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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트 슈나이더Arnd Schneider 확장된 시각들: 인류학적 연구와 실험영화를 통한 재현 재고 "Expanded Visions: Rethinking Anthropological Research and Representation through Experimental Film" (2011)

Schneider_Expanded_vision_201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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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 Ingold, Redrawing Anthropology: Lines, Materials, Movements (2011)에 수록된 Arnd Scheneider의 논문을 일부분 번역한 것입니다.

 

서론

이 장에서 나는 실험영화 창작의 실천들에 대한 비판적 리뷰를 제공하고 이 실천들이 인류학적 연구와 재현에 관해 시사할 수 있는 중요성에 대해 탐구한다. "몽타쥬라는 영화적 은유"라는 것은 민족지학적 기술 (Marcus 1995), 시각인류학과 민족지학적 영화 (Grimshaw 2001), 그리고 현상학에 영향받은 민족지학적 연구 (Willerslev and Ulturgasheva 2006)와 관련해 널리 논의되었다. 이에 반해, 실험영화, 특히 1970년대의 소위 "구조주의" 혹은 "유물론주의"materialist 영화[각주:1]라고 불리우는 것들은 시각 인식작용visual perception과 이에 수반되는 재현의 조건들에 관한 "물리적"material인 과정들에 대해 근본적으로 문제삼음으로써 보다 더 급진적인 과제들을 던졌다. 아날로그이며 셀룰로이드에 찍인, 즉 디지털화 이전 시대의 실험영화의 경우, 영화제작 과정 그 자체의 물리적 조건들을 반영하는 비서사적인 소재content, 그리고 핵심적으로 이와 관련된 장치apparatus (필름이라는 재료, 카메라, 영사기, 스크린)를 주로 다뤘고, 이는 시청자로 하여금 영화적 과정과 물리적 구체성의 인위성artificiality에 대해 인지하도록 만들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조성적인conditioning 특징들은 이 재료는 감광유제emulsion를 바르는 화학적 과정을 거쳐 빛에 반응하게 되는 셀룰로이드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세테이트acetate라고도 불리는 트리아세틸 셀룰로오스 플라스틱 기반) 재료, 초당 24개의 이미지로 구성되는 비율, 그리고 (서사영화에서는) 단일 스크린과 습관적이고 환영적인 "실제" 시간의 압축을 포함한다. 

  이러한 종류의 것들은 처음에 실험적이었지만 이제는 주류 극영화(혹은 실험영화 작가들이 '환영주의' 영화illusionist cinema라고 부르는)의 하나의 특징이 되어버린 "몽타주"에 대한 인류학적 재고와 평행을 이룬다. 나는 인류학에 있어서 실험적 영화창작이 갖는 개념적, 이론적인 잠재력과 과제들을 탐구할 것이다. 나의 주요 관심사는 시각과 좀더 일반적인 의미에서 지각perception에 관해 널리 퍼진 일반적인 가정들을 문제삼는 행위에 깃든 이론적 잠재력들을 탐구하는 것이다. 이것 말고도 물론 실험적 영화창작을 비판적으로 리뷰함으로써 얻어지는, 인류학적 영화창작을 위한 실용적 시사점들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리뷰는 이번 논의의 범위에서 벗어난다. 나의 목적은 실험영화나 이와 비슷한 예술계 내에서의 실험들의 미학적 메리트를 판단하는데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싶다. 나의 목적은 단지 인류학적 연구와 재현에 대해 환기해줄 수 있는 장치로서의 실험영화 창작이 가진 잠재성을 탐구하려는 것 뿐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리뷰는 반성의 기조에서 나오는 것이며, 어떠한 특정 관점을 뒷받침하기 위한 결정적인 증거로서가 아니다. 후술할 내용은 매우 선별적이고 노골적으로 인류학적인 관점에서 쓰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험영화 창작자들이 인류학으로부터 무엇을 가져갈 수 있는가에 대해 내가 이야기할 것에는, 분명 배울 지점이 있을 것이다. 

 

아나벨 니콜슨의 DRUM SLIDES (1971) 일부분.

 

실험영화: 근본적인 문제들

실험영화 작가들은, 영화가 "외부"exterior 세계를 사실주의적realist이고 실사적verisimilar인 방식으로 재현할 수 있다는 가정을 근본적으로 문제삼는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그들은 영화제작 과정의 물리적 조건들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과 성찰을 통해 발현된다. 그들은 영화제작의 물리적 장치들 자체를 매체로서 사용하며, 이러한 물리적 장치들은 셀룰로이드, 스프라켓, 필름 릴의 길이와 규격, 카메라와 영사기의 구체적인 광학적 매커니즘, 다중영사의 가능성, 촬영 중에 카메라가 내는 소리, 그리고 영사중에 영사기가 내는 소리들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작업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의식적으로 그리고 물리적으로 필름이 말 그대로 매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만들며, 우리 사이, 즉 우리의 감각, 지각과 재현 사이에 끼어드는 것이라고 인식하게 한다. 영화적 과정의 인위적 성격은 물질적 오브제로서 영화를 가공하는 실험영화 작가들의 방식에 의해 명료하게 드러난다. 카메라 없이 만들어진 영화에서 이러한 가공기술들은 긁기, 셀룰로이드 위에 그림그리기 (이는 주류 애니메이션에서도 사용되는 기술이다[각주:2]), 필름을 바느질로 이어붙이기 (아나벨 니콜슨Annabel Nicolson의 영화를 예로 들 수 있다) 등을 포함한다. 니키 햄린Nicky Hamlyn의 개요(2003, 31쪽)를 따라서 우리는 실험의 중요한 역사적 사례들, 즉 만 레이Man Ray의 카메라 없이 물체들을 인화지에 그대로 대고 빛에 노출시켜 만들어진 Rayogram이나 Rayograph, 그리고 영화 Le Retour á la Raison (1913), 스탠 브라키지Stan Brakhage가 손으로 만든 영화들, 폴 섀릿츠Paul Sharits가 셔터 없는 영사기를 위해 만든 영화들, 음화 필름negative film, 알맞은 각도로 이어붙여진 짧은 16mm 필름들로 구성된 아흐메트 쿠트Ahmet Kut의 필름 조각상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마지막 사례의 경우, 필름은 더이상 영사될 수 없고, 자신 너머의 현실의 이미지들을 자아낼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해 버림으로써 그 자체로 물리적 물체가 되어버렸다.

스탠 브라키지, Mothlight (1963)

 

  그러므로 실험영화 작가들은 이미지 기술을 변형하고 전복시킬수 있는 가능성들을 연다. 이는 "장치의 일부분, 즉 예를 들어 필름 카메라가 제외될 수 있고, 프로덕션 과정도 우회될 수 있을 정도까지 밀어부쳐진다. 기술적 절차는 영화의 언어를 확장하고 이미 존재하는 언어에 질문하기 위해 욕보여진다." (Hamlyn 2003, 31쪽) 다르게 말해서, 실험영화는 프로덕션 과정에서 거의 의례와도 같은 기술적 루틴(Tomas 1992[각주:3]들과 결별하고 영화 프로덕션에서 사용되는 기술적 장치들을 낯설게 만든다. (Stallschuss 2010, 6쪽) 이러한 급진성, 혹은 외곬수적인 성격으로 인해 이 작업들은 "현상유지status quo에 대한 암묵적인 비판을 구성한다. 여기에는 중요한 민주화적인 충동이 있다. 예술가들은 사회에 부여된 상업적 기술을 빼내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변형시킨다. 이로 인해, 예를 들어 TV는 이미지를 실어나르는 장치가 아니라, 특별한 종류의 광원light source이 된다." (Hamlyn 2003, 31쪽) 

만 레이, Le retour á la raison (1923)

 

  이러한 구체적인 기술과 탐구를 통해 실험영화 제작자들과 시각 및 지각에 대해 실험하는 예술가들은 (예를 들어, Curiger 2006 참조) "일반적으로 맨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여주는 베르토프적 전통"에 입각해 있다. (Hamlyn 2003, 60쪽) 소비에트 다큐멘터리 선구자인 찌가 베르토프Dziga Vertev에게 있어, 카메라의 활용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 영화와 관련된 모든 기술들)은 인간 시각의 확장을 수반한다. 그가 "키노-아이Kino-eye"라고 명명한 것은 인간의 시각능력 너머의, 그 어떤 형태의 시간적 질서 혹은 속도 속에서 이루어지는 생명 과정들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했다. (본 단행본 속 Ravets의 챕터 162쪽 참조) 베르토프에 의하면, 키노-아이란, "가능한 모든 종류의 촬영 기술을 활용한다. 가속, 현미경, 되감기, 애니메이션, 카메라 움직임, 가장 예상치 못한 단축화 활용... 키노-아이는 몽타쥬의 가능한 모든 수단을 활용한다. 세계의 모든 지점들을 그 어느 시간적 질서에 의해서건 비교하고 이어붙이며 필요할 땐 영화를 구성하는 모든 법칙과 규범들을 부순다. (Vertov 1984, 88쪽)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기"라는 소재는 인류학에 있어 생소한 것이 아니며, 민족지학적 연구에서 즉각적으로 가시적이지 않거나 지각적으로 인식되지 않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볼 때 유용하다. 여기에 음성적 환각negative hallucination (정신분석학 용어) 또한 생각해 볼 수 있다. 음성적 환각이란 가시적인 것을 지각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Batchelor 2000, 12쪽) 다시 말해, 이는 다양한 민족지학적 현장 상황에 적용될 수 있다. 문자 그대로 우리가 최초 대면에서 보이지 않는것에 대해서건, 혹은 좀 더 추상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건 말이다. 

찌가 베르토프, 카메라를 든 남자 (1929)

 

경험된 시간과 시각적 효과들

몇가지 영화 실험들은 여기서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햄린Hamlyn (2003)에 의하면, 경험된 시간experienced time으로서의 영화가 아닌 물체material object로서의 영화에 대해 성찰하는 실험들이 있다. 체험된 시간이란 영화애호가들에게 익숙한 개념이다. 이들은 영화가 영사될 때 경험하는 시간이 바깥의 "실제" 세계에서 경험하는 시간(혹은 시간의 한 부분, 즉 주인공의 삶의 시간이나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의 연속)과 같거나 비슷하다고 가정한다. 일반적인 영화의 길이를 생각해 보면 (90-120분) 이러한 가정은 물론 틀렸다. 그러나 영사기 조작자들은 관람객보다 영화에 대한 훨씬 높은 물리적 직관을 갖고 있고, 이 길이에 대한 보다 현실적인 감각을 갖고 있다. 매일 영화를 물리적인 물건, 즉 필름 릴, 불에 타기 쉬운 니트로 셀룰로오스 필름, 그리고 영화 상영 시 검열, 지역 광고주 등에 의해 붙여지는 문구들 등으로서 대하기 때문이다. 우린 아직 영화 영사기 조작자들에 관한 민족지학적 혹은 민속역사학적 연구를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다. 그래도 영화 아카이비스트에 관한 연구는 하나 나와있다 (Gracy 2007). 허나 이 주제는 주세페 토르나토레의 <시네마 천국Cinema Paradiso> 등의 장편 영화에서 다뤄진 바 있다. 이 영화는 영화감독의 어린 시절과 작은 시실리의 한 마을에서의 영사기 조작자와 어린이었던 감독 사이의 우정 이야기를 다룬다. 

  실험영화는 영화가 무엇인지 그리고 영화가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탐구하기도 한다. 장편극영화는 장편극영화가 무엇인지, 즉 전달되는 주제 혹은 이야기에 관한 것이다. (Hamlyn 2003, 60쪽) 실험영화는 이에 반해 나레이션(환영주의적이라는 것을 근거로) 은 물론 모방도 거부하고 외부 세계를 그것의 재현에 동화하는 것(이는 픽션 영화와 다큐멘터리 영화 모두가 기반해 있는 사실주의적 전통의 중요한 요소이다) 또한 거부한다. 실험영화는 시청자들에게 영화가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관한 것이며, 여기서 만들어지는 시각적 효과optical effects에 관한 것이고, 영화 장치에 대해 근본적으로 물어지는 질문들에 관한 것이다. (마치 추상화에서 형식이 소재가 되는 것처럼) 예를 들어, 영화작가 폴 샤릿츠는 아크릴판 사이에 필름을 껴넣고 이를 영사기에 돌렸다. 시청자들은 양면으로 이것을 볼 수 있게 되고, 이를 통해 이게 무엇인가 뿐만 아니라 영사과정을 통해 어떤 효과가 나오는지도 보게 되었다. 

토니 콘라드, The Flicker (1966) 일부분

 

  표면적이고 비활성화된, 즉 서사 픽션, 다큐멘터리 영화를 기대하도록 문화적으로 훈련된 우리의 눈에 도전함으로써, 실험영화는 고집스럽게 영화적 이미지 구성에 깃든 시각 인지작용 과정들을 인위적으로 가시화한다. 이렇게 가시화된 과정 중 일부는 영화 프로덕션의 매우 초기 단계나 사진과 영화가 나오기 전의 동영상 장치moving image devices (마법의 랜턴과 같은) 속에서밖에 볼 수 없는 것들이다. 이러한 실험의 한 분야 중에는 동영상을 볼 때 시각의 잔상persistence of vision을 보여주는 것들이 있다. 잔상afterimage은 망막에 약 1/25초동안 남는다. 이러한 효과는 플리커 영화 (flicker film)이라는 장르에서 탐구되는데, 이 장르의 가장 단적이고 순수한 버전이 교차적으로 나열된 까만 그리고 하얀 프레임이라고 볼 수 있으며 (위 Figure 12.1 참조)[각주:4]이 중 하나의 예가 바로 토니 콘라드Tony Condrad의 <더 플리커The Flicker> (1966)이다. 같은 해에 만들어진 폴 샤릿츠의 Movie/Flux Film 29 역시 비슷한 규칙을 따른다. 초당 24개의 개별 프레임으로 짜여진 이 영화를 볼 때 시각은 프레임 사이사이를 연결하고 연속성을 인식한다. 햄린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샤릿츠의 영화에서, 시각의 잔상은 하나의 프레임과 다음 프레임 사이의 충돌을 생성한다. 망막에서 하나의 프레임은 다음 프레임 위에 덧씌워진다. 그러므로 시각은 프레임을 뒤섞고 또다른 층위의 시각적 현상을 생성한다. 보색으로 이루어진 잔상들, 프레임 이중상frame ghosting과 파동, 뒤섞이는 색과 다양한 강도의 플리커 효과 등. 어떻게 보면 모든 영화는 관람자의 머릿속에서 구성된다. 하지만 샤릿츠의 영화에서는 관람객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영화이고 스크린에 나타나는 것은 그저 프레임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관람객이 이 프레임들을 각각 별개의 컬러 사각형이라고밖에 볼 수 없을 때, 경험이라는 것은 아주 크게 축소된다." (Hamlyn 2003, 59쪽)

"관람객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영화"라는 관찰은 민족지학적 환경에서 의식 혹은 기타 시간적으로 형성된 활동들을 관찰하고 참여할 때 일어나는 것에 적용해 볼 수 있다. 분명 "구도적인 차원"compositional dimensions, 즉 특정한 의도성들을 조성하는 차원에서 이러한 활동에 참여하는 이들이 지각하는 것에 적용해 볼 수 있는 것이다. 

폴 샤릿츠, T,O,U,C,H,I,N,G (1968) 일부분

  이러한 프레임 시퀀싱[각주:5]에 관한 연구에서 밝혀진 또다른 중요한 실험영화의 목표는 반복이라는 개념과 씨름하는 것이었다. 또 보여지고 또 보여지는 똑같은 시퀀스가 매번 존재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동일하지는 않다. 피터 지달Peter Gidal의 영화에 대해 햄린은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지달의 영화에서(역주)] 반복이 존재할 때, 이는 두가지 방법으로 완성된다. 하나는 프린팅을 통해 반복되는 것이 아주 동일하게 반복되는 것이다. 이는 똑같은 것을 다시 볼 때 그것이 처음 볼 때와 얼마나 다른지, 그리고 그것을 재차 세번째, 네번째 볼때 어떤 새로운 경험과 지식을 생산하는지를 조명하기 위해서다. 두번째로, 수동적으로 반복된 카메라 움직임이 있을 때, 이 움직임들은 똑같은 피사체를 두고 여러번 일어난다. 이 피사체를 향한 우리의 지각이 소진되고 불필요할 정도로, 하지만 어떠한 추상적인 리듬감이 생기기 전 단계까지 말이다. [지달의 영화에서는 이러한(역주)] 리듬감이 형성되려는 그 순간에, 또다른 새로운 [카메라] 움직임의 패턴으로 갑작스런 전환이 일어난다. (Hamlyn 2003, 93쪽)

대상을 두번 세번 몇번씩이나 보게 되는것은 우리가 인류학에서 경험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보다 활발하게 성찰해보고 우리의 연구에 접목시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동일하고 반복적으로 보이는 행동들, 즉 어떤 의식ritual에서 행해지는 행동들을 관찰하고 분석할 때 말이다. 여기에는 분석에 활용할 수 있을 두가지의 여지가 있다. 첫번째로, 민족지학적 영화에서 똑같은 반복이라는 것에 상응하는 요소들이 존재한다고 할 때 (하나의 확장된 예시로써 티모시 애쉬Timothy Asch의 1975년작 <소싸움Ax Fight>을 들어볼 수 있다. 여기서 똑같은 시퀀스가 처음에는 코멘터리 없이 보여지고, 두번째에서는 슬로우 모션과 함께 코멘터리가 붙여져 등장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의식에서 반복되는 행동들, 즉 의식 참여자들이 동일하다고 여기지만 엄격한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은 행동들에 대해서다.

 

단일 카메라와 복수의 관찰자

실험영화에 있어 특히 흥미로운 지점은 단일 카메라 녹화와 단일스크린 영사라는, 주류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여기에는 "시각인류학"의 미명하에 만들어지는 영화들 또한 포함된다)의 지배적인 형식에 대한 문제제기에 있다. 단일 카메라 녹화(그리고 한명의 민족지학자 라는 것의 문제)의 문제점 중 하나는 누군가가 여기저기 움직이고 있다고 가정할 때, 이 사람은 어느 순간이 되었건 그 현장에서 하나의 위치만을 잡을 수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현장"field이란, 외부의 시각적 현실external visual reality 혹은 민족지학적 상황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용한것은 실험영화 작가이자 이론가인 말콤 르 그라이스Malcolm Le Grice의 작업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는 단일 시점 적용의 문제를 가시화하고 문제시했을 뿐 아니라, 네 개의 보충적인 시점을 동시에 포함시킴으로서 이를 극복해보려고 했다. 햄린이 이 영화에 대해 길게 서술한 것은 여기 인용가치가 있다. 

말콤 르 그라이스의 4 스크린 영화 <마네 이후After Manet>는 복수의 시점이 하나의 스크린에 영사될 때 문제화하는 작업의 좋은 예시이다. 이 영화에는 서사 혹은 다큐멘터리 공간의 생성이 전무하다. 필름 컷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엔 네개의 카메라와 네개의 시점이 존재할 뿐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영화의 네 개의 서로 다른 시점이 동시에 네 개의 맞닿아 있는 스크린에서 보여지면서, 3차원이 2차원으로 수렴되는 것에 대한 문제가 조명된다. 영화는 네 개의 카메라가 삼각대에 고정된 상태로 시작하며, 영화의 주제인 피크닉 장면을 담는 방식에서 네 개의 시선이 하나의 단일한 이미지를 구성하듯 위치지어져 있다. 카메라는 모조리 동시에 촬영을 시작하고 처음엔 카메라 움직임이 없다. 넓게 촬영된 체계, 규칙들, 미리 나열된 그리고 컬러, 흑백, 네거티브와 파지티브의 시퀀스가 보인다. 각 카메라는 100피트 길이의 16미리 필름이 넣어져 있었고 이 필름들은 테이프로 이어붙여져, 사용될 순서에 따라 나열되어 있었다. 각 카메라의 촬영자들은 이윽고 장면을 탐구하기 시작하며, 피크닉, 그리고 서로를 촬영하기 시작한다. 뒤이어 그들은 주변 풍경을 촬영하기도 한다. 각 카메라는 이 네명의 인물들에게 속해져 있고, 그러므로 만약 세명의 사람이 한 장면에 다 나온다면, 이것은 한명의 카메라만이 움직이고 있고 나머지 세 카메라는 움직이고 있지 않다는 얘기다. (Figure 12.2참조). 모든 카메라가 움직일 때 (예를 들어 핸드헬드일때) 네명의 촬영자 모두 서로의 시야 안에 있을 수 있다. 네게티브 (흑백이든 컬러든)는 다른 카메라들이 장면에 같이 담길때만 쓰여진다. 이 경우 절대 "자연적으로 보이는" 포지티브 이미지로 담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네거티브 이미지는 정확하게 다른 카메라를 포착하는 확인의 행위(이는 완전하고 결정적인 시점을 암시한다)를 음화negate한다.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이러한 결정적이고 완전한 시점은 물론 이를 가리키는 보다 일반적인 개념을 끊임없이 전치시킨다displace. 서로를 촬영하는 네 개의 카메라들이 잠재적으로 암시하는 은둔적인 자급자족성은 영화 마지막에 드러나는데, 이때 이들은 서로에게서 시선을 돌려 360도 각도 시점으로 바깥을 향한다. 이 순간은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 즉 네 대의 카메라가 동일한 각도와 시점을 공유했을 때와는 최대치의 대비를 이루도록 구성된다. (Hamlyn 2003, 103-4쪽)

말콤 르 그라이스, After Manet 의 한 장면

  현장 촬영이나 필드워크에서의 필기 내용을 편집 없이 한다는 것(영화에서 "컷"없이 작업한다는 것과 비슷)을 상상하기는 어렵겠지만, 분명 다양한 시점을 접목하는 것을 두고 실험하는 르 그라이스의 작업방식을 인류학에서의 접근법과 비교해 보는 것은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그레고리 베잇슨Gregory Bateson이 Naven에서 (Bateson 1936, Marcus 1985) 상이한 인식론적 관점들을 개요하는 실험적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좀 더 실용적인 방식으로는 마르셀 그리올Marcel Griaule이 제시하는 전방위적 민족지학지panoptic ethnography가 있다. 그의 1957년 저작 Méthode de l'ethnographie를 요약하면서 제임스 클리포드는 도곤족의 장례식을 그리올이 어떻게 기록하려고 했는지를 설명한다.

그리올은 행위의 장의 지도, 그리고 그것을 기록하기 위한 전략들을 제공한다. 이는 마치 오늘날의 TV 촬영팀이 미국의 정치 회담을 리포트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관찰자 1은 마을 광장에서 멀지 않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사진을 찍으면서 의식에서 일어나는 큰 스케일의 움직임을 관찰한다. 관찰자 2는 생리중인 여성들과 함께 위치한다. 관찰자 3은 횃불을 들고 있는 사람들과 섞여 들어간다. 관찰자 4는 악사musicians들을 관찰한다. 관찰자 5는 감시를 맡다가, 관찰자 6과 함께 주로 죽은 이의 집으로 들어가 가장 최신 뉴스거리를 찾는다. 관찰자 7은 의식의 중앙 무대에서 치뤄지는 가면 무도와 결투를 보고있는 여성과 아이들의 반응을 관찰한다. 모든 관찰자들은 자신들의 관찰이 이루어지는 정확한 시간대를 기록하여, 의식의 종합적인 그림이 구성될 수 있도록 한다. (Clifford 1988, 70-1쪽)

이러한 기획을 직접적으로 접목시키는 행위는 분명 그 전방위성을 성취하려는 시도 때문에 문제적으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핸드폰, 노트북 등의 보다 더 최근의 인터랙티브 하이퍼 미디어 테크놀로지로 인해 지금은 필드워크를 행하는 자와 지역민들 사이의 시공간적 제약, 혹은 필드워크 팀 구성원들 사이의 시공간적 제약을 극복하는 것이 가능하다. 허나, 전방위적 인류학은 이상향적 요구로서 남을 것이고, 이렇게 남아야 할 것이다. 푸코가 간수들로 하여금 모든 수감자들을 완전히 컨트롤하기 위한 팬옵티콘으로 규정되는 근대 감옥의 건축학적 역사와 연결시킨, 모든것을 알아내고 모든 것을 아우르는 전체주의적 시점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세르게이 아이젠슈타인, October (1927) 일부분

  앞서 언급했듯, 인류학자들은 몽타쥬의 개념에 대해 성찰한 바 있다. Rane Willerslew와 Olga Ulturgasheva(2006)는 세르게이 아이젠슈타인Seigei Eisenstein의 "지성적 몽타쥬"intellectual montage개념을 과거와 오늘날의 시베리아 모피시장을 묘사하고 분석하는데 창의적으로 활용하였으며, 이는 대비되고 상반되는 관점들의 앙상블로서 나타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모피 시장을 규정하는 "관점의 복수성"에 대해 우리는 인식하는 바이지만, 동시에 우리는 이 모든 관점들을 동시에 상정하는 것의 불가능성 또한 인식하고 있다. 소비에트의 몽타주 이론가들은 가능한한 모든 각도와 거리에서 찍힌 필름을 이어붙이는 식으로 이러한 "초시각"supervision을 지향했다. 그들은 또한 다양한 몽타주 기법들을 활용해 내재적인 시공간적 연결성이 서로 없는 요소들을 종합해 내려고 도력했다. (Willerslew and Ulturgasheva 2006, 98쪽)

허나, 바로 이러한 "내재적 시공간적" 연결성이야말로 르 그라이스의 영화 <마네 이후>가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또한 그리올의 다중관점 시나리오에 내재되어 있는 가능성의 일부이기도 하다. 몽타쥬와 다른 실험적 장치들은 글쓰기가 수반되건, 영상(필름과 비디오)이 수반되건, 혹은 기타 재현적 형태들이 수반되건, 오로지 그 형식 혹은 기술 자체만을 위해for their own sake 활용되어선 안된다. 적어도 인류학에서는 이들은 연구자와 연구주제 사이의 경험적 시공간적 연속선상에서 연결되어야 한다 (여러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연구에서처럼 파편화 되어 있더라 하더라도). 다른 말로 하면, 실험영화의 활용방식은 모두 인류학적 주제의 경험에 결부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중략)...

 

실험영화와 인류학: 비판적 과제와 차이점들 

우리가 보았듯, 최근의 인류학적 비평적 실천은 몽타쥬라는 영화적인 은유를 활용해 민족지학적 글쓰기의 실험적인 면모들을 특정짓기도 하고, 민족지학적 현상을 묘사하고 분석하는 실용적인 편집장치로서 활용하기도 했다 (Marcus 1995, Gramshaw 2001, Willerslev and Ulturgasheva 2006). 이에 비해, 몇몇 실험영화작가들와 이론가들은 몽타쥬를 거부하거나 일부러 기피한다. 실험영화작가 커트 크렌Kurt Kren에 대해 말콤 르 그라이스가 설명하듯, 

고전적인 몽타주에서는 쇼트가 나열되는 방식이 행동의 환영적인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 혹은 아이젠슈타인이 말하듯, 쇼트들 사이의 드라마틱하고 표현적인 충돌을 최대화하기 위한 식으로 행해진다. 크렌은 수학적으로 구성된 몽타주 방식을 통해 서사적인 그리고 표현적인 측면의 몽타주 개념을 둘 다 반박한다. 이로 인해, 그의 많은 영화작업은 매우 제한된 숫자의 반복된 쇼트를 활용해 다양한 조합방식과 길이로 만들어낸다. 이러한 작업에서 쇼트들 사이의 연결성은 몽타주적이라고 고려될 수 없다. (Le Grice 2001, 59쪽) 
...이 서로 분리된 "쇼트"들 사이에서 구성되는 관계들의 성격(편집을 통해 몽타쥬적 관계와는 매우 상이한 종류의)은 구조적 동일체Structural homologue로서 규정지어진다. 어떤 의미에서 이 작업들에서 재현되는 것들은 나무나 머리가 아니라...영화 관람과 촬영 과정 ("기능"으로서의)의 시공간적 관계이다...지각의 영화적 행위이다...영화는 묘사가 되고, 표현이 되고, 심지어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특정 절차와 매체(영화 행위)의 제약 아래서 이루어지는 지각행위가 된다. 이러한 행위의 결과는 진정으로 새로운 "대상"object이 된다...이 대상 속에서 시공간적 절차의 "생산물"은 "자연스러운 대상"natural object에 덧붙여진다. (62쪽)

실험영화가 새로운 "대상"을 만들어낸다는 르 그라이스의 개념은 특히 흥미롭다. 인류학이 비슷한 방식으로 인류학의 "자연스러운" 대상 (즉, 민족지기술)과 떼어질 수 없더라 하더라도, 인위적으로 구성된 재현과 이렇게 구성된 재현이 세계에 덧붙여질 수 있는(그저 재생산되는 것이 아닌) 가능성 그리고 내재적인 제약에 관해선 생각해볼 만하다. 실험영화 작가들에게 있어, 르 그라이스를 인용하자면 (2001, 155쪽) 시공간과의 관계속에서 영화의 과정은 다음과 같은 요소를 포함한다. 준비과정 (회고적인 성격을 지님), 촬영, 편집, 인화, 그리고 정말 실험영화 작가들에게 중요한 것으로, 영사(현재적인 성격을 가짐),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후의 사건들 (투영적인 성격을 지님)이다. 실험영화의 이론적 요구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앞서 열거한 요소들이 어떻게 인류학으로 치환될 수 있는지, 혹은 민족지학적 연구와 관련해 접목될 가능성이 있을지에 대한 질문이 남는다. 사유실험을 해보자. 이러한 요소들의 인류학적 버전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준비 과정이라는 것들은 연구 기획와 가설 생성 단계로 볼 수 있고, 촬영이라는 것은 인류학자가 만들어내는 민족지학적으로 설정된 관찰들과 비교될 수 있으며, 편집과정과 인화과정은 분석과 글쓰기의 단계와 각각 상응할 수 있고, 이후의 "투영적" 성격의 일련의 과정들은 작업이 대중에게 받아들여지는 것과 유사할 수 있다. 보다 더 최근의 인류학에서 결과물을 연구 주체들에게 "회귀"return시키거나 "회수"bringing back하는 과정이 그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런 넓은 의미에서의 유사성은 영화와 민족지학의 순차적 성격sequential nature을 생각해 볼 때 유용할 수 있지만 한계도 분명 있다. 그러므로 영화의 장치적apparatus 혹은 물리적 조건들이랑 비슷한 게 인류학에는 뭐가 있나에 대해 생각해볼 때는 좀 더 어려울 것이다. 문화적 기관cultural apparatus 혹은 추상적 의미에서 민족지학자가 갖는 편견 같은 것과 등치될 수도 있겠고, 좀더 직접적으로 물리적인 의미에서, 인류학자들이 쓰는 물리적인 보조기구들, 예컨데 펜, 메모장, 카메라 (동영상 혹은 정지영상), 그리고 오디오 녹음기와 컴퓨터들이 있겠다. 하지만 정말 실험영화 작가들의 물리적 장치들과 바로 등치되는 것이 없다. 민족지학적 실천에서 "사이"in between에 생기는 것들은 인류학자들 자신들의 고도로 역동적인 페르소나이기 때문이며, 이는 그들의 신체와 보조기구들을 포함한다. 더군다나 필기구, 메모장, 컴퓨터, 핸드폰 등의 기능을 급진적으로 변화시키거나 누락시킬수도 있는 인류학적 생산과정을 상상해 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아무리 이런 것들을 다양한 인류학적 연구의 문화적 상황에서 상이하게 쓰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실험영화와 인류학 사이의 상응하는 관계를 세워보려는 시도에는 좀 더 큰 문제도 있다. 극단적으로 이론적이고 지적인 일련의 활동으로서의 실험영화에서는 (적어도 1970년대의 실험적, "구조적" 영화에서는) 영화의 작용이 인간의 개입이나 사회적으로 매개된 인간 주체성human agency, 혹은 상호교류나 소통을 배제하려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인류학에서는 기본적으로 소통, 문화 경험의 체험된 다양성, 그리고 사회 관계에 중점이 가 있다. 말인즉슨 우리가 인류학의 가장 추상적인 형태를 취해야 하지 않는 이상(마치 프랑스 구조주의가 대상으로 삼는 사회 현상을 분석하고 추상화하는 데 두는 "차가운" 거리감과 같이)은 그렇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측면에서는 이 두가지, 인류학과 영화에서의 구조주의적 접근법은 어느 정도 연결지점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상이하게 남아있는다. (Le Crice 2001, 62쪽)

  실험영화의 이론적 기조를 민족지학에 치환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고려해 보면, 많은 물음들이 즉각적으로 던져지고 이중 몇몇은 부정적인 응답을 필요로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한계와 차이들을 밝히기 위해서라도 이러한 질문들을 물어봐야 할 가치는 있다. 예를들어 우린 재현적이지 않고 환영적이지 않은 민족지학이란 상상 가능한가에 대해 물어볼 수도 있다. 즉, 실험영화와 비슷한 방식으로 시간을 글로 쓰여진(혹은 읽혀지는) 단행본의 "시간" 안으로 압축시키지 않는 민족지학 말이다. 불가능하다면, 왜 불가능한가? 실험영화에서 초점은 영사 (혹은 재현)과정동안 흐르는 시간에 맞춰져 있고, 시간 기반의 현상들, 즉 지각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맞춰져 있다. 이떻게 이러한 것이 시간의 인류학에 관한 논의들과 엮여질 수 있을까?[각주:6] 

  더 나아가, 비회고적인non-retrospective 민족지학이란 가능한가? 이는 오로지 현실 속에서의 민족지학, 혹은 민족지학의 시간적 구체성과 제약들을 가시화하거나 드러내는 민족지학을 의미할 것이다. 물론 인류학에서는 영화의 준비기간이나 영사 과정에서 재현이 배제되거나 거부되는 것처럼 민족지학 자체가 제거되는 경우는 없다고 할수도 있다. 아니면 할수도 있는가? 물론 "문화를 쓴다"라는 이름의 논의 이후로 민족지학에 대해 치밀한 비판은 있어왔다 (Dell Humes, Stanley Diamond, James Clifford, George Marcus 등). 보다 최근에 Marcus (2009)는 연극을 위한(혹은 국제적 협의를 위한) 준비과정으로서의 "그린룸"과 민족지학자가 필드워크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과정 사이의 평행성을 제시한 바 있다. 

 

결론

...(중략)...

여러가지 문제점들이 더 탐구될 수 있다. 첫번째로, 실험영화는 지각과 재현의 과정들이 어떻게 분석되고 질문될 수 있을지에 대해 제시하고 컨디셔닝이 이루어지는 환경에서 지각 기반 혹은 감각 기반의 현상학적 인류학이 갖는 가능성과 제약들에 대해 상기시킨다...(중략)... 

  두번째로, 형식과 질료material가 실험영화를 위한 소재가 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다: "물리적"material인 것이 인류학의 소재가 될 수 있는가? 필드워크에 수반되는 물질physical substance과 물질성materiality에 대해서는 이야기되어야 할 것들이 있다. 여기에 문자, 프린터의 잉크나 책 바인딩 이외에도 물질적인 것이 있는가? 영화이론의 관점에서 햄린(2003, 3쪽)은 몇몇 실험영화 작업에서 가시화되는, 물리적 세상의 잘 변하지 않는 성격obduracy에 대해 이야기했다. 미술사학자 모니카 바그너Monika Wagner(2001) 또한 동시대 미술 작업의 물리적 일관성에 대해 탐구했다. 슈나이더와 라이트Schneider and Wright (2006, 4-5쪽)역시 감각적으로 "물리적인" 안셈 키퍼Anselm Kiefer의 책 오브제를 인류학 연구의 결과물이 갖는 "유물적"artefactual 성격과 관련지어 이론화하려고 시도했다. (예술가 조나단 라담Jonathan Latham의 책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적용할 수 있겠다) 이러한 논리선상에서 실험영화에서 주어지는 물질성materiality에 대한 강조는 인류학에서의 물질성에 대해 재고해보는 접근방식과 조합될 수 있고, 이는 지적 질료intelligent materials 그리고 "물리적 정신"material mind에 대해 주목하는 접근법들을 포함한다 (Küchler 2003 참조).

  실험영화로 인해 거론되는 세번째 문제는 (네 대의 카메라가 동시에 구동되는 르 그라이스의 <마네 이후>로 대표되는) 촬영 환경에서의 두명 혹은 그 이상의 참여관찰자들이 갖는 동시성contemporaneity 혹은 단일한 관찰자가 맞닥뜨리는 복수의 사건들이 갖는 동시성simultaneity이다. 인류학은 이 주제와 오랫동안 "필드워크에서의 인위적인 동기성synchronicity" 대 "일어나는 사건들의 피할 수 없는 통시성diachronicity"이라는 미명하에 씨름해왔다. 다음과 같은 민족지학적 사건을 예로 들어보자. 여기서 민족지학자 칼파나 램Kalpana Ram은 의식 한가운데 위치해 있는 상황에서 이렇게 묘사한다.

스윙이 멈추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 여신에게 "쿠리kuri" 혹은 예언을 말하도록 하는게 있다. 빙의된 사제는 자신의 손을 무작위적으로 여러 사람들의 머리 위에 올리며 "쿠리", "쿠리" 하고 반복한다. 뭔가 다 빠져나간 듯할 때, 스윙이 반복된다. 이 스윙은 빙의의 춤 같다. 리듬과 연료를 제공하는 기계적인 춤같다. 가끔 울부직음이 있긴 하지만 쿠리와 스윙에 집중한 나머지 나는 오른쪽에서 무슨 일어나고 있는지 보지 못했다. 돌아보고 나나 쇼크를 경험한다. 피 때문에 붉어진 시냇물이 흘러내려, 땅 또한 붉게 물든다. "쿠탈라이 마탄Cutalai Matan"을 숭배하는 사제는 칼을 들고 서 있고, 바닥에는 머리가 없는 두 마리의 흑염소가 있다. 또 한마리의 흑염소가 다른 두 남자에게 붙들려있다. 흑염소는 가만히 서있고, 누군가가 "오레 베투Ore vettu" ("한방에!")라고 외친다. 머리는 단칼에 잘려지는데, 이는 가치있는 기술로 보인다. 몇마리의 닭이 같은 사람에게 도살된다. 이들 또한 숭배자들이 가져온 제물이다. 사제는 몇 루피를 받고 커미션으로 이 생물의 머리를 가져간다. 나느 비에 젖었고, 피 때문에 메슥거려서 여기로부터 멀어진다. 다음 신전에서 또 다른 활동을 본다. (Ram 2010, 9-10쪽. 저자의 1991년 필드노트에서 발췌한 부분들)

우리의 시야에는 무엇이 있을까? 우리는 필드에서 어떤 "위치성"을 점유해야 할까? 단일하게 녹화할 수 있는 것이란 뭘까? 위치의 변화에 대해 너무나 많은 것들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나의 논증에 좀 더 관련 있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닳아버린 시야의 끝자락에서는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

...(중략)...

  결론짓자면, 지각 연구에 있어서 실험영화는 "인식론적 회의"(Hamlyn 2003, 126쪽, 185쪽.)의 요소를 도입해줬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통해 (실험영화 작가들이 "장치"apparatus라고 부르는) 보고있는지를 질문하게 해줬다. 이러한 실천들은 시각에 대한 인류학적 이론작업은 물론 시각에 대한 인류학에서의 실험적 시도들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있다. 

 

(참조자료는 영어 원문을 참조하세요)

 

 

 

 

  1. 추후 거론할 이론적인 문제로 인해, 내가 조명하려는 것은 구체적으로 이러한 종류의 실험영화이다. 이 장은 어떤 방식으로든 인류학과 씨름한 실험영화 작가들에 대한 개요가 아니다. (이를 위해선 Ramey 2011 참조). 실험영화에 대한 보다 넓은 개념에 대해서는 러셀 1999 (190쪽) 참조. 이는 러셀이 "순수 실험영화가 아닌"impure라고 명명한 것들, 즉 형식적 실험보다 서사적 소재에 천착한 작업들도 포함한다. [본문으로]
  2. 인류학에서의 사례를 보려면 로버트 애셔Robert Asher (1990)와 래미Rammey (2011)참조. [본문으로]
  3. 이를 알려준 루퍼트 칵스Rupert Cox에게 감사를 전한다 [본문으로]
  4. 이 이미지를 찾을 수 있게 도와준 British Artists' Film and Video Study Collection의 니키 햄린, 던칸 와이트Duncan White, 그리고 스티븐 볼Steven Ball에게 감사를 표한다. [본문으로]
  5. 필름 프레임의 순차적인 성격은 시간이라는 개념을 마야 예술에 놓고 사유했던 조지 커블러에 의해 영감을 받았다. 이 점을 지적해준 토마스 F 리스Thomas F. Reese에게 감사하다. Kubler (1985) 참조. [본문으로]
  6. 예를 들어 Afred Gell (1992, 1998)의 시간의 인류학 그리고 모더니즘 작가 마르셀 뒤샴의 작업에 관한 논의 참조.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