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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차] 로렌 벌랜트Lauren Berlant, 마이클 워너Michael Warner. "공적(公的) 섹스(Sex in Public)" (1998)

“Extraordinary Homosexuals and the Fear of Being Ordinary" (1994)의 저자 비디 마틴Biddy Martin


[1회차 번역에 이어서 연재되는 내용입니다]


장면 2


1995년 10월, 뉴욕시의회에서 새로운 구역법 제정이 41대 9로 통과되었다. 이 구역법 개정안(The Zoning Text Amendment)은 성인지 및 성인 비디오가게, 주점 및 음식점, 영화관 및 기타 사업장들을 포괄하는데, 이 개정안은 포괄되는 사업장들로 하여금 오로지 비주거지역으로 규정된, 주로 부둣가 같은 특정 지역에만 위치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이렇게 새롭게 지정된 구역들에서조차, 성인업소들은 같은 구역 내의 타 성인업소, 그리고 종교기관, 학교, 또는 보육원같은 시설들로부터 500피트(역주: 약 150미터) 이상 떨어져 있어야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성인업소들은 1만 sqft (역주: 약 280평) 넓이의 구역당 한 곳으로 제한된다. 간판의 크기, 위치, 밝기까지 제한된다. 이러한 조건들에 부합하지 않는 성인업소들은 1년내로 폐업해야만 하며, 이는 뉴욕시에 존재하는 약 177곳의 성인업소들 중 28곳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문을 닫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법안의 집행은 건물 조사관들에게 위임된다. 


이 법안에 대한 법정투쟁은, 이미 이 사안을 둘러싼 정치적 논쟁 과정에서 크게 저항했던 경력이 있는 뉴욕시민자유연합(New York Civil Liberties Union), 표현의 자유를 지지하는 페미니스트 (Feminists for Free Expression), 미국의 방식을 지지하는 사람들 (People for the American Way), 전국반검열연합(National Coalition Against Censorship) 등의 검열반대 단체들과, 램다 변호 기금 (Lambda Legal Defense Fund), 엠파이어 스테이트 프라이드 어젠다 (Empire State Pride Agenda), 그리고 에이즈방지행동연맹 (AIDS Prevention Action League)을 비롯한 게이/레즈비언 기관들의 연합으로 주도되었다. (이 법안에 대한 반대 재심요청은 1997년 7월을 기점으로 아직 검토중이다) 여기에 참여한 동성애 관련 단체들은 매우 단순한 이유로 반검열 단체들과 함께 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퀴어들, 특히 게이 남성들을 고객으로 하는 사업장들이 재구역 법안이 그대로 집행된다면 엄청난 타격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크리스토퍼 가(Christopher Street)에 있는 다섯 곳의 성인업소들은 모두 폐업이 종용될 것이었고, 섹스를 원하는 남성들끼리 만날 수 있는 주요 업소들도 문을 닫게 될 처지였다. 이 사업장들 중 단 한곳도 동네 지역민 불편신고의 대상이 되었던 적은 없었고, 게이 남성들은 노골적으로 성적인 매체물들을 접하거나 성인 영화관, 클럽에 가는 것을 아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었다. 이런 공간들을 통해 그들은 서로를 찾아내는 법, 자신들이 접근 가능한 세계의 지도를 그리는 법, 동성애혐오적인 환경 속에서 퀴어 공간의 건축학을 만드는 법을 배울 수 있었으며, 이에 추가로 지난 15년동안 보다 안전한 섹스를 위한 에토스(ethos) 또한 일궈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한번에 뒤집힐 위기에 놓여있다. 이제 성적 매체물이나 섹스를 위해 다른 게이 남성을 만나고 싶어하는 이들은 두가지 선택권만이 주어지게 되었다. 민영화된, 가상 공공의 폰섹스나 인터넷으로 자신의 성욕을 분출(cathect)하는 것이 그 중 하나이고, 또 하나는, 주로 부둣가에 위치한, 작고, 접근성이 떨어지며, 조금은 혼잡하고, 조명이 좋지 않고, 대중교통이나 주택가에서 멀리 떨어진 업소들, 즉 동성애 포르노 사용자들이 새로이 이주할, 결과적으로 볼 때 폭력의 위험에 노출될 리스크가 높은 업소들을 찾아가는 것이다.[각주:1] 어떤 것을 선택하던 간에, 고립감, 퀴어의 삶에 대한 위축된 기대감, 그리고 정치적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역량의 감소화에 있어서 결과는 똑같을 것이다. 클리트 클럽(Clit Club)이나 레즈비언용 비디오 대여점들을 포함한, 이제 막 형성되기 시작한 레즈비언 성문화 또한 사라질 것이다. 뉴욕의 성 정화 작업의 여파는 애초부터 공적자원에 대한 접근이 제일 제한된 이들에게 가장 크게 미칠 것이다.


2. 규범성(normativity)과 성문화 


이성애성(hetero sexuality)은 물(物)이 아니다. 사람들은 이성애 문화(heterosexual culture)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고, 이성애성 자체가 언급되는 일은 그보다 적은 편인데, 이는 이성애 문화가 그저 임시적인 통일체 그 이상의 것이었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각주:2] 이성애성은 단일한 상징계(a single Symbolic)도, 단일한 이데올로기도, 심지어 공통 신념들의 통일된 묶음(a unified set of shared beliefs)과도 거리가 멀다.[각주:3] 이러한 점에서 비롯되는 갈등은, 남녀로 구분되는 성적 관계의 당연함이 일상적인 올바름의 일부로 작용하는 세계의 실생활 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인식되는 것이 전부이고, 이성애성의 취약함은 엄숙한 도덕적 정당성이라는 쇼에 가려져 버린다. 이러한 갈등은 이론적으로도 인식되지 않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이성애성이라는 범주가 일으키는 메타문화적인 작용이 매우 상이한 실천들, 규범들, 그리고 제도들을 ‘섹슈얼리티’라는 이름으로 한데 묶어버리기 때문이며, 다른 측면에서 봤을 때는 푸코가 근대 섹슈얼리티의 특징들로 꼽는 많은 것들이 부여된, 정상화(normalization) 과정이라는 것이 사회적 지식의 학문들 자체에 깊게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다.[각주:4] 그리하여, 오늘날의 미국이 국가적 이성애성 건설사업에 의해 잠식되었다고 할 수 있다면, 여기서 말하는 국가적 이성애성은 단순한 단일문화같은 것이 아니다. 헤게모니는 자기유지와 재생산을 위해서 확산되고 모순된 전략들을 동반하는 유연한 동맹체계일 뿐, 그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다.


이성애 문화는 친밀성(intimacy)의 이념들과 제도들을 통해 자신의 메타문화적 이해가능성(metacultural intelligibility)을 이뤄낸다. 인간의 사적 영역(private personhood)에서 맺어지는 친밀한 관계들이 그 자체로서 섹슈얼리티의 영역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공적 섹스”(sex in public)가 말도 안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친밀성은 그 자체로 여러가지 의미에서 공론적으로 매개된다(publicly mediated)는 것이 우리가 주장하려는 바이다. 이 주장은 첫번째로, 친밀성의 기존 공간들은 “사적인 삶”(personal life)을 직장, 정치, 그리고 공론장(public sphere)으로부터 구조적으로 구분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데에 그 근거가 있다.[각주:5] 두번째는, 이성애 문화가 지닌 규범성은 친밀성을 오로지 사적인 삶의 제도로만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사적인 삶의 제도들은 사회적 재생산에 있어 특권적인 제도, 자본의 축척과 이전, 그리고 자기개발로 이루어지게 된다. 셋째로, 친밀성의 이성애규범적 통념은 섹스(sex)를 유의미하지 않은것 혹은 단순하게 사적인 것으로 돌려버림으로써, 비규범적이거나 전면적인 공적 성문화의 형성을 방해한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통념들은 신기루를 형성하는데, 이 신기루란, 전-정치적(pre-political) 인간의 안식처를 뜻한다. 이는 마치 시민들이 정치담론에 뛰어들게 준비시켜주는 장소이자, (항상 상상 속의) 미래에 정치적 갈등을 거친 후 돌아올 장소 같은 것이다. 친밀한 삶(intimate life)은 정치적, 공적 담론장이 아닌 곳에서만 끊임없이 소환된다. 이는 마치 약속된 안식처와도 같아, 시민들로 하여금 그들의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삶 속의 불평등한 조건들로부터 주의를 분산시키고, 대중 사회(mass society)에서 손상된 인간성(humanity)을 위로하고, 단순한 인간의 삶(personhood)과 동일하게 여겨지는 친밀성의 영역과 그들의 삶 사이에서 발생하는 어떠한 형태의 괴리에도 수치심을 느끼게 한다.

 

친밀성의 이념들과 제도들은 불안정하고 힘들어하는 미국의 시민들에게 좋은 삶에 대한 비전으로써 점점 더 많이 제시되는데, 이는 미래에 대해 생각하며 이를 의지대로 개척하는 것이 가능한 유일한 (환상의) 구역으로, 그리고 자본주의와 정치가 야기하는 혼란스럽고 불안정한 모순과 산만함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모범 시민이 생산될 수 있는 유일한 (상상의) 장소로 제시된다. 사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국가자본주의적 민영화의 역설 중 하나는 바로 이성애문화가 시민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정체성, 그리고 ‘자신들의 정치관’ 둘 다를 사생활(privacy)과 동일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공식적인 공론장에서는, 이는 섹스가 사적인 것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의미하고, 혈족(blood)이 정체성화의 정신적 기반으로서 다시금 강화되는 것을 뜻하며, 사회 정의에 대해 국가가 진 의무가 개인 책임감의 윤리학과 기부, 용서, 그리고 “가치관”으로 대체되는 것을 의미하고, 도덕적 인간과 경제적 인간 사이의 경계가 강화되는 것을 뜻한다.[각주:6]


사회에 대한 소속감을 깊고 규범적인 방식으로 표의(signify)하는 가족주의와 친밀성이 추구하는 사랑의 서사(love plot) 때문에 여러가지의 복합적인 성적 행위(sexual practices)들은 이성애문화에서 매우 혼란스러운 것이 된다. 공동체는 친근함, 커플 맺기(coupling), 그리고 친족관계 등의 장면들로 상상되며, 미래성에 대해 맺어지는 역사적 관계는 세대적 서사와 번식(reproduction)으로 제한된다.[각주:7] 사회적 관계의 모든 영역은 이성애성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되며, 이 민영화된(privatized) 성문화의 성적 행위들(sexual practices)은 암묵적으로 규범성과 올바름의 감각이 부여된다. 이 올바름의 감각이란, 섹스 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에도 깃들어있으며, 바로 이것을 우리가 이성애규범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성애규범성은 이념, 편견, 게이 레즈비언 혐오보다도 더 많은 것을 내포하며, 사회적 삶의 배열과 형태의 거의 모든 측면에서 생산된다. 이러한 배열과 형태에는 국적, 국가, 법, 상업, 의약, 교육, 서사성의 관습과 정동(affect), 낭만, 그리고 보호되고 있는 기타 문화적 공간들을 포함한다. 이러한 분야들을 이성애규범적이라고 인지하기가 힘든 이유는 바로 이성애자들이 점유하고 있는 성 문화가 너무나도 분산되어 있으며, 그들이 전근대적인 섹슈얼리티의 개념과 함께 형성하고 있는 언어들의 혼합물이 너무나도 오래된 나머지 그들의 물리적 조건들이 인간성(personhood)에 내장되어 있다고 느껴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이성애규범적 문화에서 통용되는 친밀성의 의미가 항상 동일했던 것은 아니었다. 푸코와 다른 역사가들, 예를 들어 고전연구자 데이빗 할퍼린David Halperin 같은 경우는 고대 아테네에서 섹스란 인간성(personhood)의 근본적인 측면이자 친밀성의 표현이라기 보다는, 그저 하나의 타동적 행위로 받아들여졌었다고 지적한다. 섹스하는 행위를 나타내는 동사는 다음과 같은 후기 고대 목록에 등장하는데, 이 목록은 타인을 통하거나 타인에 대해 행해지지 않는 동사들, “주로, 말하기, 노래부르기, 춤추기, 주먹다짐하기, 경쟁하기, 목매달기, 죽기, 고문당하기, 뛰어들기, 보물찾기, 섹스하기, 토하기, 대장에 힘주기, 잠자기, 웃기, 울기, 신에게 말하기, 그리고 이와 비슷한 것들”을 나열한다.[각주:8] 할퍼린은 이 목록에 성교(fucking)가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섹스라는 것이 여기서는 “상호성(mutuality)의 그물에 엮여있지 않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지적한다.[각주:9] 이에 대비되어, 근대 이성애성은 친밀성의 관계와 타인과의 동일시화(identification)를 의미하며, 성행위는 그 중 친밀도가 가장 높은 (most intimate) 소통방식이라고 여겨진다.[각주:10] 성행위는 사생활의 영역(zone of privacy)에 의해 보호받는데, 이는 이성애 문화가 보호하는 정동적인 광륜과도 같고, 이 광륜으로부터 이성애 문화의 윤리적 모델이 추상화된다. 하지만 동시에 이 사회적 소속감의 이상향은 성문화와는 관련성이 옅다고 인식되는 많은 행위들에 의해 강화되고 확장된다. 세금 내기, 역겨움 느끼기, 여기저기 작업걸기 (philandering), 유산 물려주기, 공휴일 보내기, 미래에 투자하기, 가르치기, 시체 치우기, 지갑에 사진 넣어 갖고 다니기, 절약형 제품 구매하기, 족벌주의적인 행동하기, 대통령 선거에 나가기, 이혼하기, “그”의 혹은 “그녀”의 것(anything “His” or “Hers”) 소유하기 등이 이에 속한다.


이렇게 나열한 것들에 대한 설명은 추후에 다른 연구에서나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목록을 만들고 이들을 비웃어 버리는 것의 목적이 꼭 바로 즉시 어떤 실천을 억압적이거나 좋지 않거나(uncool) 규정적으로 보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묘사하는 것은 사회적 구성원의 지위(social membership)를 형성하는 암묵적이지만 중심적인 표지로서의 이성애적 특권을 도처에서 확산시키는 실천들로 수놓아진 별자리이다. 이를 폭로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우리가 다른 지면에서 “재맥락화의 살과 뼈를 분리하는 것만 같은(wrenching) 감각”이라고 명명한 것을 생산한다. 이는 재맥락화되는 주체들이 (심지어 게이/레즈비언 주체들까지 포함하여) 특별히 성적이거나 가족적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담론들, 제도들, 그리고 실천들이 어떻게 함께 작용하여 극단적으로 협소한 삶의 맥락을 사회적 규범과 이상으로 생산해내는지 알아가기 시작하면서 이루어진다.[각주:11] 사람들이 정상적인 문화의 잔혹성에 대해 알고 경험하는 많은 것이(이는 심지어 그러한 정상적인 문화와 동일시하는 사람들까지에게도 적용된다) 이성애적 문화에서는 인지되지도, 정당화되지도, 지속되지도, 규합되지도, 기억되지도 못한다.


하지만 그러한 잔혹성이 전혀 인식되지 않고 지나쳐지는건 아니다(does not go unregistered). 예를 들어, 계속되는 이성애적 이념과 제도의 실패 사례들을 목격하는 데에 전념하는 테라피의 파생장르들로 구성된 공적 환경(public environment of therapeutic genres)은 친밀성을 통해 구성된다. 매일, 많은 국가에서, 사람들은 TV 토크쇼, 스캔들 저널리즘, 심지어는 중간문화(middlebrow culture)를 위한 주류 저널리즘의 일상적 과정에서조차 자신들이 사생활의 제도들 (institutions of privacy)에 의해 지속된다는 사실을, 혹은 이들을 지속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이러한 낭만 서사에서 우리는 도대체 어디가 잘못되었는가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즉, 일상적 폭력이 어떻게 돈, 인종차별주의, 성폭력의 역사들, 세대간의 긴장상태 등의 복잡한 압박들과 연결 되어있는지 말이다. 또한, 좋은 삶을 가져다 줄 것이라 약속하는 사랑이란 것에 대한 요구가 증가하는 것을 보며, 그리고 실패 혹은 위반을 저질렀음에도 고통받지 않고 멀쩡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는 극단적인 반응들을 보며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아마도 우리는 지나치게 많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최근에, 이성애성의 실패에 대한 증거들이 확산됨에 따라, 토크쇼 테라피에 대한 백래쉬가 생겨났다. 이로 인해 윌리엄 베넷(역: 80년대 교육부장관을 역임한 미국의 보수 정치가이자 정치이론가)조차도 해명을 해야했다. 하지만 베넷은 자신의 반규범적 행위(transgression)에 대해 고백하거나 다른 이들의 반규범적 행위들에 대해 불평하는 대신, 이성애적 테라피 문화에 대한 억압과 보이콧을 주장했다. 매일 계속되는 이성애성의 실패에 대한 인식은, 퀴어성(queerness)만큼이나 그를 불안하게 했다. “문명은 이러한 것들 중 일부를 감춰둠으로써 가능한 것이라는 걸 우린 잊고 있습니다”라고 베넷은 주장했다. “이건 변소로 향하는 굴성(tropism)이나 다름없어요.”[각주:12]




하지만 문명의 항문을 꼭 가리고 지내야만 하는가? 아니면, 이성애 문화는 친밀성을 따분하게 만드는 것을 통해 자신의 안전을 담보하는가? 친밀성에 적합하지 않은 밑바닥 문화(bottom-feeding culture)의 터무니없는 전형화와 망각이 전제되어야만 일반적인 삶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믿음이 존재할 수 있는가? 이러한 TV프로그램에서는 아무도 이성애성의 이념과 제도를 문제삼지 않는다. 매일, 이 프로그램의 MC들조차 이성애적 친밀성에 부합하는 사람들이 불행하다는 사실에 새롭게 경악하고 있다. 이미 모든것이 말해지고 행해졌지만, 이성애적 문화의 전망과 약속은 긍정주의를 위한 긍정주의나 다름없을 뿐이고, 이는, 적어도 공적으로는, 사람들의 동의가 미리 구해진 희망 같은 것이다.


최근에 비디 마틴Biddy Martin은 퀴어 사회이론가들이 사회적 상상(social imaginary)을 잠식한 이성애성의 제도들에 대한 거부를 통해서 환원적이고 반(半)-급진적(pseudo-radical)인 반(反)-규범성(anti-normativity)을 생산했다고 썼다. 마틴은 앤드루 설리반Andrew Sullivan의 글들에서 나타나는 종류의 주장들이 그저 보수파들의 환상만은 아님을 보여준다. “몇몇 퀴어 작업에서는, 애착이라는 그 사실 자체가 이미 사회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이유로 손해만 야기하는 것(punitive)이고 제한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급진적 반규범성을 주장하는 것은 벼룩 잡으려고 초가삼간을 다 태워먹는 꼴이다… 일상성과 정상성(normalcy)에 대해 그들이 갖는 거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들은 다른 사회적, 그리고 심적 삶의 면면들과 섹슈얼리티가 함께 형성하는 복잡한 구성에 대해서는 피상적인 설명만을 하며,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average people)이 갖는 딜레마에 대해서는 거의 주목하지 않는다.”[각주:13]


이 대목에서 특별히 누군가가 인용되고 있지는 않지만, 친애하는 비디는 아마도 우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다. 우리는 이 주장을 좀 더 명료하게 해 보고자 한다. 이성애규범성에 반대하는 것은 규범들 그 자체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정상화의 과정에 대해 반대하는 것 또한 일상성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이는, (비디에 의하면) 질 낮은 푸코주의자들이 주장한다는 “제한 없는 존재(existence without limit)”에 대한 지지도 아니다. (“EH,” p.123) 가족이나 아이들과의 감성적 동일시화(sentimental identification)를 쓰레기라고 결론내리는 것도, 사람들을 쓰레기로 만들어 버리는 것도 아니다. 실제 성행위(lovemaking)로 생각되는 성(sex)을 성행위(lovemaking)가 아니라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섹슈얼리티가 어떤 이념적 혹은 역사적 부담으로서 작용했든 간에, 이는 섹스가 친밀성과 돌봄(care)의 범주 안에 포함되는 것을 배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야기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여기서 주장하는 것은 성문화의 공간이 정상적인 메타문화를 유지하는 업무들로 불쾌스럽게 꾸역꾸역 채워져 버렸다는 것이다. 비디 마틴은 독자들이 인위적으로 자극된 “정상성(normalcy)에 대한 두려움”을 떨칠 수 있게 하려고 자신들을 “평범한 사람들(average people)”이라고 인식하게 한다. 이 때, 평범한 인간(average personhood)의 이미지는 단순히 묘사적(descriptive)으로만 나타난다. (“EH,” p.123) 하지만 이러한 평범성(averageness)은 역시 규범적이며, 이는 푸코가 말한 “정상화(normalization)”와 정확히 일치한다. 외부의 의지가 강요된 것이 아닌, 통계적으로 상상된 규범 주위로의 분포 말이다. 이러한 평범함(the average)에 대한 기만적인 호소는 이성애적이며, 대중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를 측정하려는 시도이다. 이는 동시에 온전하고 확고한 인격(unconflicted personhood)을 향한 이상향적 욕망의 표현이며, 이로 인해 물론 위로를 받을 수는 있겠다. 하지만 이러한 욕망은 오늘날의 사생활의 조건들(conditions of privacy)로 인해 채워질 수 없다. 사람들은 사회적 구성원의 지위(social membership)를 위해 치르는 대가와 미래와의 관계가 곧 이성애적 삶의 서사와 동일시하는 것이라고 느낀다. 또한, 현재 미국에서 생겨나는 균열들이 도처에서 이런 사람들을 수치스럽게 하고 사보타주 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각자의 친밀성의 삶에서 경험하는 분노, 불안정함, 양면성, 그리고 실패에 대한 책임을 개인이 져야 한다고 느낀다. 이성애성은 섹스가 아닌 많은 실천들에 개입되어 있어서, 이러한 헤게모니적 구성이 지배적이지 않은 세계가 (지금 이 시점에는) 상상하지 못할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는 그러한 세계를 실제로 구현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다음 번역으로 이어집니다. 본 논문은 총 4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상호교차성 실험협업단체인 페대기(https://www.facebook.com/interfemisolidarity)에 연재되는 번역물입니다. 비영리적 목적으로 퍼가시는 건 상관이 없지만 출처는 밝혀주세요 ~




  1. 이런 방식의 정치적 지리학은 폭력의 체계적 결과들을 생산한다. 퀴어들은 덜 혼잡한 지역에서 서로를 찾도록 강제되는데, 이는 범절, 낙인, 옷장(closet), 그리고 풍기문란죄에 관한 법안 등의 국가 통제 등의 복합적 요소들이 가하는 압박에서 비롯한다. 이와 같은 지역에서 게이 배셔(gay basher; 역:동성애자들을 의도적으로 찾아내어 폭력과 희롱을 가하는 사람)들이나 다른 범죄자들이 많이 모이기도 한다. 이들에 대해 경찰은 신경을 거의 쓰지 않는다. 이는 폭력과 경찰의 무관심이 퀴어들 자신이 감수해야 할 자연적인 재앙처럼 보이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1997년 다큐멘터리 영화 <살인면허Licensed to Kill>가 보여주듯, 반-게이집단의 폭력성은 법적인 방법으로 대항하기가 어렵다. 피해자들은 그 어떠한 공적 그리고 기소적 틀 안에서 앞으로 나서기를 꺼려하며, 이에 반해 게이 배셔들은 지역적 상황에 호소하면서 피해자들이 연루되도록 할 수있다. 이러한 법적 체계는 스스로가 억제해야 할 폭력이 오히려 생산되도록 돕고 있던 것이다. [본문으로]
  2. 이브 코소프스키 세지윅Eve Kosofsky Sedgwick의 <옷장의 인식론Epistemology of the Closet> (1992) 참조. [본문으로]
  3. 특히 인문학계 내에서의 게이/레즈비언 이론은 정신분석학적인, 혹은 정신분석학적 스타일의 주제형성 모델들을 빈번하게 강조한다. 물론 이 이론들 간의 차이점들은 중요하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이 이론들 모두 남/녀 카테고리의 차이나 이성애규범성의 과정과 목적을 모두 지나쳐 가려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중요한 세 가지 명제적 패러다임은 다음과 같다. 1. 인간 정체성 그 자체가 태아때부터 내장된(hard-wired) 젠더 정체성화 과정에 의해 근본적으로 형성된다는 주장. 2. 비교적 일관성이 있고 수직적으로 안정적인 이성애적 이념의 지배력을 젠더 정체성의 명확함과 동일시하는 주장. 3. 남근중심적 상징계 내에서의 자신들의 위치성이 지니는 운명을 살아내는, 젠더화된 주체들과, 이들을 생산해내는 그 남근중심적 상징계에 중점을 두자는 주장. 이들 모델들의 정신분석학적, 그리고 철학적 혜안과 한계는 좀 더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한다. (우리가 느끼기에, 이들은 이성애규범성의 실천, 제도, 그리고 부조화의 형태들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있다) 지금으로써는, 다음과 같은 작업들이 관련 주제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아카이브로서 자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주디스 버틀러의 <중요한 신체들Bodies that Matter: On the Discursive Limits of Sex> (1993), 루스 이리가레의 <타자 여성의 스펙큘럼Speculum of the Other Woman>과 <하나가 아닌 성This Sex Which Is Not One> (1985), 테레사 데 로레티스Teresa de Lauretis의 <사랑의 실천The Practice of Love: Lesbian Sexuality and Perverse Desire> (1994), 카야 실버만Kaja Silverman의 <경계선의 남성 주체성Male Subjectivity at the Margins>(1992), 모니크 위티그Monique Wittig의 <이성애적 정신 및 기타 에세이집The Straight Mind and Other Essays> (1992). 섹슈얼리티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작업은 행동과 경향을 선천적 혹은 후천적 “정체성”과 항상 결부시키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레오 버사니Leo Bersani의 <호모스Homos> (1995)와 “Is the Rectum a Grave?” (1988) 참조. [본문으로]
  4. 메타문화라는 개념은 그레그 얼반Greg Urban에게서 차용했다. 그레그 얼반의 <문화에 대한 담론중심적 접근A Discourse-Centered Approach to Culture: Native South American Myths and Rituals> (1991), <예지계적 공동체Noumenal Community: Myth and Reality in an Amerindian Brazilian Society> (1996) 참조. 정상화 개념에 대해서는 푸코의 <감시와 처벌> (1979년의 알란 쉐리단 번역본) 184-5쪽, <성의 역사> 144쪽 참조. 여기서 푸코의 주장은 조르쥬 캉길렘이 쓴 <정상과 병리> (캐롤린 R 포셋/로버트 S 코헨 번역본, 1991)의 재검토본에서 비롯한다. [본문으로]
  5. 우리는 여기에서 일라이 자렛스키Eli Zaretsky의 <자본주의, 가족, 그리고 사적 삶Capitalism, the Family, and Personal Life> (1986), 그리고 스테파니 쿤츠 Stephanie Coontz의 <사적 삶의 사회적 기원The Social Origin of Private Life: A History of American Families, 1600-1900> (1988)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성애규범성이 쿤츠의 저서에서는 가시적인 문제로 자주 드러나는 편이 아니라는 것을 유의하자. [본문으로]
  6. 민영화와 친밀성의 정치학에 대해서는 로렌 벌랜트의 <미국의 여왕 워싱턴에 가다 The Queen of America Goes to Washington City> 1-24쪽과 “Feminism and the Institutions of Intimacy” (1997), 그리고 호니그의 <집이라는 장소 No Place Like Home>, 로잘린드 폴락 펫체스키Rosalind Pollack Petchesky의 “The Body as Property: A Feminist Re-vision” 참조. 민영화와 국가자본주의에 대해서는 데이빗 하비의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 (1989), 그리고 마이크 데이비스의 <쿼츠 시티 City of Quartz: Excavating the Future in Los Angeles> (1992) 참조. [본문으로]
  7. 공동체에 대한 이러한 언어는 게이 역사 서술에 있어 문제가 된다. 에스더 뉴튼Esther Newton의 <체리 그로브, 파이어 아일랜드: 미국의 첫 게이 그리고 레즈비언타운에서의 60년Cherry Grove, Fire Island: Sixty Years in America’s First Gay and Lesbian Town> (1993), 엘리자베스 라포브스키 케니디Elizabeth Lapovsky Kennedy와 매들라인 D. 데이비스Madeline D. Davis의 <가죽 부츠, 골드 슬리퍼 Boots of Leather, Slippers of Gold: The History of a Lesbian Community> (1993), 심지어는 조지 촌시George Chauncey의 <게이 뉴욕Gay New York: Gender, Urban Culture, and the Makings of the Gay Male World, 1890-1940> (1994)같은 작업들은 다른 측면에서는 빼어나고 중요한 연구들이지만, 이들 연구에서 공동체라는 것은 온전한 개인, 지역적, 경험적, 거리적, 그리고 포화적인 대면 관계들로 상상된다. 하지만 퀴어 세계는 이런 형태들로 현현하는 경우가 매우 적다. 뉴요커들의 주말 나들이에 매우 크게 의존하는 계절 리조트인 체리 그로브(Cherry Grove)는 아마도 “게이 그리고 레즈비언 타운gay and lesbian town”의 전형이라기보다는 퀴어 현장(queer site)이 교통수단이 대안 세계들을 투영하는 특수화된 공간으로서 작용하는 방식의 전형에 더 가까울 것이다. 존 디에밀리오John D’Emilio의 <성적 정치학Sexual Politics, Sexual Communities: The Making of a Homosexual Minority in the United States, 1940-1970>은 퀴어를 위한 지역 공동체 이상화에 대한 상상력에 관해서 특히나 흥미로운 예시들 중 하나이다. 이 저서에서 그는 음주문화 같은 지역 문화와 정치적 조직화로 양분된 궤적을 기록하는데, 예를 들어 샌프란시스코에서 “운동”과 “하위문화”가 언제 결합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그에 의하면, 이 결합의 결과가 새로운 이상향의 새로운 형성이다. 디에밀리오는 “‘공동체’라는 것은, 사실 공통된 성적 지향성을 두고 형성되는 것이다”라고 서술한다. (195쪽) “공동체”라는 것이 사실로 존재한다는 것을 선언하는 바로 그 문장에서, 디에밀리오는 (현명하게도) “공동체”라는 단어에 큰따옴표를 친다. [본문으로]
  8. 아르테미도로스Artemidorus의 <꿈의 열쇠 Oneirocritica> 1.2, 데이빗 M. 할퍼린의 “Sex before Sexuality: Pederasty, Politics, and Power in Classical Athens” (1989) 49쪽에서 인용됨. [본문으로]
  9. 할퍼린, “Sex Before Sexuality” 49쪽. [본문으로]
  10. 자명한 친밀성의 성격으로서건, 인간적 가치관으로서건, 이러한 “상호성의 그물”이 가정되지 않는 친근함에 대한 연구는 매우 드물다. <사랑의 단상>에서의 롤랑 바르트, 그리고 <열정으로서의 사랑Love as Passion> (1986)에서의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이 서로 매우 상이한 방식으로 친밀성의 생산에 대해 분석적으로 설명하려 시도를 하기는 한다. 좀더 전형적인 예시는 <친밀성의 변화The Transformation of Intimacy: Sexuality, Love, and Eroticism in Modern Societies> (1992)에서 앤서니 기든Anthony Gidden이 친밀성을 “순수한 관계성”으로 이론화하려는 시도가 되겠다. 이 저서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결혼이나 번식같은 사랑과 관련없는 제도들과 맥락들로부터 사랑의 “순수한 관계성”을 분리시키려고 했던 “선구자들은 바로 게이들이다.” [본문으로]
  11. 로렌 벌랜트와 마이클 워너의 “What Does Queer Theory Teach Us about X?” PMLA 110 (May 1995) 345쪽 참조. [본문으로]
  12. 베넷의 말을 모린 다우드Maureen Dowd가 뉴욕타임즈 기사 “Talk is Cheap”에서 인용. 1995년 10월 26일 A25면. [본문으로]
  13. 비디 마틴Biddy Martin, “Extraordinary Homosexuals and the Fear of Being Ordinary,” Differences 6 (Summer-Fall 1994): 123쪽. 이하 “EH.”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