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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 Self, Writing Nation 자신 쓰기, 민족 쓰기. (글머리 및 "중간자의 위치에서" 일부 번역)

글머리

 

1990년에, 이듬해에 열릴 아시아계 미국연구회 (Association for Asian American Studies)<<딕테>>를 논의 주제로 넣자는 제안을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저희는 테레사 학경 차의 작업을 아시아계 미국인들에게 소개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대해 어떠한 긴급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저희는 동시대의 비평가들 사이에서 이제 막 시작되었던 <<딕테>>를 둘러싼 공론에 개입하기를 원했습니다. 그 동시대 비평가들은<<딕테>>의 논의에 있어서 한국 혹은 한국계 미국(Korean America)의 문제를 대부분 등한시하거나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차학경의 <<딕테>>에 대한 재평가를 통해 <<딕테>>가 재현하고 있는 구체적인 역사들, 그리고 이 작업에서 드러나게 되는 유물론적 역사들일본의 식민주의, 한국의 공식적이고 비공식적인 민족주의 운동들, 한국 페미니즘, 한국전쟁, 그리고 한국인들의 미국 이민에 의거한 분석이 전무하다는 것을 언급하고 싶었습니다. 여기서 또 나아가, 저희는 식민주의, 민족주의, 인종, 민족, 젠더, 계급 등에 예민하게 다루는 이러한 유물론적 분석이 특히나 시급하다고 느꼈습니다.

            이 책에 수록된 네 편의 논문들의 초기 버전을 19916월 아시아계 미국연구회 연례 모임에서 발표한 뒤, Third Woman 출판사의 창립자인 노르마 알라르콘(Norma Alarcón)이 이들을 책으로 묶어 출판하자는 제안을 해 왔습니다. Third Woman 출판사는 10년동안 치카나(Chicana) 그리고 라티나(Latina)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여 왔고, 알라르콘은 다른 유색인종 여성 작가들의 글을 적극 출판하고자 했습니다. 저희가 Third Woman 출판사와 함께 하기로 했던 것은 저희가 저희의 작업에 대해 편집권과 창작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시각 작가 민용순에게 책의 디자인과 한 편의 비주얼 에세이를 부탁드렸습니다. 민용순 작가는 버클리와 뉴욕에서 테레사 학경 차를 알고 지냈고, 저희가 굉장히 높게 사는 작업을 하는 작가입니다.

           19924, 전세계에 퍼져 있는 한국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취약한 토대를 뒤흔들었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4.29라고 불리우는 항거-폭동에서, 코리아타운과 LA 남부에 살던 수천 명의 한국인 이주민들의 삶과 생활이 파괴되었습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4.29는 한국계 미국 역사(Korean American history)에서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한국인들의 한恨은 이제, 폭력적인 수탈을 통해서만 미국인 되기”가 가능했던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유산을 강압적으로 잇게 된 한국계 미국인들의 혼에 깃들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와중에, 한국계 미국인들은, 이전에 겪었던 고난들과 마찬가지로, 민족주의의 중요함을 자신들의 힘의 질긴 원천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LA의 위기상황이 한국계 미국인들에게 끼친 영향은, 저희가 <<딕테>>는 한국과 한국계 미국인들의 민족주의에 관한 매우 중요한 텍스트이며, 새로운 관심의 형태, 특히 역사주의적이고, 막스주의적이고, 포스트콜로니얼적이며 페미니즘적인 접근들을 고려하는 비판적 관심을 받아 마땅하다는 감각을 형성하는 데에 매우 큰 기여를 했습니다.

           이 책에 실린 <<딕테>>에 대한 다섯 편의 글들 중에서, 오로지 민용순 작가의 작업만이 4.29 이후에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머지 네 편의 글들은 LA의 위기상황이 대해 노골적으로 언급하지는 않는 데 비해, 민용순 작가의 비주얼 에세이는 그에 대해 노골적으로 언급함으로써, <<딕테>>, 그리고 다른 네 편의 글과 한국/한국계 미국사의 다른 핵심적 사건들과 4.29 사이의 관계들을 읽기 위한 또다른 틀을 제공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역사는 이 책의 모든 측면에서 살아 숨쉬며, 민용순 작가의 작업 또한 이 책에 현실의 충격을 가함으로써, 어떤 면에서는 <<딕테>>와 다른 비평문들의 주제이기도 한 위기의 문법(syntax of crisis)에 방점을 찍습니다.

           LA의 비극은 테레사 학경 차가 <<딕테>>에서 제기하는 문제점들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을 다시금 상기시킵니다. 4.29 때 한국계 미국인들에게 일어난 일은, 저희로 하여금 이 책을 펴내게 만든 동력인 한국 중심의 역사와 비판적 담론의 부재와 같은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희는 독자들로 하여금 고향home”, “정당한 정체성legitimate identities,” 한국계 미국인들의 미국 시민권, 그리고 민족주의 서사와 여성 정체성 간의 관계들의 의미 같은 질문들을 마음에 새기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 책이 <<딕테>>에 대해 좀 더 많은 사유와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문화정치학을 위한 더 많은 가능성을 북돋을 수 있는 활발한 논의의 장의 그저 한 시작점이 되기를 바랍니다.

 

일레인 H. Elaine H. Kim

캘리포니아 주 버클리

199210

 

 

 

 

중간자의 위치에서: 테레사 학경 차의 <<딕테>>에 대한 한국계 미국인의 단상

일레인 H.

당신은 관객이다
당신은 나의 먼 관객이다
나는 당신에게 말한다
내가 먼 친척에게 말하듯
오직 다른 사람의 묘사를 통해서만 보이고 들리는
먼 친척인 것처럼 

당신이나 나나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다
나는 내가 당신에게 들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 밖에
나는 내가 당신에게 들리기를 바랄 수밖에 

관객
머언 친척 
(테레사 차의 1977년 예술작업. 편지 형식으로 된 시. 아래의 다른 모든 큰따옴표 인용문은 <<딕테>>에서 인용)

처음 <<딕테>>를 훝어보고 난 순간, 흥미를 잃어버렸다. 테레사 차는 내가 아니라, 오히려 내가 인식하기에 나와는 거리가 먼 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 같았다. 읽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테레사 차 옆에 서서 그녀가 를 부르는 것을 그저 지켜보는 것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 시기에 난, 미국에서의 삶에서 지워짐과 소외로부터 날 보호해 줄 한국계 미국인 정체성을 규정하고 내 것으로 만들려고 아둥바둥하고 있었다.[1] <<딕테>>에서 내가 찾은 것은 부조화스러워 보이는 배치, 그리스 신화에 대한 레퍼런스, 프랑스어 문법 연습 등이었고, 이런 것들은 내가 찾는 정체성, 즉 특정적인 것들로 규정되어 있고, 완제품 같으며, 계량하기 쉬운, 경계가 구분지어진 응고된 본질(congealed essence)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이 때에는, 내가 얼마나 한국인다운지 고민하면서 너보다 한국인다워지기 위해 노력했다. 이분법적인 사고가 더 익숙했고, 공동체 활동에서 설명되던 경제학적인 막스주의 개념들에 영향을 받았었고, 한국계 미국인 정체성에 대한 사회정치학적 서사에 익숙했으며, 사실주의적 아시아계 미국문학과 시를 즐기던 나는, 이렇게 다층적이고, 치열하게 사적이고, 감성적이고, 개인주의적인 텍스트를 맞이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유년기와 청소년기 시절, 내게 너 어디 사람이니?” 라고 묻는 사람들은 한국이나 한국인들에 대해 하나도 모르던 사람들이었다. “중국인이야, 일본인이야?”라고, 마치 그 외의 가능성 따윈 없다는 양 자신있게 묻곤 했다. 당연히 한국인은 커녕,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가능성은 생각도 못했겠지. 내가 들었던 세계사 수업은 로마와 그리스로 시작했고, 중국이랑 일본은 아주 조금 언급되었으며, 한국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딕테>>에서 한국 민요인 <봉선화> 가사를 읽는 일은 정말 기분이 이상했는데, 그건 내가 영어로 된 책에서 이 노래 가사를 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릴 적 이 가사들을 외울 땐, 이 노래가 마치 다른 세상 것처럼 느껴졌다. 내 주위의 영어 사용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그냥 단어들이 한국어로 되어있던 것뿐만이 아니다. 그 노래의 의미, 즉 역사, 기억, 그리고 나로부터 너무 먼 사람들의 감정 (물론 대부분의 다른 미국인들과는 아주 다른 종류의 거리감)들이 마치 다른 행성에서 온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의 부모님,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자 내게 생명을 주고 정체성을 키워준 부모님은 이러한 역사, 이러한 기억들과 감정들을 통해 자신들을 규정했다.

<봉선화>는 한때 어린 소녀들이 뛰놀던 여름 밭에 피었던, 그리고 지금은 춥고 가을바람에 쓸쓸한 땅에 서있는 꽃을 언급하고 있다. 이 꽃이 일본의 식민지 통치 아래의 한국을 상징하기 때문에, 이 노래는 테레사 차가 나타내는 것처럼 (46) 금지되었다. 나의 아버지는 일본인들이 <봉선화>를 부르는 것을 반항으로 간주하였고 체포될 거리를 주는 거라고 이야기해 주셨다. 한국인 망명자들이 항상 눈물이 그렁그렁하면서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이 떠오르는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무슨 수로 1950년대 메릴렌드에서, 한국은 일본의 한 현이라고 알고 있거나 아예 들어본 적도 없는 학교 애들한테 이런 것들을 설명해 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려고 시도하는 것 자체가 싫었다. 어떤 면에서는 <봉선화>나 다른 많은 것들이 미국에서의 삶 속의 비밀(미국 삶의 비밀이 아닌) 중 일부가 되었다. 얼마나 주류문화에서 무시당하거나 거부당하건 내게는 비밀로서 지켜지는 우리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중요했다. <<딕테>>에서, 테레사 차는 일본의 식민통치 아래 어둠속에서만 사용되는 한국의 언어를 어머니를 위한 안식처로 상상한다. (45) 이처럼 비밀스러운 세계에 속하는 것은 바깥 것과의 관계를 좀 더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어 줬다. 아마도 그게 <<딕테>>에 나오는 <봉선화>를 비롯해 다른 한국의 문화적 아이콘들이 내게는 멸종 위기에 놓인 정체성의 파편들처럼 보였고, 그래서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비밀로서 내게 부여된 것은 지배 문화에서의 무無, 비가시성, 결여, 그리고 부재로서 정당화되었다. 하지만 이 비밀의 생명력은 나의 어린 시절의 세계에서 이어져온 기억에 의해 유지되었다. 이 어린 시절의 세계는 우리 집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만큼이나 현실적혹은 비현실적이지도 않았다. 오늘날의 한국계 미국인 여성들에게는 한국계 미국인의 역사와 정치학, 그리고 페미니즘적 위치에 관한 구체적인 지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덕에, 이런 패러다임들이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한국계 미국인 주체성에 대한 감각이 단지 차이에 대한 탐구만으로도 얼마나 취약하고 위험하게 되는지에 대해 상상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개념적인 비가시성이나 미국과 한국의 지배담론에서 무관하다고 내쳐지는 상황에 차례로 맞서, 나는 한국계 미국인에게 주어진 한에서 최대한 (당시 남/북한으로 나눠진 민족주의의 정치학을 생각해서) 공식적이거나 대항적인 한국인정체성에 희망을 걸었다.[2] 이러한 바램이 한국계 미국인의 여성적 가능성을 찍어 눌러야 한다는 것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공식적인 미국인 정체성처럼, 공식적인 한국인정체성 또한 가차없이 남성적이거나 굉장히 남성 중심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당시 내게는 자기결정권의 어느 정도를 획득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으로 보였다.

대가는 컸다. “한국인답게되는 것은 한국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한국계 미국 이슈들을 소외시키고[3] 페미니즘적 관심을 도외시하도록 요구했다. 특히 페미니즘적 관심은 문화민족주의 운동에서 좋지 않는 의미로 부르주아적이거나 서구적이라며 자주 비난받았다. “진짜한국인으로 탈바꿈하고 싶었던 젊은 한국계 미국인 여성이라면 일단 한국어가 능숙해야 했는데, 이는 적어도 1960년대 여성에게는 여성적인 한국어, 즉 부드럽고 간드러진 목소리에 질문체나 아이 같은 탄성으로 말을 맺고 경어를 써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남자에 의해 남자에 관해 쓰여진 공식적 한국사를 공부해야 했으며 공식적인 혹은 대항적인 민족서사를 지지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 유교의 이상적 가치에 대한 20세기 해석들, 즉 겸손함, 검소함, 순결함, 정절, 그리고 모성애/희생정신 등에 따라서 한국 여자처럼 행동해야 했다.

나는 이러한 한국 여성으로 거듭날 수 없었다. 스물 세 살 때, 나는 아이비 리그 학교 졸업장으로 무장하고 한국인이 되겠다는 불타는 욕구와 함께 서울로 일년동안 일하러 온 적이 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때, 나는 미국인, “한국인도 아닌 듯한 기분이었다. 거기다가, 내 젠더 정체성에 대한 감각은 뿌리깊게 흔들렸고, 다른 한국인들과 만나면서 든 생각은 내가 허술하고, 못생겼고, 여성으로서 정말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그 해 내내,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내게 어떻게 올바르게 걷고 웃고 움직이고 앉고 입고 생각하고 말해야 하는지 가르치려 들었다. 나중에 깨달은 것은, 이게 다 전부 한국인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적합한 자아를 구성하기 위한 가르침들이었다는 거다. 난 내가 한국 나이”(잉태되었을 때부터 나이를 세므로, 태어났을 때부터 한 살에, 새해마다 남들과 다같이 한 살을 더 먹는 계산법)로 스물 다섯이었는지 몰랐고, 이 나이는 이미 결혼 적기기 한참 지난 나이였는지도 몰랐다. 당시에 서울에 사는 대부분의 젊은 여성들은 스물 세 살이면 결혼했다. 내 친척들, 지인들, 심지어는 모르는 사람들도 나 같은 사람은 남편 찾기가 참 힘들거라며 동정심의 표시로 한숨을 쉬었다. 남편 없이는 내 운명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7 1/2ft의 내 발은 도둑놈 발” (도둑들은 항상 도망 다니느라 발이 크다고 한다)이었고 남자 고무신밖에 맞는 신이 없었다. 피어싱한 귀 때문에 필리핀 사람이나 중국사람같아 보인다고 얘기를 들었고, 항상 뻣뻣하고 어색하게 고개숙여 인사를 했으며 한국어를 잘 못했다. 무슨 옷을 입어야 할지 어떤 머리를 해야 할지도 몰랐지만, 다들 옷을 더 잘입고 웨이브 펌을 해도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4]

이 불완전하고 무결하지 않은 한국인여성 자아가 얼마나 억압적이든, 이 자아를 버리는 것은 다른 종류의 억압에 몸을 내던지는 것을 의미했다. 나의 시대의 한국계 미국인 여성이 치뤄야 하는 한국인 정체성에 대한 대가가 너무 크다고 결론짓는 이들은 이 여성들이 위태롭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 외줄 아래에 놓인 대안들을 좀 들여다 봐야 한다. 서구의 적극적인 동정심은 이 여성들을 아시아 가부장주의의 피해자로서, 그리고 서구의 문화적 우월성을 가장 단적으로 입증하는 사례로서 작용한다. 이게 아니면 무슨 이유로 미국인들이, 그리고 아마 거의 모든 서구인들이 중국 문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전족纏足에 대해서는 예외없이 알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 나는 이따위 판타지에 협조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당연히 백인 남자들이 나를 아시아 남자들로부터 구원해 주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한국계 여성으로서 이것이 악어 눈물임을 눈치채고 여기에 동참하는 것에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옛날 영화에 나오는 아시아인 남성과 여성들만큼이나 나 또한 가부장적이고 인종차별적인 시선의 대상이 되어 봤기 때문이다.

<<딕테>> 출판 후 10년 동안, 아시아계 미국인, 그리고 특히 한국계 미국인 공동체의 힘과 규모는 꾸준히 증가해왔고,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복잡하고 다중적이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정체성에 대한 요구의 증가로 이어졌다. 나의 경험에 의하면, 이 새로운 상황은 유색인종인 우리 자신들에 비추어 미국미국인이 갖는 예전의 의미들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혼종성에 대한 탐구를 가능하게 해 주었으며, 이는 구체적으로 한국계 미국인 정체성을 유효하게 하고, 한국인 그리고 한국계 미국인들의 페미니즘적 문제의식에 대한 민족주의적 답변들의 한계를 지적해 주었다.

다시 <<딕테>>로 돌아가자면, 나는 현재 여성한국인이 협업할 수 있는 공간을 탐색하고 있다. 테레사 차는 정체성과 정체성 정치를 문제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역시 한국 민족주의 서사에도 서구의 페미니즘 서사에도 속하지 않는 변화하는 한국계 미국인 여성의 정체성을 위해 유용한 지점들을 민족주의 담론에서 꺼낸다. “여성한국인혹은 한국인한국계 미국인의 이항대립을 거부하며 테레사 차는 제 3의 공간과 같은 것을 만들어내고 기리는데, 이 공간은 개인주의적 비전과 힘의 원천이 되는 망명의 공간과도 같다. 실제로 끝없는 차이를 주창하기 위해 어떤 구체적인 정체성을 제시하는 것과는 다르게, 그는 지배 논리인 이분법의 무너짐을 예상한다. 그는 매우 구체적인 문화적 맥락을 위치시키고, 한국인, 한국인 여성, 그리고 한국계 미국인들을 담론으로 끌어들이며 이를 통해 개인의 자아 탐색은 물론 물화되지 않고 본질화되지 않은 공동체성을 위한 공간을 연다.

 

I.

또 하나의 다른 서사시로부터 또 하나의 다른 역사. 빠져 있는 이야기로부터. 수많은 이야기들로부터. 상실. 역사의 기록들로부터. 또 하나의 다른 이야기를 하기 위한, 또 다른 낭송들을 위한. (99)

일본의 식민치하 아래서 정치의식이 무르익은 많은 한국인 망명자들처럼, 나의 아버지 또한 열정적인 민족주의자였고, 한국인들이 얼마나 용감하고 재능있는 민족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길 좋아하셨다. 우리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우리에게 과거와 현재의 한국인 영웅들, 즉 이순신, 손기정 등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다. 이순신의 철갑선은 히데요시의 1592년 조선 침략을 저지했고, 1936년 나찌 치하에서의 독일 올림픽에서 장거리 경주 달리기 금메달을 딴 손기정은 히틀러의 아리안 우월주의 노선의 허점을 까발렸다. 나의 아버지는 또한 한국인들은 수많은 중요하고 놀라운 발명을 해냈다고 주장하셨다. 화약이라던가, 활자라던가, 경주에 아직도 남아있는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천문관측대라던가. 그리고 배우기 매우 쉬워 문맹률을 매우 낮게 할 수 있었던 한글의 논리성이라던가.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우리 집 밖에서의 미국 환경에서는 아버지가 이야기했던 것들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당나라 때부터 이어져온 중국과의 복속관계 때문에, 한국에서의 발명은 전부 중국 것으로 흔하게 여겨졌다. 마찬가지로, 손기정은 당시 일본의 식민치하 시기 일본 유니폼을 입고 올림픽 마라톤을 뛰어야 했다. 금메달은 일본으로 갔고 세계에 눈에 비친 손기정은 일본인일 뿐이었다. 내가 읽었던 미국 교과서에 의하면 활자는 구텐베르크에 의해 발명됐고, 책에 실린 유럽의 성곽과 성당 사진들에 비하면 신라의 관측대는 너무 초라하고 작아보였다. 이 때 아버지가 이순신 이야기도 지어낸가 아닌가 하고 의심을 시작했다. 한국 작가, 화가, 음악가, 과학자, 철학가, 정치가나 여성들에 대해선 듣지도 읽어보지도 못했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존재하기는 했나 하는 수준이었고, 존재했더라 하더라도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고 생각됐다. 내가 한국인이었더라면 존재할수도, 무언가를 바꿀 수도 없을것 같았다. 내가 10대였을 때,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서 나는 한국은 아마 세계 국가에 끼지도 못했을 거라고, 인간 문명에 기여한 한국인이 아무도 없으니까, 라고 선포했다. 지금은 이때 내 아버지가 뭐라고 하셨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딕테>는 나와 같은 한국계 미국인들이 단지 우리 부모님들의 환상일 거라고 생각했던 그 한국을 우리 시야로 끌고 들어온다. 테레사 차가 요구하는 이러한 가시성은 서구 역사의식 속의 한국의 부재에 맞선 한국계 미국인의 존재의 기반을 생성한다. 

 

...(중략)...

 

V

<<딕테>>는 많은 의미로 대립적인 텍스트이다. <<딕테>>의 역설들은 격자무늬처럼 얽힌 추방의 공간들 사이, 즉 한국과 미국 사이, 북과 남 사이, 내면과 외면 사이, 그리고 그의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특수한 한국 민족주의적 동력과 서구 예술인들의 세계 사이에 놓인 테레사 차의 위치에 근간해 있다. 하지만 그가 중간”, 즉 드러나게 되면 빈틈없는 현실이라는 환상을 깨어지게 하는 틈새, , 균열, 이음새들에 집중하면서도 테레사 차는 자신의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의 구체성을 내세운다. 그에게 있어서는, 중간이라는 것은 우리들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사적인 보금자리이며, 그의 한국계 미국인 정체성의 중요성을 무시한다는 것은 존재와 자아를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에게 있어서, 개인의 지워짐은 공동체의 지워짐과 분리될 수 없다.

최근, <<딕테>>는 불확정성, 파편화, 그리고 변화하는 다양한 정체성들 사이에서의 자유로운 유희 등의 포스트모던 개념들에 매료된 많은 비평가들로부터 점차 큰 관심을 받고 있다. 권력의 문제가 안 보이는 척 하고 있을 수 없기에, 나는 한국인들 그리고 한국계 미국인들의 <<딕테>>에 대한 반응에 대해서는, 이들이 <<딕테>>에서 나타나는 한국적 레퍼런스에 집중하느라 텍스트의 다른 요소들을 등한시하는 지점까지 다다른다 하더라도 별로 불편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5] 이전에 가르쳤던 문학 수업에서, 말수가 없던 젊은 남성이 <<딕테>>를 수업 도서목록에서 발견했을 때가 생각난다. 그는 바로 <<딕테>>를 읽었고, 테레사 차에 관한 세션에서 텍스트에 나오는 많은 역사적 레퍼런스들에 대해 자랑스럽게 발표했다. 어떤 의미에서, <<딕테>>는 그에게 자신의 것이라 부를 수 있는 미국 문학작품이 되어 줌으로써[6] 그로 하여금 그저 미국에서가 아닌 미국살아갈 수 있게 해 줬다. 테레사 차가 자신의 정체성들의 구체성을 주장할 때, 그는 한국과 한국인이 존재하지 않는 척 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한국계 미국인 독자들이 텍스트의 한국 역사에 관한 레퍼런스에만 관심을 가진다 하더라도, 이러한 경험은 정서를 고취시키고 자신감을 높인다. 나는 <<딕테>>와 다른 포스트모던텍스트들 사이의 관계성을 탐구하기 위해 진심으로 노력해서, 테레사 차의 작업을 그의 한국적 레퍼런스에 대한 주요 언급 없이 논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이들에게 훨씬 덜 관대하다. 왜냐하면 널리 읽히는 문학 학술지 출판사에 달려가 자신의 관점을 싣게 할 자들은 이러한 사람들이지, 테레사 차의 작업을 한국 시인 이상李箱과 비교하는 한국인 저널리스트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딕테>>에는 다중적인 주체성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딕테>>는 작가가 발언하는 지점에 위치한 문화적, 인종적, 그리고 전지구적 관계망을 무시하는 자아론들을 시험대에 올린다. 다른 모든 텍스트들처럼, <<딕테>> 또한 구체적인 역사와 맥락을 갖고 있으며, 테레사 차는 반복적으로 이에 주목한다. 공식서사에서 제외된 서사들반식민 투쟁, 한국 역사 내 여성투쟁, 그리고 한국계 미국인 여성들의 자아와 주체성을 향한 주장을 각인시킴으로써 말이다. 이러한 테레사 차의 작업은 아무데도 아닌데서 모든 것을 다 보는 것이 아닌, 어느 특정한 곳에서 특정한 것들을 보는” “상황적 지식이다 (하트삭 1989, 해러웨이 1988). 한국계 미국인 여성으로서 테레사 차에 대한 언급 없이 <<딕테>>를 논한다는 것은 텍스트를 탈정치화 시킨다는 것이며 이는 곧 대항적 잠재력과 말수가 적었던 젊은 학생이나 나 같은 이들의 정서고취의 가능성을 박멸해 버리거나, 적어도 매우 크게 감소시킨다.

후기구조주의 비평가들이 테레사 차의 한국 핏줄을 무시하고 그로 인해 한국계 미국인의 정체성과 젠더를 부인해 버릴 때, 이는 의미가 없지 않은 누락의 사례 중 하나이다. 이 비평가들은 일종의 역 오리엔탈리즘(reverse Orientalism)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오리엔탈리즘에 의하면, 우리는 모두 같은 (백인) 사람이다. 역사적으로, 미국 내의 이러한 지배 문화는 유색인종들에게 열등한 차이와 비가시적인 동일성 중 하나를 고르라는 상호배제적인 선택만을 강요해 왔다. 테레사 차의 한국적 그리고 한국계 미국인적인 레퍼런스들은 우리로 하여금 서구에서의 우리가 의존하고 최고로 위계화하는 지식군으로부터 한발짝 더 나아가기를 요구한다. 한국계 미국인 여성의 역사 경험을 넣음으로써, 테레사 차는 헤게모니적 전제를 시험대에 올리며 기존에 부재해 있었거나 소외되었던 이들의 힘을 북돋는다.

나는 테레사 차의 작업을 그의 한국계 미국인 정체성을 통해 접근하고 싶다. 나는 <<딕테>>양자택일either/or”이 아닌, 특정 집단과 개인 자아 사이의 구분을 흐리게 하는 양자포괄적both/and” 텍스트로 본다. 이러한 텍스트는 개인의 꿈과 기억에 대한 강렬한 정서적 그리고 사적인 탐구를 가능하게 함과 동시에, “내면의 자아의 형성을 돕고 이를 경계선의 양쪽, 즉 안쪽과 바깥쪽에 동시에 위치시키는 외부로서 작용하는 역사와 정치학에 대한 열정적인 논쟁을 제공한다. 그리하여 테레사 차의 내부의 피와 외부의 잉크에 대한 강조가 설명된다. 우리는 민족에 우리 조상이 반식민 투쟁을 맹세하며 흘린 피, 그리고 그들과 우리들 자신을 가시화하기 위해 써내리는 잉크를 통해 민족과 연결되어 있다. 그는 자신의 망명생활의 구체성들을 기리는 동시에, 다른 이들이 과거를 재해석하고 수많은 다른 중간자들을 기릴 수 있도록 길을 터 준다.

 

 

영어 원문

Kim_english_original.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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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딕테>>에 관한 글에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이 작업이 다른 텍스트들과는 다르게 내게 다양한 진입경로들과 소유권에 대한 감각을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이 작업은 내 것이면서도 동시에 내것이 아니다. 그것 말고도, 나는 다른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글을 읽으면서 사실 우리가 쓰는 비평에서 우리는 대부분 우리들 자신들에 대해 쓰고 있지 않는 척 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2] 적어도 1980년 광주항쟁 이후 몇 년간 남한의 많은 곳에서 반미감정이 고조되었고, 이념 투쟁을 벌이던 이들은 당시의 고조되던 정치적 목적과 함께하려던 한국계 미국인들과 재일교포들까지 조건적으로 그리고 전략적으로 한국인으로 포함시켰다.

[3] 예를 들어 언어 유지와 교민 공동체 내 정치적 감시, 미국과 한국 사이의 불평등한 정치/경제적 관계에 기인한 미국 내 한국계 미국인들을 향한 인종차별, 그리고 해외 반식민 투쟁 등.

[4] 20년도 더 지나서 서울에 또다시 1년동안 지내러 갔을 때, 난 내가 뭐든 다 받아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더 좋은 딸, 그리고 어머니로 있지 않았다는, 아내로서 성공하지 못했다는, 그리고 가사일과 요리가 엉망이고 더 못생겨졌고 더 허술해지고 더 엇나갔다는 회한을 한바탕 듣게 되었다. 이 때 한국계 미국인 남성들은 서울에 와서 자신감을 잃긴 커녕 심리적으로 활력을 얻게 되는 걸 보고, 난 드디어 이 감각이 문화 충돌로 인한 자아상실이 아니라 혼란스러움이라는 걸 깨달았다. (물론 이걸 깨닫는데 친구가 좀 도와주긴 했지만) 왜냐하면 난 항상 이를 젠더문제가 아니라 인종문제로 생각하고 있었고, 미국과 남한의 가부장제 형태의 차이 때문에 그 둘의 닮음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여기서 충돌은 미국 문화적으로 형성된 여성성이 남한의 그것과 부딪혔을 때 일어나는 것이었다.

[5] 예를 들면, 한국 매체에 실렸던 차학경은 교포 문단의 이상李箱이 생각난다. (동아일보, 최연홍. 1988.11.19)

[6] 나는 연설가로서, 가수로서, 혹은 배우로서 어마어마한 재능을 가진 한국 이민자들과 망명자들을 많이 만났고, 그들의 언어적 그리고 문화적 이방인으로서의 위치로 인해 그들의 재능이 이 나라에서 절대 꽃피울 수 없음을 안타까워 한 적이 있다. 10년도 더 전에, 금지곡이었던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 카세트 테잎을 밀반입해서, 여기에 기반한 한국어 뮤지컬이 무대에 올라간 걸 본 기억이 난다. 이들은 영어로 된 연극이나 뮤지컬에는 절대 참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떤 이유에선지, 미국에서 한국어로 된 공연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미국에서 이들이 갖는 소속감을 강화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