업으로 받아들여져야 할지 아니면 그저 공적 증언의 한 형태로 받아들여져야 할지를 암묵적으로 묻고 있다. 공적 기억과 매체적 상상력에 천착해 있는 작업으로서, 9/12 Front Page는 상징적 충격과 스펙터클 사이의 교차점들을 다루고 (마치 저프루더Zapruder의 케네디 암살 영상과 같이), 사건과 이미지, 그리고 역사와 기록을 매개하는 사진의 조건들을 탐구하며, 한편으로는 매체가 아카이브와 공적 기억에 어떻게 개입하는지를 다룬다. 부클로가 고안한 개념인 "아노미적 아카이브"anomic archive (리히터의 아틀라스로 대표되는)1920년대의 사진몽타쥬 작가들의 이상향적 작업 사이의 대립은 여기서 매우 중요하다. "조직적이고 유통적인 형식이 이제부터 아카이브가 될 것이다..."[각주:63] , 신문, 그리고 복사된 서류철 등의 새로운 수용의 형태로 지속적으로 재현되고 섞이는 이미지들과 이 이미지들의 맥락들로서 규정지어지는 펠드만의 작업요소는 다음과 같은 이해에서 기인한다: "일반적인 사진 이미지는 이제 역동적이고 맥락적이고 우연적인 것contingent으로 규정되었고, 그 사진 이미지 속에 깃든 시각 정보의 연속적 구조화는 새로운 사회적 집단에서 가능한 사진적 주체뿐만이 아니라, 영속적으로 변화하는 활동들, 사회적 관계, 그리고 객체 관계들 속의 각 개별 주체들을 구성할 조건적contingent이고 사진적으로 기록될 수 있는 요소와 세밀한 부분들이 가진 열린 형식과 잠재적인 무한성을 강조했다."[각주:64] 이러한 이해는 아노미적인 경험과는 거리가 멀다.

 

  예술에서의 수용 양상은 어떤 담론공간을 생성하고 운용했다. 이 공간에서 관객들은 아카이브 작업을 고도로 구조적인 형태의 목격으로서 호명하는 단일한 역할을 수행한다. 이번 전시의 전제 중 하나는 아카이브의 위상이 오늘날 모호한 것은 아닐지라도, 공적 기억에 대한 역사적인 결정과정에서의 아카이브 작업이 가진 역할은 기억보조적 양면성에 의해 동요된다는 것이다. 공적 기억의 일부로서 아카이브에 대한 집착은 어떤 사건에 대한 자성적이고 다큐멘터리적인 반응으로서 매체의 아카이브 이미지를 활용하는 넓은 범위의 작가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을 유지해왔다. 애도와 상실에 대해 크리스챤 볼탄스키가 보이는 고찰에서, 기억의 근본적인 장으로서의 아카이브가 가진 힘은 전혀 줄어들지 않은 채로 존재한다. 그가 활용하는 이미지와 그가 구성하는 서사가 실제로 존재하는 아카이브를 나타낸다기보다, 아카이브를 유추하게끔 하고 상기하게끔만 할 지라도 말이다. 거의 40년간, 볼탄스키는 아카이브의 안정성에 대한 개념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을 던져왔다. 아카이브의 안정성이란 우리가 과거를 알고 이해하게 되는 수단을 말하는 것인데, 볼탄스키의 문제의식은 기억의 논리에 진입하는 방식보다는, 사진 이미지들이 어떻게 기억에 혼란을 야기하고, 어떻게 사진 이미지들의 일관적이지 않은 성질이 사적 그리고 공적 기억의 표면에 구멍을 내는지를 폭로하는 것에 가깝다. 볼탄스키의 작업은 다양한 방식으로 조직된 군집체로, 여기서 그는 사진 기록을 모순적인 방식으로 다룬다. 때로는 이 기록들이 일관적인 서사로 보이는 것 같은 선형적 구조를 형성하며, 때로는 이 기록들이 희미한 조명을 받는 페티쉬화되고 개별화된 단위로 만들어진다. 후자의 경우, 이들은 헌신적인 성질을 부여받고, 마치 신전을 상기시키는 듯한 감성적 배치의 집합체로서 구현된다.

  볼탄스키의 작업은 비활성화된 수집품들 그리고 대화의 배열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며, 가끔씩 그는 그의 문제의식을 극단으로까지 밀어부쳐 허구적인것과 역사적인 것 사이의 선을 흐리게 한다. Detective라는 제목의 연작에서 그는 동명의 유명한 프랑스 잡지를 차용하는데, 이 잡지는 범죄의 대리경험이 미디어 잉여물의 스펙터클을 통해 이루어지는 악행의 세계에 관한 것이다. 볼탄스키의 작업은 사진몽타주의 규범을 전유하는데, 사진몽타쥬라는 것은 배치juxtaposition와 탈맥락화decontextualization같은 장치들이 그림 서사pictorial narrative의 규칙적인 흐름을 방해하는 양상 뿐만 아니라 기호의 구체성보다 민주주의적인 관계성에 더 치중되어 있는 양상을 가리킨다. 집단화된 배열은 단일성the singular과 독자성the unique보다 우선시된다. 바로 이러한 관계성들이, 다양한 출처에서 모아진 일련의 이미지들에 (종종 이 이미지들은 다른 방식으로 재활용되며, 이는 역사적 문서로서 이들 이미지의 진위성authenticity에 대한 문제를 부각시킨다) 의해 제시되는 것이다. 하지만 "작업의 관객들은 이 사진들이 범죄와 살인에 연루된 개인들의 이미지라는 것을 알아도...[그들에게는] 피해자와 범죄자를 구분할 방법이 없다."[각주:65] 범죄를 다루는 Lessons of Darkness: Archives: Detective, 혹은 홀로코스트를 암시하는 Archive Dead Swiss (1990) 같은 작업에서, 이미지들의 배열, 그리고 이들의 확대되고 부드러운 초점의 미적 구도dilated, soft-focus pictorialism는 불편한 모호함을 생성한다. 또 한번, 여기서 일반적인 것이 구체적인 것보다 우선시되는 것이다.[각주:66] 예를 들어, 홀로코스트의 어두움은 일종의 구조적인 작동원리를 통해 다뤄지는데, 이 원리를 통해 우리는 사적인 이미지들--사라짐과 기억 사이에서 부유하는 남성, 여성, 그리고 아이들의 스냅샷 사진들--이 강력하고 기념비적이고, 선형적인 배열로 변하는 것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배열들은 공적인 기억에 대한 고찰로서 거듭난다. 집단화된 아카이브는 역사에 관한 기억보조적 성찰이 되고, 개인 삶의 익명성에 기반하여 일종의 일반화된 단일성generalized singularity을 조명하는데, 이 단일성은 집단, 공동체의 담론에 종속된 것이다. 하지만, 허구적인것과 다큐멘터리적인 것을 혼합하기 좋아하는 볼탄스키의 경향으로 미루어 보면, 이 개개인의 삶으로 구성된 전시장에서 사용되는 이 이미지들이 역사적인 기록물들인지 혹은 그저 이러한 개개인을 대표하는 이미지일 뿐인지 알아내기는 불가능하다. 이것이야말로 볼탄스키의 작업이 가진 양면성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관객은 무엇이 진짜 역사적인 것이고, 의미상으로 아카이브적인 것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진과 매체 기록물에 대한 예술적인 접근은 증거로서의 아카이브가 공적 기억이라는 주제에 대한 보다 폭넓은 연구와 이어지도록 재고하는 데에 기여한 바 있다. 그리고 이 연구들로부터 촉발받아, 아카이브적 실천의 계보에 속한 동시대 예술가들은 비판적인 사유를 전개해 나갔다. 아부 그라이브Abu Ghraib 스캔들에 관한 이미지에 사람들이 집착하는 것에서 보여지듯, 여기에는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관심사가 작동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엔 또한 이러한 이미지들이 예술계에서 갖는 위상에 대한 보다 깊은 반감이 자리한다. 아부 그라이브에서의 이미지들이 대중적인 논란 속에서 (이라크 전쟁, 고문, 그리고 가혹행위를 두고 관료주의적으로 야기된 망각에 맞서는 카운터아카이브로서) 도구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한편, 예술적인 개입 또한 사진 기록물과 역사의식의 관계에 대해 보다 복잡한 사유를 도모할 수 있다. 아카이브는 견딜수 없는 역사적 무게의 장면들을 재현하며, 따라서 미학적, 윤리적,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사변의 형태로서 예술가들을 위한 생산의 공간을 열어제낀다.

 

로버트 모리스의 작품과 베르겐-벨슨에서 촬영된 사진이미지는 구글드라이브 3번 폴더를 참고하세요.

 

  그렇다면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은 아카이브에 대한 순수하게 어의적인semantic 해석과 아카이브가 위치한 역사적 현재 사이의 차이이다.[각주:67] 다음의 두 개의 사진이미지를 서로 옆에 두고 생각해보자. 하나는 제2차대전 말기인 1945417일에 베르겐-벨슨 수용소에서 영국군 사진반Film and Photographic Unit 대원 중 한명이 촬영한 기록용 사진이다. 이 사진은 쇠약해 보이며 몸에 힘이 풀린 상태의 한 어머니를 담고 있다. 찢어진 담요가 가슴 부위를 덮고 있으며, 죽어있는 어머니의 시선은 위로 고정되어 있다. 이 사진뿐만이 아니라 베르겐-벨슨 수용소 해방 당시의 수많은 기록들은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함의 생생한 모습을 전달한다.[각주:68] 이러한 이미지들이 "나치 수용소에 관한 기록 혹은 유물 중 가장 영향력있는 것"으로 남은 이유 중 하나는 토비 해기스Toby Haggith가 주장하듯 이 이미지들이 "가장 그로테스크하고 충격적이기 때문이다."[각주:69] 이러한 이미지들이 대중에게 널리 확산되면서 이 충격은 더 강해졌고, 이러한 이미지들의 도상학에 사람들이 집착하도록 기여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비교를 위해 제시할 또 하나의 이미지는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가 만든, 베르겐-벨슨 사진을 실크스크린으로 찍어낸 판화 무제Untitled (1987)이다.[각주:70] 워홀이 앨러배마주버밍엄에서의 민권운동 행진을 기록한 찰스 무어의 사진들을 활용햇듯이, 모리스 또한 노골적으로 역사적 사건을 참조한다. 무제는 사진가들과 기자들이 남긴, 홀로코스트, 드레스덴 폭격 등 제2차대전과 관련된 이미지들을 재고하는 모리스의 작업군의 일환이다[각주:71]. 모리스는 (반복하자면, 워홀처럼) 베르겐-벨슨 이미지 원본에 좀 더 변형을 가한다. 좀 더 희미하고 투사되는 것처럼 보이도록, 프레임이 꽉 차게 원본 이미지를 크롭하고, 납화법을 사용했으며, 마치 표현주의적인 제스쳐마냥 푸른빛이 감도는 보라색 셀레늄을 뿌려놨는데, 이것 때문에 과거 대화가들이 남긴, 이상하고 위화감이 드는 판화같은 느낌을 준다. 액자frame에는 하이드로칼Hydrocal[역주: 염류제거제]이라는 원료를 사용해서 만든 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하이드로칼은 모리스가 1980년대에 "불꽃 폭풍과 홀로코스트 회화를 그리던 시절의 '바로크' 단계"에서 많이 사용했던 재료이다.[각주:72]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액자 무늬에서 파편화된 인체 부위와 오브제들이 포작되는데, 이는 마치 성체, 성물reliquary을 제시하는 것 같다.

로버트 모리스 작품 중 하나의 액자 확대모습

  조각작품같은 액자와 변형된 사진을 같이 배치하는 것으로 모리스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사건이 일어난 지 40년이 지난 뒤 이렇게 탈맥락화 하는 것이 그 사건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증진시키는가? 아니면, 선형적인 기억보조적 연속성, 즉 젊은 어머니의 신체가 촬영되었던 장소로 뻗어진 일직선에 파열을 가져오는가? 기록사진을 과감한 방식으로 재구성하며 이를 역사의식으로 다시 투사하는 모리스의 작업의 위력은 그 주제(나치의 야만성)가 아니라, 아카이브적 구체성archival specificity의 체현, 거의 신성화되었다고도 할 수 있는 이 체현으로서의 이미지가 내포한 양면성의 증폭된 감각을 형성하는 방식에 기반한다. 모리스의 작업에 대한 해석을 좌절시키는 것은 의도적인 미적 재구성화와 탈맥락화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문제적이었던 맥락 안에 위치한, 이미지의 지울 수 없는 장소성이다. 모리스가 직접적으로 다루는 것은 베르겐-벨슨이 아니라 베르겐 벨슨 아카이브인것이다. 모리스가 이 이미지를 다루는 방식이 사람들이 참사에 홀리게 되는 더 넓은 맥락에서 기인하는가, 아니면 논란이 많은 노먼 핑켈스타인의 주장, 즉 참사의 이미지는 그가 홀로코스트 산업이라고 부르는 과정의 일환으로 인해 조작되었다는 주장에 기인하는가?[각주:73] WJT 미첼의 혜안있는 해석은 참사에 대한 모리스의 고찰을 핑켈스타인의 비판으로부터 멀리 떼어낸다. 미첼은 여기서 틀frame과 이미지 사이의 시간적 관계성을 지적한다. "신체 부위와 홀로코스트 이후의 폐기물들이 새겨진 하이드로칼 액자frame는 작업의 "현재"를 프레임하는 것framing으로서 존재한다. 이는 과거 사건을 감싸고 있는 전리품 혹은 성물이다. 이 재앙은 화석을 남겼고, 이 화석은 바로 이 재앙을 둘러싸고 있는 액자에 각인으로서 새겨졌다. 이미지와 프레임frame의 관계란, 파괴의 요인과 신체의 관계와 같고, 과거와 현재의 관계와 같다."[각주:74]

  나치 참사는 에이알 시반Eyal Sivan의 영화 스페셜리스트The Specialist: Eichmann in Jerusalem (1999)의 주제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1961년에 예루살렘에서 악명높은 나치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을 기록한 푸티지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이히만은 여러 수용소로 대규모의 숫자의 유대인들을 효율적인 방법으로 보내는 일을 맡았던 사람이다.[각주:75] 시반의 영화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이미지가, 특히 생존자들에게 유발하는 트라우마적인 감정적 반응과는 거리를 둔다. 대신, 영화는 아이히만 같은 가해자의 평범성에 주목하는데, 아이히만의 결여된 악의성innocuousness이야말로 한나 아렌트로 하여금 "악의 평범성"이라는 기억에 남는 표현을 고안하도록 한 것이었다.[각주:76] 갈 라즈Gal Raz는 이 영화를 평론할 때, "시반은 해체와 재구성이라는 영화언어학적 전략을 통해 아렌트의 주장을 영화적으로 표현한다"라고 썼다.[각주:77] 해체의 날카로운 칼을 들고 시반은 재판의 연대기를 재구성하며 이를 순서에 맞지 않게 제시함으로써 서사적 연속성과 아카이브의 선형성 논리를 거부한다. 이 사건을 일련의 편집을 통해 재구성함으로써, 감독은 보통 빽빽한 사법적 절차에 극적인 요소를 부여한다. 라즈에 의하면, 스페셜리스트는 아카이브 그 자체에 대한 개입 뿐만 아니라, 재판이라는 역사적 과정에 대한 개입이기도 하다. "왜곡된 연대기가 장면 전체의 층위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장면[] 속의 편집의 층위에서도 일어난다"고 할 정도의 개입 말이다.[각주:78] 검사와 변호인 (법정, 생존자, 그리고 이스라엘 정부 대 아이히만, 그리고 나치의 살인 장치 전체)이 맞서는 구도는 수용소의 끔찍함에 대한 그 어떤 혜안도 무용지물로 만든다. 실제로 재판이 극적으로 전개되면서, 아이히만이 짐승으로, 전범으로, 그리고 유대인 혐오자로 비춰지면서, [수용소의] 끔찍함은 가려지거나 부차적인 것이 되어 버린다. 관객들은 혐의를 제시하고 책임을 부인하며 서로와 맞서는 피고와 원고간의 스파링을 보며, 극적인 순간들로 구성된 속도감에 몰입하게 된다. 재판의 푸티지가 전달하는 것은 악의 화신과는 정 반대의 것이며, 오히려 가해자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지 않으면서 홀로코스트를 재현하는게 과연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을 두고, 아이히만이 반유대주의자가 아니라 평범한 범죄자라고 결론내린 아렌트와 마찬가지로, 시반은 편집을 통한 탈맥락화를 시도함으로써 목격자들의 증언을 축소해 버렸다고 비난받았다.[각주:79]

 

스페셜리스트스트리밍 링크(유료): https://vimeo.com/ondemand/specialisteng

 

  여기서 중요한 사안은 시반과 모리스의 작업이 어떤 방식으로 아카이브의 정언적 권력, 즉 진실에 대한 주요한 통찰력으로서의 그 권력을 침해하는가이다. 아카이브의 유일한 권위를 부인하는 것은, 언뜻 보면 그 아카이브가 재현하고 있는 트라우마를 축소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모리스는 많은 이들에게 있어 기억에 충격과 상처를 주는 이미지를 활용한다. 시반은 모리스의 이미지가 기인하는 참사와 피고 아이히만과의 상관관계를 성립시키려는 사법 재판의 윤리적 확신성을 취조한다. 베르겐-벨슨 이미지를 탈맥락화시키는 모리스의 작업과 아이히만 재판을 순서에 맞지 않게 재배열시킨 시반의 작업은 아카이브 진실이 역사적 사건과, (기억과 역사적 사건 사이의 관계성의 측면에서) 다큐멘터리 사진이 이 사건에 부여하는 센세이셔널리즘적 형태와 이루는 조화에 금이 가게 한다. 모리스의 변형된 이미지는 끔찍함의 색인에서 꺼내져온 것이며, 의식적인 모호함을 제시함으로써 아카이브의 침묵, 아카이브의 사회적 소통불가능성이야말로 진실의 합리적인 목소리라고 밝힌다. 몸을 가누지 못한 여성이 수성 액체처럼 보이는 들판에 누워있는 모습은 마치 물에 감기고 있거나 막 땅속에서 발굴된 것처럼 보이며, 이는 오늘날의 문화가 역사적 사건에 대해 갖는 주의력, 아니면 오히려, 동시대 예술이 트라우마와 기억 사이의 난감한 영역과 씨름하기 위한 방식으로서 기록과 역사를 호명하는 것에 대해 도전하는 비판적 장치 같기도 하다. 모리스와 시반 각자의 개입이 [관객들로 하여금] 위화감이 들게 하는 것은 이들이 이 난감한 영역은 물론, 아카이브가 공적 기억에 끼치는 위력의 영향을 들여다보고자 하기 때문이다.

 

  두 작업 모두 아카이브가 속해 있는 방대한 도상경제권iconomy을 활용한다. 아카이브는 아주 철저히 길들여진 나머지 아예 기억을 가리키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 이미지들이 신문,잡지, 혹은 디지털 카메라에서 추출되었건 간에, 아카이브는 이미지의 사용자들과 관객들에게 정보, 역사, 그리고 기억에 대한 새로운 형태의 윤리적,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문화적 관계를 맺게끔 한다. 홀로코스트의 기억들은 지속적인 증언, 입회 의식rituals of witnessing, 서사, 영화, 박물관[혹은 미술관] 등의 흐름에 의해 우리들에게 전달되어져 왔지만, 이 중 일반 대중에게 있어 가장 주요한 지식은 주로 시각적인 것이었다. 여기서 사진은 단지 재난의 재현물로서만이 아닌 더 많은 역할을 수행한다. 이들은 홀로코스트의 매개되지 않은 증거로서 간주되게 되었다.[각주:80] 아카이브 충동이 동시대 예술에서 일반적이 되었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이 모든 고려지점들이 예술가들의 활동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아카이브에 대한 흥미, 범접할 수 없는 아카이브의 광기, 그리고 검증하고 영감받고 출처를 위해 지속적으로 아카이브로 회귀하는 것은 사진과 영상에서 찾을 수 있는 아카이브적 형식의 성질에 대한 깊은 관심만을 시사하는 게 아니라, 과거에 대한 역사적 성찰과 예술 사이의 관계에 대해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전시는 겉보기엔 이러한 성찰reflections에 관한 대화와 같다. 하지만 또한 이미지의 계보와 세대 사이, 논의와 방법론의 양상 사이에서, 이러한 성찰의 풍크툼punctum과 같은 것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 전시는 아카이브의 위상을 재고하기 위해 사용했던 다양한 접근법들과 건너온 역사적 지반들을 보여준다. 파잘 쉬크Fazal Sheikh승자는 운다: 아프가니스탄The Victor Weeps: Afghanistan (1997) 연작의 사진 작업은 견딜 수 없는 상실의 완전히 이질적인 영역으로 아카이브를 밀어부친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경계의 장으로서, 그리고 영원히 상실된 하지만 불의와 고귀함, 그리고 순교자의 상징으로 지속적으로 기억되어야 할 사랑하는 이들에 관한 개인의 기억을 삼켜버리려 위협하는 사건들에 대한 반항의 장으로서 남아있기도 하다. 잊혀짐의 칙령에 맞서, 쉬크가 찍은 죽거나 실종된 가족들의 작은 여권사진을 들고 있는 손 사진들은 기억과 주모 사이의 회색 지대에서 부유한다. 이 손들은 관객에게 순교한 아들과 형제들 (사진의 캡션은 이러한 내용들이 사랑했던 이들의 증언에 기반한 것이라 알려준다)의 이미지를 건낸다. 마치 불타는 인두와 같은 기억을 우리에게 닿게끔 하려는 것처럼, 우리에게로 뻗어나오고 있는 이 손들에서 보이는 것은, 죽음의 위압적인 영향력으로 점철된, 연민의 제스쳐이다.[각주:81]

파잘 쉬크,  『 승자는 운다 :  아프가니스탄 』 The Victor Weeps: Afghanistan (1997)

  이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아카이브 형식은 역사적 사건들을 재연하는 시간적 작동원리, 심지어는 (이 전시가 보여주듯) 역사를 자의식적인 픽션으로 재구성하기 위한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와리드 라아드Walid Raad와 아틀라스 그룹The Atlas Group이 그러한 사례이다. 1970-1990년대 사이에 일어난 레바논 내전에 대한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이들의 연구는 깊은 당혹감과 상처의 유머, 그리고 매우 훌륭한 발명創制으로 가득한 작업이 된다. 레바논 내전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지만, 이 전쟁의 역사는 이데올로기 및 분파 세력들에 의해 지속적인 조작에 노출된, 해석의 지뢰밭이나 다름없다. 우리를 공식 기록의 형태로 끌어들이기보다 (공식 기록의 해석학적 가치는 궁극적으로 다른 분파 세력에 의해 반박될 것이다), 라아드 혹은 아틀라스 그룹은 역사적 기록과 이러한 다양한 기록을 가능하게 한 방법론들이 지닌 모순으로 우리를 이끈다. 역사소설의 틀을 빌려, 아틀라스 그룹의 아카이브는 전쟁의 기억을 둘러싼 논쟁의 영역을 비추는 탐색과 해석을 시도하는 허구적인 인물들 (역사학자, 통역가, 목격자, 아키비스트 등)을 운용한다. 이 중 예를 들어 파쿠리 파일Fadl Fakhouri File[각주:82]은 상상 속의 레바논인 역사학자 파쿠리 박사가 수집한, 전쟁 중 베이루트에서 터진 몇천 개의 자동차 폭탄에 대한 225권의 수첩과 다른 "증거물"로 구성되어 있다. 파쿠리의 수첩은 1993, 그의 죽음과 함께 아틀라스 그룹의 아카이브에 "기증"되었다. 이번 전시에 포함된 작업인 We can make rain, but no one came to ask (2008)은 전략으로서의 추상성abstraction으로의 전환을 대표한다. 여기서, 허구적인 자동차 폭탄 수사에서 가져온, 알아보지 못하게 쓰여진 "증거"는 가로로 펼쳐진 이미지 파편들로 뒤덮인 흰색의 바다에서 떠다닌다.

 

Walid Raad/The Atlas Group, We can make rain, but no one came to ask (2008): https://www.theatlasgroup1989.org/makerain

 

  라미아 조레이게Lamia Joreige도 이 전쟁이 어떻게 레바논의 기억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자신의 영상작업 Objects of War (1999-2006)에서 탐구한다. 사진 앨범의 이미지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조레이게는 촬영 대상들에게 자신들 각자에게 있어 전쟁을 대표하는 물건이 어떤 것인지를 고르고 그것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해달라고 요청한다. 이 중 한명이 고른 것은 어떤 오래된 단체사진이고, 다른 이가 고른것은 어떤 집의 설계도면이며, 또 다른 사람이 고른 것은 큰 파란색 플라스틱 용기이다. 이 물건들은 어떤 깊은 아카이브적인 회수archival retrieval를 향한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조레이게의 방법론은 물건과의 관계의 층위에서 작동하고 있는 굉장히 사적인 증언들을 불러일으키지만, 동시에 분명 정치적이기도 한, 전쟁의 공식적인 역사를 혼란스럽게 하는 직접 살아낸 경험lived experience의 결을 보여준다.

...(중략)...

 

아카이브의 민족지학적 조건들

 

아카이브 형식이 특정한 기억보조적 기능을 가졌고, 역사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다는 믿음은 아카이브의 민족지학적 조건들로서 규정될 수도 있는 것들과도 관련이 있다. 호모 소비에티쿠스homo Sovieticus의 공간이 되었든 스냅샷 사진 수집을 향한 충동이 되었든, 일상의 사진domestic photography이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아카이브를 사회와 사회적 습관들이 형태를 갖는 장으로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아카이브는 이미지의 생산, 교환, 그리고 전파의 경제, 혹은, 테리 스미스의 신조어르 빌리자면, 도상경제를 구성한다. 이러한 도상, 이미지, 그리고 기호들의 경제권은 사회적 문화적 지형을 휘덮는 어두침침한 감각체 속에서 존재한다. 오늘날의 아카이브는 역사적 감금상태에 놓여있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구현된다. 매체 경험, 미술관, 자연사 박물관, 민속지학 박물관, 오래된 도서관[각주:83], 기념품 매점, 대중엔터테인먼트, 역사적 재연, 추모비와 기념비, 사적 앨범, 컴퓨터 하드드라이브 등. 이러한 생산의 현장은 아마 피에르 부르디외의 말을 빌리자면 문화적 서식지cultural habitus[각주:84], 즉 민족지학적 조건이라고 불려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조건 아래서, 예술가들은 아카이브 환상은 물론 역사학자, 번역가, 큐레이터, 그리고 교육자의 집정관적archontic[각주:85] 기능을 구현한다. 이러한 기능들에 포함되는 것들이 바로 특정한 아카이브 프로젝트 (예를 들면 제프 게이스의)가 기반해 있는 시간적 식별성을 거부하는, 충동적인 비축 그리고 축적행위 등이다. 데리다는 이러한 민족지학적 조건을 아카이브 열병이라고 규정하였다. 아카이브를 향한 열풍적이고 광적인 관심이라는 의미인 이 표현에서, 이 전시의 기저에 작동하고 있는 언어가 파생되었다.

 

  조이 레너드Zoe Leonard, 로나 심슨Lorna Simpson, 쉐리 레빈Sherrie Levine, 비반 순다람Vivan Sundaram, 글렌 라이곤Glenn Ligon, 토마스 루프Thomas Ruff, 그리고 타시타 딘Tacita Dean의 작업들은 시각민족지학의 조건들을 통해 작동한다. 각 작업은 아카이브적 과거에 대해 시간적 그리고 도상적인 분석을 형성한다. 각 작업은 문화적 교류의 재료로서의 이미지의 위상에 천착해 있다. 타시타 딘의 플로Floh[각주:86]는 일상의 사진의 생산에 대한 민족지학적 통찰력을 보여준다. 딘은 7년동안 유럽과 미국의 벼룩시장에서 사진을 모았고 플로를 구성하는 163개의 이미지들은 전문사진이라기 보다 아마추어 사진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 이미지들은 대부분의 일상 사진의 유형과 일치한다. 개인과 단체(몇몇은 기관같기도 하고)의 초상화, 물건 사진, 휴가 사진, 반려동물이나 가족의 스냅샷 사진 등. 이 이미지들은 마크 곳프리Mark Godfrey발견된 사진found photography의 종류라고 부르는 것들이다.[각주:87] 하지만, 기존의 의미에서 발견된이 사진들은 각각의 이미지 종류 사이의 유형적 구분만큼이나, 문화적 의미의 구체성도 고려하여 매우 신중하게 선별되고 활용되었다. 아마추어 사진과 예술 사진의 구분은 흐려지고 있지만, 예술에서의 사진의 탈숙련화de-skilling는 여기서 다뤄지는 사안이 아니다.[각주:88] 이렇게 축적된 은닉품들에서 찾아질 수 있는 의제는 근본적으로 문화적이고 구체적으로 민족지학적인 속성의 것이다. 정교한 큐레이터적 자질을 무기로, 딘은 플로민족지학자로서의 예술가라는 논리를 구현하는데 활용한다.[각주:89]

 

  토마스 루프는 1970년대 후반부터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베른트 베허Bernd Becher와 힐라 베허Hilla Becher의 마스터 클래스를 통해 사진 이미지에 대한 체계적인 재고를 도모했던 소규모의 독일 예술가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 여기에는 칸디다 회퍼Candida Höfer, 안드레아스 구르스키Andreas Gursky, 토마스 스트루스Thomas Struth도 포함되어 있었다. 1980년 중반부터 이 예술가들은 이미지 생산에 대한 개념적 접근을 위한 새로운 포맷을 탐구하는 작업을 했고, 아우구스트 산더August Sander에서 시작헤 알베르트 렝어-팟쉬Albert Renger-Patzsch에 이르는 1920년대의 독일 사진가들에 의해 형성된 신즉물주의Neue Sachlichkeit적인 객관적 관찰의 원칙들을 갱신하려는 시도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베른트와 힐라 베허의 평평하고 변형되지 않은, 도태 직전 상태의 산업구조물들의 이미지 속에서, 대상의 직접적이고 매개되지 않은 기록이라는 것은 연속적이고 개념적인 힘을 얻는다. 이러한 미학에 대해 루프의 세대는 (작업에서 보이는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드라이하고 환원적인 다큐멘터리 감각과 민족지학적 주제를 혼합한 이미지로 응답했다. 베허의 옛 학생들 중, (이들 모두 자신들만의 비평적인 언어를 만들어냈다) 사진에 대한 루프의 접근법이야말로 가장 이질적이다. 최근, 그의 관심사는 사진의 사회적인 맥락에서 사진의 포맷들이 정리되어 있는 아카이브 축척물, 즉 예를 들면, 루프의 Nudes 연작이 기반하고 있는 인터넷상의 포르노 사이트에서 발췌한 사진 파일들 같은 것으로 옮겨갔다.

  Machines (2003)는 문화적 가치를 탐구하고, 이와 관련된, 아카이브에 얽혀져 있는 미학적 그리고 사회적 의미를 찾는 루프의 작업의 연장선에 있다. 사진 경제권의 폐기물 더미에서 모아진 딘의 플로처럼, 루프의 Machines 역시 발견된이미지들found images이다. 이 이미지들은 지금은 없어진, 뒤셀도르프-오버카셀 지역의 기계 및 도구 회사 로데 되렌베르그 아카이브에서 확보한 것이다. 딘의 경우, 자신의 이미지들을 처음 확보했을 때의 상태 그대로 놔두는 경향이 크다면, 루프는 아카이브에 개입하여 아카이브의 민족지학적 그리고 인류학적 대상으로서의 위상을 명확하게 하고, 인식론적 그리고 미학적 기능들도 부여한다. 스캔, 크롭, 착색, 확대, 그리고 이 회사의 제품군들에 대한 브로셔보다 훨씬 크게 인화한 사진들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루프는 기계에 토템과도 같은 존재감을 부여한다. 루프의 작업군에 대해 글을 쓰며, 캐롤린 플로스도르프Caroline Flosdorff는 다음과 같이 관찰한다. “루프의 사진이 보여지는 맥락은 이제 더 이상 특정한 목적 (제품 사진, 광고 사진)에 의해 묶이지 않는다...”[각주:90] 제품 프롯셔에서 예술사진으로 넘어가는 이러한 맥락의 전환은 양면성으로 가득차있다. 기계들을 탈맥락화된 구도적pictorial 소재로 바꿔놓은 루프는 그들의 사진적인 존재감을 강화한다. 이 기계들은 민족지학적 관심의 대상으로서의 모든 구체성을 잃는다. 이들은 산업 페티쉬화의 상징적인 표식으로 거듭난다. 루프가 이미지를 해석하는 방식은 힐라 그리고 베른트 베허의 작업에서 매개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주체성, 그리고 드라이하고 직접적인 성격에서는 벗어나지만, 탈맥락화와 페티쉬화의 바로 이 접점이야말로 루프의 Machines가 먼 산업적 과거를 엿볼 수 있게 해주는 그의 스승들의 작업들 (용광로, 곡식 비축고, 갱도)과 가장 닮아있는 지점이다.

 

  로나 심슨의 다층적인 작업은 고고학적인 것, 아카이브적인 것, 그리고 포렌식을 아우른다. 그의 구도적 분석의 언어는 흑인 주체의 정신적 그리고 역사학적 구성의 간극에서 펼쳐진다. 그러므로, 인종과 정체성에 대한 심슨의 복잡한 탐구의 이론적 그리고 개념적 지평은 아카이브화의 두 가지 동시적인 구조를 다룬다. 하나는 흑인 주체의 신체가 프란츠 파농이 외피화epidermalization[각주:91]라고 부른 과정을 통해 어떻게 문화적으로 식별되는지, 즉 인종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피부에 새겨진다는 개념이다. 다른 하나는, 이러한 식별화가 영화, 예술, 문학 등의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실천 속에서 재생산되고 기록되는 방식이다. 더 나아가, 심슨은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이라는 것이 가진 중요성을 특정짓는데, 여기서 지식의 고고학이라는 것은 흑인 주체와 미국 문화 사이의 아카이브적 관계성에서 서정성을 제거하고 대신 이를 대중문화에서 사용되는 인종화된 이미지의 코드를 이해할 수 있는 원천으로 밝혀내는 수단으로서 사용된다. 민족지학자로서의 예술가라는 미명 하게 작업하는 심슨의 주요 관심사는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이 어메리칸 아프리카니즘American Africanism[각주:92]이라고 명명한 것의 아카이브 잔해에 대한 분석에서 영향을 받았다. 어메리칸 아프리카니즘이란 미국의 고급예술과 대중엔터테인먼트에서의 흑인성에 관한 역사적 재현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인종과 정체성 사이의 관겨성을 말한다.[각주:93]

로나 심슨, Study (2002)
로나 심슨, 『 무제 ( 저녁식사에 누가 올까 ) 』 Untitled (guess who’s coming to dinner) (2001)

  전시에 포함된 작업은 무제(저녁식사에 누가 올까)Untitled (guess who’s coming to dinner) (2001)연구Study (2002)이다. 이 작업들은 흑인 주체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을 생산하는 잘못된 재현의 담론에 딱 들어맞는 오인식(이라고 심슨은 주장할 것이다)과 대중적 묘사에서 생선된 지형에 밀접하게 엮여있다. 이 두 작업 모두에서 심슨은 사진 스튜디오를 아카이브적 재정렬archival realignment이라는 것으로 드러날 것을 구축하는 장소로서 활용한다. 이러한 아카이브적 재정렬에서는, 작업에 묘사된 흑인 주체들 (무제의 경우 여성 주체, 연구의 경우 남성주체이고, 각각 19세기 초상화를 연상시키는 스타일로 촬영되었다) 사이의 간극과 미국의 영화 그리고 예술에서 발견한 재현의 장면들이 묘사되고 있다. 무제는 마흔 세 개의 타원형 초상화를 반투명한 아크릴 아래에 세로로 정렬하는 구조적 재배치가 이뤄지고 있다. 아크릴 표면의 왼쪽과 오른쪽에 새겨진 것은 20세기 전후부터 1960년대 사이에서 생산된 미국 영화 제목들이다. 같은 전략이 연구에서도 활용되고 있지만, 여기서 이 제목들은 흑인 남성이 주체 혹은 객체로 등장하고 있는 회화에서 가져온 것이다. 예를 들면, Study of a Black Man, A Negro Prince, African Youth , 심슨의 작업에 기록된 제목들의 회화 작품들은 모두 미국의 미술관 콜렉션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작업에서, 심슨은 미국의 상상의 아카이브에 진입하는 방식으로서 대항민족지학적 접근법을 차용한다. 비슷한 방식으로, 심슨은 최근에 성황하고 있는 이베이ebay라는 온라인 경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바 있다. 여기서 심슨은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반 사이에 생산되었던 제도권 영화들에 대해 조사하고 이 영화들을 사들이고 있었다. 잭키Jackie (2007)라는 제목의 작업에서 심슨은 이러한 영화들 중 하나에서 차용한 푸티지를 사용하는데, 이 푸티지는 어떤 선생이 백인 남자아이에게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게 하는 3분 길이의 푸티지이다. 여기서 심슨이 다루는 것은 정신건강과 관련된 기관들이 미국 인구의 특정한 일부를 재훈련retrain하는 비가시적인 방식들이다.

글렌 라이곤,  『 블랙 북의 여백에 대한 단상 』 Notes on the Margin of the Black Book

  아카이브의 민족지학적인 조건들, 특히 전유의 언어에 특히 의존하고 있는 조건들은 지속적으로 탈개념주의적 사진 작업의 비판적 패러다임을 활성화시켜왔다. 전유라는 것은 동시대 예술계에서 원본과 사본 사이의 공간을 파괴하려는 포스트모더니즘적 변증법의 최전선에 자리하고 있었고, 이를 통해 저자author (권위authority의 원천, 확실성이라는 어원을 가진 저자 개념을 가리킨다)라는 모더니즘적 범주의 효용성에 문제를 제기한다. 내가 시사한 바 있듯, 아카이브는 이와 비슷하게 역사적 진실의 주요 출처로서의 권위에 깃든 기능에 의존한다. 흑인 남성들을 찍은 로버트 메이플소프Robert Mapplethorpe의 사진집 블랙 북The Black Book에 담긴 동성애적 사진들에 대해 글렌 라이곤이 가한 신랄한 비판은 이러한 원본과 사본, 저자와 권위 사이의 간극에 기반하고 있다. 블랙 북의 여백에 대한 단상Notes on the Margin of the Black Book에서 라이곤은 성적 스테레오타이핑의 신호원으로서 메이플소프가 가하는 흑인 남성 신체의 대상화를 침착하게 해체하는데, 이러한 해체과정은 제임스 볼드윈James Baldwin, 아이작 줄리엔Isaac Julien, 코비나 머서Kobena Mercer, 리처드 다이어Richard Dyer, 에섹스 헴필Essex Hemphill, 그리고 프란츠 파농을 비롯한 이론가들 및 논평인들의 글에서 차용한 텍스트를이 사용되면서 전개된다. 이미지 아래 이중 행으로 위치한 텍스트 패널은 이 복잡한 사안의 논쟁기반을 묘사한다. 원래, 이 작업에서 라이곤의 관심사는 흑인 남성성을 더럽히는 것debasement과 백인들의 향유 사이의 관계뿐만은 아니었다. 라이곤은 우파 정치인들과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내뱉는 동성애혐오적인 비난과 이러한 비난이 게이 남성의 성적 주체성을 제한하는 것을 다루는 데에도 관심이 많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인종과 성 사이의 논쟁 많은 관계, 그리고 미국 담론 내에서 대중적인 민족지학적 대상으로서의 흑인 남성이라는 주제가 그의 분석의 핵심 요소로 거듭나게 되었다. 동시에, 저자권authorship의 문제 또한 블랙 북에서 메이플소프의 이미지들을 그대로 가져와 활용한 라이곤의 방식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여기서 저자권이라는 것에 대한 일반적인 문제들은 바드시 문화분석의 아카이브 방법론과 비교되어야 한다. 메이플소프의 스튜디오 사진이라는 보수적인 장르가 지녔다고 상정되는 아우라에 대한 믿음을 시험하면서 라이곤의 포스트모던적 전유 작업은 시들어가는 것이야 말로 바로 메이플소프의 흑인 남성성의 도상학 작업이 가진 아우라라고 제시하는데, 이는 벤야민의 노골적인 주장과 닮아있다.[각주:94] 라이곤은 메이플소프의 작업을 반대로 해석하고 삐딱하게 놓으며, 블랙 북을 아카이브 구금 상태archival remand로 던져넣는다.

  포스트모더니즘적 전유, 그리고 저자권과 아우라에 대한 비판을 둘러싼 사안들[각주:95]은 쉐리 레빈의 잘 알려진 독창성originality에 대한 모더니즘적인 신화에 대해 가하는 과감한 해체 작업에서 핵심적이다[각주:96]. 레빈의 많은 작업들은 유명한 남성 창작자들의 잘 알려진 작업들을 재가공한 것이다. 레빈의 워커 에반스 이후After Walker Evans (1981)의 경우 논쟁이 된 작업인데, 그 이유는 이 작업의 주요 개념적 전략이 그저 단순한 전유를 넘어서, 예술 작품의 진본성authenticity, 저자권 자체의 성질, 그리고 저작권의 보호대상 등의 개념을 대놓고 문제삼고 있기 때문이다. 레빈이 워커 에반스의 FSA 이미지들을 다시 촬영한 것은 의도적인 도발이라는 것이 인식되어야 한다. 이러한 도발은 두가지 층위에서 진행되는데, 하나는 직설적인 아카이브적 참조의 행위를 통해 닮음likeness과 유사성resemblance을 헷갈리게 하는 것[각주:97], 그리고 다른 보다 심오한 층위의 것이 바로 가난의 음울한 페티시화에 대한 분석에서 비롯하는 조용한 힘이다. 단 하나의 컷에서, 관객은 다큐멘터리 사진으로서의 에반스의 작업이 갖는 엄연한 민족지학적 소재가 암시하는 것들[각주:98]로부터 이를 아카이브적인 유물로서 대하는 레빈의 작업의 성질로 이르게 된다.

 

  즉, 에반스가 이 사진들을 찍은 사진가라고 할지라도, 그가 이 작업들을 있게 한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현상의 유일한 저자singular author는 아니라는 것이다. 소작농인들과 그들의 가족의 이미지가 담겨잇는 재현의 장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어떤 문화적인 세계관Weltanschauung이며, 이는 1930년의 미구 대공황 시절에 대한 아카이브 기억에 속해있다. 이러한 저자권과 아우라 사이의 긴장감, 그리고 이 둘 모두를 노골적으로 해체하는 레빈의 작업을 고려한다면, 하워드 싱어만Howard Singerman이 유일한 작업a singular work으로서, 즉 보여지는 대상으로서, 자신의 참조틀(, 워커 에반스의 작업)로부터 떨어져 나올 수 있는 대상으로서 워커 에반스 이후가 가진 저자적 그리고 아우라적 성격을 주장하는 것은 눈에 띈다. 싱어만은 레빈의 작업이 그저 단순히 전유인 것 혹은 유령 오브제a ghost object라는 의견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 작업을 작업방식으로만 환원시키려는 태도에 반해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이 작업은 보여지는, 즉 대상이며, 그것보다 더, 고려되어야 할 이미지라는 것이다.”[각주:99] 레빈의 아카이브 프로젝트에 대한 이러한 주장은 벤야민을 참조점으로 삼는 많은 주류 이론에 반하는 것이며, 또한 내 생각엔 레빈의 워커 에반스 이후를 아카이브 유물의 노골적인 생산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한 독창적인 방식이다.

 

  전유와 패러디라는 것은 아카이브를 활용할 때 중요한 장치들로서 등장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작업들과 그 작업들이 기반하고 있는 민족지학적 방법론들의 작동논리를 조명하는 것이다. 조이 레너드의 페이 리처드 사진 아카이브The Fae Richards Photo Archive는 매우 다른 방법론적 방식을 차용하는데, 주로 오브제, 스토리, 그리고 잃었거나 잊혀진 이야기들의 공간으로서의 아카이브를 패러디같은 방식으로 활용하는 것을 혼합한다. 이 작업은 축축한 지하실 안 트렁크 상자 속에서 곰팡이가 슬어가는 잊혀진 이야기들로 가득한 아카이브의 존재를 상상한다. 영화감독 셰릴 더니에Cheryl Dunye와 협업한 레너드는 아카이브적인 전략을 활용하여 가상의 흑인 할리우드 여배우 페이 리처드에 대한 대본을 쓰고 배우를 섭외하고 연출하고 연기한다. 설정상, 이 배우가 성취했던 것들은 미국의 문화적 망각의 구덩이로 잊혀져 버렸고, 이는 그의 흑인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 작업을 구성하는 78장의 이미지들을 통해 우리는 세밀하게 주석이 달린 리처드의 이야기를 추적하게 되고, 이는 그가 1920년대의 필라델피아에서 10대 시절이었던 사진부터 시작해서 순진한 여성 캐릭터로 황금기를 구가하던 1930년대와 40년대, 민권운동 시절인 1960년대, 그리고 1973년에 늙은 여성으로 등장하는 마지막 이미지로 이어진다.

  리처드는 형제자매, 연인, 친구 등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등장한다. 설정상 이 이미지들이 촬영되었을 의상, 스타일링, 조명, 사진 분위기, 그리고 스튜디오는 각 시대 고증에 알맞게 설계되었고, 이는 아카이브의 특정한 민족지학적 분위기에 맞추어졌다는 뜻도 된다. 각 이미지는 빈티지 타자기로 친 캡션이 달려있다. 종종 오타가 난 부분, 예를 들어 줄을 하나 빼먹었거나 글자 하나를 빼먹은 부분은 표시가 되어 있다. 손글씨로 쓴 이 표시들은 잃어버린 역사와 기억에 대한 이러한 어려운 주석 작업에 또 하나의 진본성의 결을 더한다. 일반적인 캡션에는 사진에 나오는 인물들을 모두 설명하는 자세한 주석이 쓰여져 있다. 예를 들어 4, 42, 43번이라고 식별되어 있는 일련의 사진들에서, 캡션이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맥스 헤츨Max Hetzl(무슈 맥스)이 촬영한 페이 리처드. 1938. 맥스는 실버스타 스튜디오의 정규직 사진가였고 페이의 친한 친구였다. 페이는 스튜디오의 사장 H.R. 랜신Ransin에게 자신이 여주인공 역할을 맡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비공식적으로 이 사진들을 찍었다. 스튜디오에서는 이 사진들이 공개되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이 사진들이 수박 여성‘the Watermelon Woman 이미지와 부딪힌다는 이유에서였다 [역주: 영화감독 셰릴 더니에가 매미mammy”로 알려진 흑인 하녀 여성 스테레오타입에 관한 동명의 영화(The Watermelon Woman)를 제작한 바 있는데, 수박은 흑인을 비하적으로 표현할 때 자주 사용되는 과일이다]. 랜신은 리처드에게 더 많은 금액으로 새 계약서를 제시했는데, 계약의 내용은 멜로드라마 남부극에서 매미mammy 역할을 맡는 것이었고, 리처드는 이를 거절했다.“ 39번과 40번 이미지의 캡션은 다음과 같다. ”영화 메리고라운드스크린테스트를 받고있는 페이 리처드(가운데). 영화는 영영 완성되지 못했다. 리처드에게 주인공 역할을 주라고 페이 리처드와 마사 페이지Martha Page가 압박하고 있던 상황에서, 대본에 젊은 보드빌 댄서 캐릭터에 대한 설정이 들어갔다. 윌라 클락Willa Clarke (페이의 오른쪽)이 페이의 댄스 파트너이자 보조로서 섭외됐다. 대본은 수많은 수정을 거쳤고, 제목도 그 부두마술로 바뀌었다. 페이의 역할은 비중이 좀 높은 카메오로 축소됐고, 카산드라 브룩Cassandra Brooke이 원래 페이를 위해 쓰였어야 할 주제곡을 부르는 동안, 페이는 몇가지 정글의상을 입고 춤추는 것이 전부였다. 영화 촬영 도중에 페이는 실버스타 스튜디오를 떠났고, 계약을 파기했고, 할리우드와의 연을 모두 끊어버렸는데, 여기에는 마사 페이지Martha Page와의 관계도 포함되어 있었다. 1938.“ 시대 고증preiod authenticity은 결과물인 사진을 고색古色patina (일부러 모퉁이를 낡게 하고 뜯고 삐죽삐죽하게 만들고, 금이 가게 하고, 반전反轉된 것처럼 보이도록 세피아 톤을 냄)처리함으로서 강화된다. 이러한 효과는 작업의 신빙성을 강화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됐지만, 이와 반대로 오히려 인위적인 성질을 강조할 뿐이다. 이는 레너드가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들의 목록을 관객에게 제공하고 있어서만은 아니다.

비반 순다람, 『 셰르 - 길 아카이브 』 The Sher-Gil Archive (1995-7)

  레너드의 작업에서 아카이브는 역사적 통일체 그리고 사회적 동일시화의 도구에 대한 패러디로 거듭나지만, 다른 작가의 작업에서는 멜랑콜리적 귀환의 형태로 활용되기도 한다. 비반 순다람Vivan Sundaram셰르-길 아카이브The Sher-Gil Archive(1995-7)에서의 이미지를 보면서 받는 인상이 분명 여기에 포함된다.[각주:100] 이 작업은 발견된 사진들의 부분들 그리고 가족 사진 앨범을 동시에 연상시킨다. 셰르-길 아카이브20세기 전후의 인도와 유럽에서의 순다람의 가족의 이야기를 세세하게 전달하며, 식민주의에서 탈식민주의로 이어지는 호를 그린다. 이 작업은 공적인 추모이자, 정체성 그리고 가족을 인종과 국적과 함께 잇는 연결고리의 의미에 대한 탐구이다. 이 이미지들은 가부장이자 작가의 할아버지, 산스크리트 학자인 움라오 싱 셰르-Umrao Singh Sher-Gil의 풍부한 사진 아카이브에서 갖고 온 것이다. 그는 오랜 시간동안 자신과 자신 가족의 사진을 찍어왔다. 이러한 아카이브적인 고찰, 그리고 기억보조적인 매개성을 구축하기 위해 모든 이미지들은 작가의 할아버지가 찍은 네거티브 필름과 사진에서 인화되었다. 순다람은 오래된 프레젠테이션 장치들을 사용한다. 상자, 서로 가까이 붙어 줄로 나열된 사진들, 그리고 네 개의 라이트박스lightbox에는 셰르-길 가문의 일원들이 담긴 사진이 각각 올려져 있다. 박스의 유리 덮개에는 이들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이 네명은 작가의 할아버지, 그리고 그의 헝가리인 부인이자 작가의 할머니인 마리 앙투와넷트, 이들의 두 딸 (나중에 파리에서 모더니즈 작가가 될 암리타 셰르 길Amrita Sher-Gil, 그리고 작가 비반의 어머니 인디라 순다람)이다. 이러한 연결지점들을 통해 아카이브는 상실과 욕망의 서사적 여정, 인도와 유럽 사이에서 방랑하며 겪는 우여곡절, 그리고 이 작업이 불러일으키는, 양면성으로 치장된 코스모폴리탄적인 쾌락을 펼친다. 순다람의 기억 작업은 또한 혼종의 인도 가족을 둘러싼 환경을 슬쩍 엿볼수 있게 해주는데, 이를 통해 아카이브는 진본성authenticity의 문제에 도전할 수 있게 되고, 이는 특히 아카이브가 인종, 민족, 국적 등의 개별 영역의 문제들을 분류하고 통합하는 방식을 따른다.

 

  앞서 우리는 아카이브의 다양한 조건들을 탐구하고, 특히 사진에 관한 것에 집중하였다. 대중매체라는 탐욕스러운 기계, 대중문화에서의 사진의 진부화, 그리고 감성 사진이라는 컬트로 인해 사진매체가 퇴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작업들은 작가들이 형성한 복잡한 관심사들, 그리고 이들이 활용한 증거, 그리고 기록의 양상으로서의 아카이브물들을 역사적 조건들에 대한 심오한 성찰로 변화시키는 개념적인 전략들을 디빈다. 리히터의 아틀라스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을 하면서 부클로는 작업에 영향을 끼치는 포스트휴머니즘적 그리고 포스트 부르주아 주체에 대해 이야기한다.[각주:101] 이러한 관찰은 아카이브 열풍이라는 이름 아래 모아진 작업들에게도 같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층위에서는, 두드러지는 인본주의적 사인들이 개별 작업에서 보여지는 분석들을 촉발하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인본주의적 그리고 포스트휴머니즘적 전통 사이에서 구축된 변증법은 모든 범위의 아카이브 생산, 즉 작가들이 생성해내는 분류법, 유형학, 그리고 인벤토리라는 문제를 훨씬 넘어서는 인식론적 맥락 속의 아카이브 생산을 자아낸다. 여기서 역사를 개인 행위자들이 행하는 일련의 사건들로서 이야기하는 것은 개별의 하지만 의존적인 사회적 틀 그리고 참여 행위자들의 무한성이 가진 동시성에 대한 강조에 의해 대체된다. 역사의 과정은 영속적으로 변화하는 상호작용과 치환작용의 구조적 체계로 재개념화 되는데, 여기서 상호작용과 치환작용은 경제적 그리고 생태학적으로 주어진 것들 사이에서, 계급 형성과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그리고 이로 인해 나타나는, 각 순간에 특정한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교류의 유형 사이의 것이다.“[각주:102] 아카이브 열풍속에서, 작가들은 기억의 역사적 행위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한편, 아카이브 또한 과거의 일이 번뜩이는 죽음, 파괴, 그리고 퇴보의 증기와 맞닿게 되는 장소로서 거듭난다. 하지만, 아카이브가 잃어버린 근원이 되고 기억이 잃어지는 동시대의 망각의 형태가 가지는 경향에 맞서, 아카이브 안에서도 기억과 재생의 행위가 일어나며, 여기서, 바로 사건과 이미지, 기록과 기념비 사이의 불분명한 영역에서, 과거과 현재 사이의 봉합이 일어난다.

 

2007125

  1. 1 [본문으로]
  2. 2 [본문으로]
  3. 3 [본문으로]
  4. 4 [본문으로]
  5. 5 [본문으로]
  6. 6 [본문으로]
  7. 7 [본문으로]
  8. 8 [본문으로]
  9. 9 [본문으로]
  10. 10 [본문으로]
  11. 11 [본문으로]
  12. 12 [본문으로]
  13. 13 [본문으로]
  14. 14 [본문으로]
  15. 15 [본문으로]
  16. 16 [본문으로]
  17. 17 [본문으로]
  18. 18 [본문으로]
  19. 19 [본문으로]
  20. 20 [본문으로]
  21. 21 [본문으로]
  22. 22 [본문으로]
  23. 23 [본문으로]
  24. 24 [본문으로]
  25. 25 [본문으로]
  26. 26 [본문으로]
  27. 27 [본문으로]
  28. 28 [본문으로]
  29. 29 [본문으로]
  30. 30 [본문으로]
  31. 31 [본문으로]
  32. 32 [본문으로]
  33. 33 [본문으로]
  34. 34 [본문으로]
  35. 35 [본문으로]
  36. 36 [본문으로]
  37. 37 [본문으로]
  38. 38 [본문으로]
  39. 39 [본문으로]
  40. 40 [본문으로]
  41. 41 [본문으로]
  42. 42 [본문으로]
  43. 43 [본문으로]
  44. 44 [본문으로]
  45. 45 [본문으로]
  46. 46 [본문으로]
  47. 47 [본문으로]
  48. 48 [본문으로]
  49. 49 [본문으로]
  50. 50 [본문으로]
  51. 51 [본문으로]
  52. 52 [본문으로]
  53. 53 [본문으로]
  54. 54 [본문으로]
  55. 55 [본문으로]
  56. 56 [본문으로]
  57. 57 [본문으로]
  58. 58 [본문으로]
  59. 59 [본문으로]
  60. 60 [본문으로]
  61. 61 [본문으로]
  62. 62 [본문으로]
  63. 63 [본문으로]
  64. 64 [본문으로]
  65. 65 [본문으로]
  66. 66 [본문으로]
  67. 67 [본문으로]
  68. 68 [본문으로]
  69. 69 [본문으로]
  70. 70 [본문으로]
  71. 71 [본문으로]
  72. 72 [본문으로]
  73. 73 [본문으로]
  74. 74 [본문으로]
  75. 75 [본문으로]
  76. 76 [본문으로]
  77. 77 [본문으로]
  78. 78 [본문으로]
  79. 79 [본문으로]
  80. 80 [본문으로]
  81. 81 [본문으로]
  82. 82 [본문으로]
  83. 86 [본문으로]
  84. 87 [본문으로]
  85. 88 [본문으로]
  86. 89 [본문으로]
  87. 90 [본문으로]
  88. 91 [본문으로]
  89. 92 [본문으로]
  90. 94 [본문으로]
  91. 95 [본문으로]
  92. 96 [본문으로]
  93. 97 [본문으로]
  94. 99 [본문으로]
  95. 100 [본문으로]
  96. 101 [본문으로]
  97. 102 [본문으로]
  98. 103 [본문으로]
  99. 104 [본문으로]
  100. 105 [본문으로]
  101. 106 [본문으로]
  102. 107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