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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색 열병 Yellow Fever 2018년 3월 14일, Grace M. Cho와 Hiji Nam 인터뷰


아시아계 스테레오타입의 하나로 굳어지게 된, 세계를 지배하려는 악역 캐릭터인 푸만추Fu Manchu 시리즈의 한 장면


원문: https://thenewinquiry.com/yellow-fever/


그레이스 초Grace M. Cho 는 스태튼 아일랜드의 뉴욕시립대에서 사회학, 인류학, 그리고 여성학과 조교수이며,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귀신: 수치심, 비밀, 그리고 잊혀진 전쟁Haunting the Korean Diaspora: Shame, Secrecy, and the Forgotten War> (미네소타대 출판사, 2008)의 저자이다. 픽션, 판타지, 민족학적 자전서술(autoethnography), 심리분석학, 그리고 역사학적 연구를 섞는 초의 책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게 성노동을 제공했던 백만명이 넘는 한국 여성들의 트라우마 기억을 파헤친다. 소위 “잊혀진 전쟁” 뒤에, 10만명이 넘는 여성들이 미군과 결혼하고 미국으로 건나가, 처음으로 규모있는 코리언 아메리칸 디아스포라를 형성한다. 이는 미국 신식민주의와 군사주의의 직접적인 결과다.


#미투의 후폭풍 속에서, 구조적인 성 권력 불평등에 조명하는 주류 미디어는 지속적으로 백인 여성 서사를 중심에 놓고 근대 미국 제국주의와 식민화된 주체들의 성노동의 유산을 대부분 무시한다. 미국과 한국 사이의 물리적 그리고 정신적 폭력의 억업된 역사를 추적하는 것은 한국전쟁의 여파와 한국 여성과 백인 남성 사이의 “궁합”에 관한 새로운 방식의 인식—그리고 기억—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 


>N(Hiji Nam): 인종적 성적 페티쉬라는 개념이 얼마나 문제적인가요? 이런 컨셉, 그리고 이걸 “페티쉬”라고 애초에 부르는 것이 어떻게 권력 역학과 역사들을 제대로 검증하지 않은 결과로 이어지는 건가요? 무언가를 “페티쉬”라고 지정하는 것이 그 자체로 인종차별적인가요?


>C (Grace M. Cho): 일단은 “페티쉬”라는 것은 인류학적 용어인데, 어떤 신비한 특성을 가진 대상을 가리키는 데 쓰여요. 카를 막스가 유명하게 상품을 페티쉬로 설명했고, 상품의 힘은 그 자체에 새겨진 사회적 관계들을 비가시화 하는 것이었죠. 그러니까 “아시아인에 대한 페티쉬”, 즉 성애화된 아시아 여성과 여성화된 아시아 남성의 상징적 재현물이라는 것이 그것에 스며든 식민지의 역사를 사라지게 만드는 힘이라고 생각할 수 있죠.


예를 들어서 미군이 일본과 한국에서 상업적?commercial 접근을 가질 수 있었던 역사, 혹은 미국 관광객들이 태국같은 곳에서 성매매를 할 수 있다는 것을 가지고, 이것을 그저 아시아계 여성에 대한 개인적 선호도로 환원시킬 수도 있죠. 아시아 여성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비아시아 남성들은 자신들의 연애사에서 이러한 지정학적 권력관계에 대해 의식하고 있지 않습니다. 매력을 느끼는 것, 그건 당연히 굉장히 주관적인 건데, 이런 주관적인 경험 속에서 사람들의 무의식은 역사적 찌꺼기에 의해 항상 영향을 받아요. 그리고 이러한 성적인 접촉을 애초에 가능하게 했던 더 큰 요소들에 대해서도 먼저 질문을 해야 하죠. 


굉장히 중립적으로 보이는 권력 력학, 그러니까 예를 들어 하버드의 두 대학원생, 한명은 한국계 미국인 여성이고 한명은 백인인 경우에도, 군사 제국으로서의 미국 역사로 인해 이 둘이 애초에 만날 수 있었던 것이죠. 왜냐하면 미국의 많은 코리언 디아스포라는 군부대 성노동자들이 미국 군인들과 결혼해서 건너오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다인종 연애관계에서 이러한 걸 사람들이 잘 보지 못해요. 특히 두 사람 모두 특정 형태의 특권이나 권력을 갖고 있는 경우에는 더더욱.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러한 역사적 흔적들을 보지 못하도록 자라왔다고 할 수 있죠. 


페티쉬라는 용어 자체가 인종차별주의적이냐고 물었던 질문이 꽤 흥미로운데요. 왜냐하면 인류학적 관점에서 볼 때, 그 단어는 식민지적 조우에서 비롯했기 때문이에요. 뼛속까지 유럽중심주의적인 단어고, 피부색이 검거나 갈색인 사람들의 영적이고 문화적인 믿음을 깔보는 단어였죠. 원주민들의 “페티쉬” 오브제 사용은 원시적인 것이라 여겨졌고, 이에 반해 유럽의 “종교적 상”의 사용은 완전 일반적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N: 인종적 페티쉬 개념이 백인성의 헤게모니에 기반해 있는 것 같은데요. “백인”으로부터 조금만 다른 것에 대해 페티시라고 여기니까요. 예를 들어 다른 백인 여성하고만 연애하는 백인은 특이하다고 여겨지지 않는데, 아시아계 여성하고만 연애하거나, 아시아계 여성하고 연애한 경험이 많은 백인 남자들은 (백인과 아시아계로부터) 페티쉬가 있다고 받아들여 지니까요. 


C: 유색인종인 사람들 사이에서도 인종적 페티쉬에 이야기하는 걸 듣기도 하는데요. 그런데 그런 게 오로지 차이만을 가리키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요. 성적 페티쉬에 대한 개념을 대중화 시킨것은 프로이트인 것 같은데, 프로이트에게는 이것이 성적 차이에 기반한 거였거든요. 남자아이의 거세 불안증에 관한. 자신의 어머니가 음경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 것에 따르는 트라우마에 대한 대응으로, 남자아이는 없는 남근을 대체할 대상을 페티쉬화 한다는 것. 아마 정신분석학적으로 보면 성적 페티쉬는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과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때 생겨나는 것일 텐데, 이렇게 보면 왜 “페티쉬” 용어가 다른 인종에 대한 욕망을 설명하는 것으로 쓰이는 지에 대한 이유일 수 있겠죠. 아니면, Nam이 말한 것처럼, 백인의 백인을 향한 욕망만이 페티쉬가 아닌 백인 헤게모니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고요. 


N: 그렇지만 페티쉬라는 용어에 대한 선별적 사용이 어떤 선호도는 일반적이고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것인 반면, 다른 선호도는 부적절하고, 격이 떨어지는 것이라고까지 치부되잖아요. 발 페티쉬와 아시아 페티쉬같이, 인종적 “페티쉬”를 좀 더 수치스러운 발 페티쉬와 같이 놓고 이야기하는 게 그 자체로 인종차별적이라고 느껴져요.


미국 백인 문화가 다른 문화를 도용하는 것이 특히 자주 있는 일인데, (티키 횃불이나, “부족민” 할로윈 코스튬이던가, 레게머리를 하는 백인이라던지…) 다른 이들이 백인 미국문화에 동화되는 건 도용하는 것이라고 보지 않잖아요. 여기도 백인성은 어떤 기준값, 다들 따라야 하는 규범이라고 암시되고 있는 거고, 나머지는 다 여기서 탈피한다는 거죠.


선생님 책에서 나오는 여성들에 대해서도 지금 생각하고 있는데요, 선생님의 어머니라던가, 제 어머니라던가… 미국으로 이주한 코리안 디아스포라 여성들은 주로 대부분이 백인들인 작은 도시에서 유일한 한국인이 되고, 그런 곳에서 미국 문화 (백인성과 등치되는)에 빠르게 동화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그리고 말 그대로 생존하기 위한 필수적인 일이 되잖아요. “아시아계 여성”을 한 분류법으로 이야기하는게 가능할까요? 특히 자신들의 역사, 문화, 그리고 미국과의 관계가 이렇게나 다 다를텐데?


C: 물론 “아시아계 여성”을 다같이 한데 묶고 이야기하는 것은 문제적이지만, 페티쉬가 환상에 기반한 것이라고 하면, 페티쉬화 되는 사람의 정확한 민족이나 출신 국가 같은 건 별로 중요하지 않게 돼요. 환상을 투사하기 위한 스크린이 되는 거죠. 사람들이 자신의 연애 대상의 민족에 대한 구체적인 선호도가 있다고 하는 걸 들은 적이 있는데, 그건 아마도 그 문화와 접촉이 있었던 경우일 수도 있고, 이전의 관계를 다시 재현하고 싶어서일수도 있고, 아니면 대중매체를 통해 형성한 내재된 환상에서 비롯한 것일 수도 있어요. 


N: 지리학적 범위나 용어 및 언어사용에 있어서, 이런 논의가 어떻게 맥락잡혀야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이런 질문들이 유럽이나 아시아나, 다른 지역에서 물어진다면 얼마나 다르게 물어질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이야기하는 내용들은 몇몇은 미국에 특정지워진 것이지만, 좀더 넓게 보면 이런 논의들은 다인종적이고 식민적, 신식민적 욕망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죠. 이런 논의를 메리 루이스 프랫Mary Louise Pratt의 접촉 구역Contact Zone이라는 개념에 의거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봐요. 즉, 사람들이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는, 하지만 비대칭적이고 때때로 폭력적인 권력 관계에서 탄생하는 공간 말이죠.


이러한 개념은 세계 어디서나 생각해 볼 수 있어요. 예를 들어서, 남한 남자와 태국 여성의 연애를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특히 태국 성매매에 남한 기업들이 투자한 이력이 있다는 걸 염두에 두고 말이죠. 아니면 국제결혼이나 미군기지 성노동자로 한국으로 이주한 필리핀 이주민 여성과 남한 남자사이의 관계는? 오늘날의 미군기지에서  성노동에 종사하는 한국인 여성들은 매우 적거든요.


오늘날의 다문화 사회에서, 사람들은 다양성에 대해 찬미하고 싶어하지만, 애초에 이러한 다문화적인 사회를 가능하게 한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폭력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N: 주로 미국에 자란 한국계 여성으로서, 한국문화의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인 요소들을 멀찍이서 지켜보게 되고, 그럼으로 인해 한국계 남자들과 연애하는 것을 꺼리게 되었거든요. 그게 정당하지 않을지라도… 


C: 저도 다른 한국계 미국인 여성들로부터 이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특히, 자기는 자신의 아버지가 어머니를 학대한 것을 보았기 때문에 한국계 남성들과 연애할 수 없다고 한 대학원 친구가 기억나요. 여기에 제 대답은, 미국 백인 아버지와 자라본 사람으로서, 저는 백인 남자와 연애하는 것을 꺼린다고 했죠. 물론 그 친구가 경험한 물리적 가정폭력의 수위가 제 집에서는 그정도는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 아버지는 어머니가 갖지 못했던 제도적 권력을 갖고 있었고, 제가 성인이 되면서 제 어머니가 고통받은 구조적 폭력에 아버지가 얼마나 공모하고 있었나를 이해하게 되었어요. 


N: 또 우리는 오늘날의 백인남성-아시아계 여성 커플 관계에서의 아시아계/한국계 여성들의 주체성에 대해서도 고려해야 되잖아요. 이걸 백인 남자의 의지만으로 환원시키는 건 틀렸을 뿐더러 정당하지 않죠. 이런 커플관계에서 한국계 아시아계 여성이 백인 남자를 욕망하는 비율은 어느 정도일까요? 아니면 백인보다 모자라다고 느껴지는 아시아인이나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자기혐오인가요?


C: 당연히, 아시아계 여성들이 백인 남자들의 피해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틀렸고 환원주의적이죠. 우리도 욕망하는 주체이고, 몇몇 아시아계 여성들은 백인 남자를, 수많은 이유에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선호합니다. 그 이유 중 몇몇은 Nam이 언급했던 거에요. 자신 부모님의 가부장적 문화를 거부하고 싶은 것에서, 혹은 백인처럼 되고 싶은 것에서 비롯하는. 서구가 더 우월하고, 강하고, 더 교양있고, 더 진보적인 것으로 위치시키고 나머지 세계는 퇴행적이고, 여성화되었고, 구출되어야 하는 것으로 위치시켰던 역사적 유산을 상징하는 것이죠. 가야트리 스피박의 말이 생각나네요. “갈색 남자들로부터 갈색 여자를 구원하는 백인 남자.” 아시아계 여성들도 이러한 식민자의 논리를 내재화한 거죠. 


한국의 미군 성매매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저는 미군과 결혼한 많은 여성들이 단순히 절박함에서 그런 선택을 한 게 아니라, 욕망에 의해서도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욕망의 대상이 필연적으로 남자이지는 않았겠죠. 그와 결혼해서 미국으로 간다는 것이 상징했던 어떤 기회일 수도 있어요. 이것은 주체적인 행위인가? 네, 그렇습니다. 이것이 이 여성들이 구조적 폭력의 피해자가 아니라는 뜻인가? 아니요. 두 경우는 서로 상호배제적이지 않습니다. 사바 마무드Saba Mahmood 말처럼, 주체성은 “복종의 구체적인 관계들이 만들어내고 가능하게 하는, 행위 능력”입니다. 


그리고 또한 백인남성-아시아계 여성 커플에서 둘 중 누구를 페티시나 어떠한 패턴으로 인해 생긴 관계라고 보는 것에 대해 주의하라고 이야기해주고 싶네요. 중점은 개인 선택보다는 구조, 역사, 그리고 무의식적 요소들, 즉 이러한 특정 개인 선택들을 애초에 가능하게 했던 요소들에 두어야 한다는 거죠. 우리 사회가 어떻게 분리되어 있는지 자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방식으로 인해 백인들과 아시아계는 학교와 직장과 같은 사회적 공간에서 자주 마주칠 수 있게 되거든요.


이러한 지점은 지금 다루기에 시간이 모자라지만 언급해 볼 가치가 있는 다른 질문들을 상기시키죠. 왜 아시아계는 주로 백인들과 같이 엮이게 될까? 왜 흑인-백인이나 흑인-아시아계가 아닐까? 여기서 아시아계 남성의 위치는 도대체 어떻게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여태껏 이야기하고 있었던 바로 그 식민지적 요소들이야말로 아시아계 여성들을 과성애함과 동시에 아시아 남성들을 무성애화 하는 같은 요소입니다.


N: 물론요. 아시아 여성들의 성애화는 아시아 남성들의 반성애화로부터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처럼 느껴져요.


C: 식민화 되거나 점령된 국가는 항상 여성화되고, 이는 아시아 남성에 대한 일종의 상징적 거세에요. 과거 한국의 여성들 중 미군을 위한 성노동자 여성은 너무나 많았고, 남한의 군대는 미군에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남성성이 위협받는다는 감각이 훨씬 강조되었었죠. 이것이 미군기지 주변에서 일했던 한국 여성에 대한 남한의 국가적 혐오의 이유 중 하나라고 제가 제 작업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N: <유령에 대한 단상Notes on the Phantom> 에서 니콜라스 에이브러햄은 트라우마적 상실, 소위 “유령”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의 트라우마에 의해 생산된다기보다는 그 트라우마가 감춰지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생긴다고 서술하는데, 선생님도 자신의 저서에서 이 개념을 확장하고 있죠. 거기에서 선생님은 “동화될 수 없는 트라우마”, “서사화될 수 없는 것”, 그리고 선생님이 명명하시는 “디아스포라적 비전” 등을 풀어내는 글쓰기를 전개시키려고 여러가지 형식을 차용하고 계시는데요. 트라우마처럼, 인종적 성적 욕망도 어떤 직선적인 합리화가 힘든 것 같아요.


C: 욕망이라는 것은 분명히 비이성적인 것이고, 허상같은 것이죠. 아까 인용한 문구에서, 에이브러햄은 트라우마가 어떻게 무의식에, 신체에, 그리고 이성을 교란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인종적 페티쉬를 역사적 트라우마에 기인한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 본다면, 우리는 욕망과 트라우마가 합쳐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고, 두배로 교란하게 되는 것이죠.


N: 설명하기에 필요한 언어가 부족한 개념들을 탐구하려거나, 학구사회의 제약 내에서 그런 주제를 탐구하려면 아무래도 힘드실 거 같은데요. 선생님이 예술 활동을 하시는 것이 학술적 접근의 한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나요?


C: 그럼요, 물론. 아이러니하게도 예술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처음 찾은 건 학구사회 내, 즉 제가 사회학과 대학원생이었을 때였으니까요. 제 지도교수 패트리샤 클러프Patricia Clough와 함께 트라우마와 무의식을 공부했고, 교수님은 제 글쓰기와 연구 형식을 실험해보라고 응원해 주셨어요. 제게는 트라우마 연구는 정말 퍼포먼스나 문예창작에 더 가까운 것이, 바로 설명될 수 없지만 감각될 수 있는 것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것을 학술적 연구와 합치게 되었고요. 예술 또한 학술적 글쓰기가 해내지 못하는 것을 관객과 소통할 수 있게끔 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