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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a Lowe리사 로우, "Heterogeneity, Hybridity, Multiplicity" (1991) 이종성, 혼종성, 다성성 일부 번역


“민족주의”와 “동화주의”를 둘러싼 논쟁을 좀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 문화 재현에 관한 아시아계 미국인 정체성 논의를 살펴보자. 아시아계 미국문학의 독자층이라면, 프랭크 친, 벤 통과 다른 이들이 작가 맥신 홍 킹스턴에 대해 비판한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킹스턴의 “동화주의적” 저서에 대한 민족주의적 비판으로 여겨졌다. 킹스턴의 자전/소설, <여성전사>가 이러한 비판의 표적이 된 이유는 이 저서가 처음으로 “정전화”된 아시아계 미국문학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어쩌다가 그리고 도대체 왜 이 텍스트가 아시아계 미국문화의 대표적 재현물로서 물신화 되었는지에 대한 비판은 필요한 것이며,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친의 비판은 아시아계 미국 문화 내의 다른 주요 긴장관계들을 보여준다. 그는 킹스턴이 중국계 미국문화를 이국적으로 보이게 했다는 비판 외에도, 킹스턴이 아시아계 미국문학을 “여성화” 함으로써 아시아계 미국인 남성들이 지배적 백인 문화가 만들어낸 인종차별적 스테레오타입에 맞서 싸울 동력을 저하시켜버렸다고 주장한다. 킹스턴과 다른 여성 소설가들, 예를 들어 에이미 탠 같은 이들이 중국계의 가부장제를 과장하기 위해 그 역사를 잘못 재현했다고 비판한다. 이 결과로, 중국계 사회는 유럽 사회보다 훨씬 더 여성혐오적으로 비춰졌다고 그는 말한다. 친과 다른 이들이 이런 갈등상황을 민족주의와 동화주의라는 언어로 풀어내고 있지만, 나는 일레인 킴의 말처럼, 이 논쟁을 아시아계 미국담론 내의 민족주의적 관점과 페미니스트적 관점 사이의 긴장관계를 나타내는 증상으로서 보는 것이 더 생산적일 것이다 생각한다. 킴의 분석에 덧붙여, 나는 민족주의와 페미니즘의 관점 사이의 논의는 정체성과 차이에 대한 토의, 혹은 정체성과 이종성에 관한 토의에 동력을 제공한다고 생각하지, 민족주의와 동화주의 사이의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논의는 말하자면 친과 다른 이들이 고정된 남성주의적 정체성을 주장하는 반면, 킹스턴, 탠, 그리고 셜리 림과 에이미 링과 같은 다른 페미니스트 문학비평가들이 여성적 차이의 재현과 중국 문화의 성차별적 문화의 비판을 통해, 그들이 주장하는 정체성의 개념을 끊임없이 질문하고 있는 상황이다. 파농이 몇몇 형태의 민족주의가 계급 문제를 흐리게 한다고 지적하듯, 아시아계 미국인 페미니스트들 또한 아시아계 미국 문화민족주의—혹은 고정된, “태생적” 아시아계 미국인 주체—가 젠더문제를 흐리게 한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겉으로는 태생주의(nativism)와 동화주의의 대립으로 보이게 만들어진 이 갈등상황은 민족적 정체성을 본질화하려는 욕구와 이러한 욕구에 대항하는 이질적인 차이라는 조건 사이의 힘겨루기로서 보다 더 정확히 특징지어질 수 있다. 사실 태생주의와 동화주의를 서로 대립시키는 프레임은, 이질성, 혹은 서발턴성이 제기하는 문제의식을 반-문화민족주의적이고 동화주의적이라고 규정해 치워버림으로써, 식민주의적 도구와 똑같이 활용된다.



 …(중략)…에이미 탠의 최근 소설인 <조이 럭 클럽>은 세대간 갈등이라는 설정을 색다른 사회 맥락, 즉 샌프란시스코의 1세와 2세 한족 중국계라는 맥락에서 재구성한다. 탠의 책도 <차 한 사발 먹어라>에 등장하는 세대차이라는 주제를 다루긴 하지만, 남성적인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 엮인 아시아계 미국인 정체성 구성의 문제 탈피하여 이를 모녀지간 관계에서 다르게 풀어나간다는 차이를 갖고 있다. 이러한 여성들 사이의 변화는 1943-52년 사이의 이민법 변경, 즉 중국 여성들이 미국으로 이주할 수 있게 된 것으로 인해 야기된 중요한 변화들에 대해 암시하는데, 이는 추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총각” 사회에서 “가족” 사회로의 변화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차 한 사발 먹어라>보다 훨씬 더, <조이 럭 클럽>은 사회 갈등과 대립을 사적인 공간으로 복속시키는 텍스트로서 오용될 수 있는 위험을 많이 안고 있다. 왜냐하면 이 텍스트는 그러한 대립과 갈등을 “여성화된” 가족 관계의 가정 공간으로 제한시키기 때문이다. <조이 럭 클럽>에서는 사적인 세대간 갈등과 어머니와 딸들 사이의 “여성화된” 관계들을 둘 다 좀 더 넓은 의미에서의 중국 이민자 사회 형성 변화를 나타내고 있다. 

<조이 럭 클럽>은 네 쌍의 중국 출신 어머니들과 그들의 미국 태생 딸들에 관한 1인칭 서사로 이루어져 있다. 딸들은 자신들의 어머니의 요구와 타협하려 해쓰고, 어머니들은 자신들의 딸들의 행동들을 해석하려고 노력한다. 이 소설은 그리하여 “중국적”인 기대, 즉 자식된 도리와 이러한 기대를 채워줄 수 없는 “미국적”인 무능 사이의 긴장관계를 표현하고 있다. 이 책은 중국계 미국 가족 간의 모녀 관계에 대한 소설이라고 마케팅되고 떠받들어졌는데 (한 커버 리뷰는 이 소설을 “중국, 중국계 미국인 여성들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한 모녀간의 끈끈함이 가진 미스테리를 보여주는 이야기”로 특징지었다), <조이 럭 클럽>에서 보여지는 갈등상황은 오로지 세대간 갈등만이 아니라, 중국계 미국인들 사이에서 계급과 젠더에 관한 서로 다른 개념들로 인해 야기된 것들도 포함한다. 예를 들어, 소설의 끝부분에서, 린도 종과 웨이벌리 종은 서로에 대한 오해의 클라이맥스에 다다르게 된다. 이 장면은 미국 여성성을 생산하는 매우 중심적인 장소, 즉 미용실에서 이루어진다. 스타일리스트에게 자신의 어머니에게 “소프트 펌”을 해 주라는 주문을 넣고 나서, 웨이벌리는 어머니 린도에게 괜찮겠냐고 묻는다. 어머니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난 웃지. 미국인 표정을 짓는거야. 이 표정이야말로 미국인들이 중국인의 표정이라고 생각하는 거거든. 이해가 안되는 표정 말이야. 하지만 속으로 나는 너무 창피해 하고 있단다. 나는 걔가 창피해 하는게 창피해. 걔는 내 딸이고 나는 걔가 자랑스럽지만, 걔는 내가 걔 엄마인데 엄마가 자랑스럽지 않아해.” 미국에서 태어난 딸은 매우 패셔너블한 미용실에서 하루를 보내는 것이 자신의 어머니를 잘, 매우 호화스럽게 대접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중국 출신의 어머니는 이러한 행동을 모욕으로 받아들인다. 자신의 딸이 어머니의 모습이 부끄럽다고 느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모녀간의 세대차이에 관한 상징 뿐만이 아니라, 더 중요하게 그들의 계급, 그리고 문화적 차이를 이야기하는 것이며, 이러한 차이가 어떻게 “여성성”이 다르게 이해되고 기표화 되는지에 대해 보여준다. 한 편에선, 중국 태생의 린도와 미국 태생의 웨이벌리가 서로 다른 계급 가치관과 기회를 지니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의 비싼 미용실을 이용하는 것이 큰 레져라고 생각하는 딸에 비해, 시골에서 태어나 같은 마을의 좀 덜 가난한 집으로 결혼보내짐으로써 가족이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어머니는 이러한 행동이 말도 안되게 사치스러워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는, 모녀에게 있어 무엇이 적절한 여성적 행동인지에 대한 대립이 존재한다. 린도는 딸이 어른들에게 예의를 갖춤으로써 여성적 정체성이 완성된다고 믿는 반면, 웨이벌리는 여성의 경제적 독립과 남성과의 경제적 동등함, 자신의 욕구를 표현할 수 있는 힘, 그리고 중산층의 여성미를 상징하는 스타일과 몸매를 가꾸는 것이야말로 여성적 정체성을 완성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조이 럭 클럽>을 중국계 미국 여성 세대간 “모녀의 끈끈함이 갖는 미스테리”만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모녀 관계라는 서사 설정이 어떻게 아시아계 미국 문화를 상징하게 되는지를 풀어내는 텍스트로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곧, 이 소설은 이러한 구성체를 —계급적, 그리고 문화적으로 구체적인 젠더 정의의—차이라는 맥락에 위치시킴으로써, 국가 공론장이 아시아계 미국인에 관한 담론에서 어떻게 모녀관계를 미화시키는지에 대한 커멘터리로서 해석될 수 있다. 모녀관계 설정을 과도하게 조명될 때, 차이라는 맥락은 비가시화된다. 

…(중략)…<조이 럭 클럽>이 사적 공간의 것으로 이해되는 모녀 관계라는 설정을 소재화함으써 그리고 세대간 갈등을 다성화 시킴으로써 태생주의와 동화주의의 이항대립에 문제제기한다면, 피터 왕Peter Wang의 영화 <만리장성A Great Wall (1985)>…은 또 다른 대안을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