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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회차(마지막)] 로렌 벌랜트Lauren Berlant, 마이클 워너Michael Warner. "공적(公的) 섹스(Sex in Public)" (1998)

4. 비틀기,  때리기 (Tweaking and Thwacking)


 퀴어 사회이론은 분석, 선동, 그리고 재기능화라는 벗어날 수 없는 범주로써의 섹슈얼리티에 천착해 있다. 최근 정체성 형태의 양분화된 형상에서 주로 가시화되는 계급 관계와 마찬가지로, 이성애규범성은 미국에서의 사회적 구성을 위한 근본적 동력이자, 이성애적 사회에도 만연한 불평등하고 착취적인 관계들의 근본적 조건이다. 그 어떤 사회이론이라도 이를 잘못 해석하는 순간, 이러한 관계들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공적 섹스(sex in public)에 대해 생각해보는 기획은, 섹스가 억압되거나 금지될 때에만 섹스에 대해 고찰하지 않는다. 성적 행위(sex practice)가 퀴어 연구의 대상 범위에 포함되지 않더라도, 섹스는 도처에서 존재한다. 하지만, 섹스에 관한 논문이 눈에 띄는 순간 기대하게 (혹은 미리 싫어하게) 되는, 비트는 행위들, 치는 행위들, 쿵쿵거리는 행위들, 그리고 미끌고 비비는 행위들은 다 어디로 가버린 걸까? 우리는 우리가 도시를 활보하던 그 날 벌어졌을 지도 모르는 두 장면과 함께 이 논문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어느 날 오후, 우리는 지인인 젊은 이성애 커플의 스테이션왜건을 타고 함께 드라이브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그리고 실컷 에둘러서 말하며 그들은 대화의 주제를 바이브레이터로 돌렸다. 이들은 자신들의 삶, 염원, 금전과 세습 관계,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 그리고 모든 것들과 맺는 관계가 번식력에 의해 관장되고 매개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 여성은 최근에 여성지에서 섹스토이와 번식과 무관한 에로티시즘에 관한 기사를 읽게 되었고, 몇번의 택배 서비스를 받고 나서 그녀는 남편과 함께, 대부분의 관점에서 봤을때 퀴어 성행위로 간주될 수 있는 것들과 점점 엮이게 되었다. 그들의 본래 신체는 해체되고, 흥분되는 것으로 변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런 대화가 가능한 건 당신들밖에 없어요. 제 이성애자 친구들에게 얘기하면, 우리 커플이 변태라고 생각할걸요.” 변태처럼 느끼지 않기 위해, 이들은 “우리”를 일종의 성 공론장(sex public)으로 만들어 버렸다.


나중에, 혐오(aversion)와 변태성(perversion)에 대한 문제가 다시 화두가 되었다. 우리가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이 바는 평소에는 평범한 가죽 느낌의 바이지만, 이 때, 즉 수요일 밤마다는 “Pork(돼지고기)”라는 섹스 퍼포먼스가 열렸다. 이런 공연은 주로 엉덩이 때리기(spanking), 채찍질, 제모, 달궈진 쇠도장 찍기(branding), 본디지(bondage), 모욕주기, 레슬링 등을 포함한다. 평범한 행사다. 매일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과 아마추어들이 무대에 나와서 모두의 만족을 위해 뽐내는 것. 학술대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소문에 의하면 이번 공연은 “에로틱한 구토유발”이 주제였다고 한다. 듣고 보니, 식욕을 해칠 것 같아서 일찍 떠날까 싶었지만, 아주 간단한 호기심이 우리를 사로잡았다. 도대체 어떻게 전희를 하는걸까? 완전 지저분하게 될 때까지만 있어보자. 그 때 떠나면 되니까.


제임스 프랑코와 트래비스 매튜가 공동연출한 다큐멘터리 영화 <Interior. Leather Bar> (2013)의 한 장면.


한 20대쯤의 스케이터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라이크라 반바지와 목줄을 한 상태로 낮은 무대로 올라왔다. 그는 구속구가 달린 의자에 늘어진 채로 앉는다. 그의 파트너가 윗 무대로 올라와 그의 머리를 천장을 향하게 한 상태로 젖혀, 목을 쭉 펴게 한다. 두 공연자들 뒤로는 다양한 음식들이 있다. 윗 무대의 남자가 낮은 무대의 남자아이 입으로 우유를 넣고, 음식을 넣고, 더 많은 우유를 넣는다. 우유가 그의 가슴을 타고 바닥으로 넘쳐 흐른다. 그들 사이에는 질식의 문턱이 조심스럽게 유지되는 역학이 형성된다. 낮은 무대의 남자아이는 자신의 역량을 넘어서서 더 많은 양을 넣으려고 분투한다. 윗 무대의 남자는 파트너의 역량을 아주 조금만 더 끌어올리는 정도로만 조심스럽게 음식을 넣는다. 때때로 유아용 우유병이 등장해서 쉴 틈을 주지만, 곧장 리듬이 더 강렬해진다. 남자아이의 배가 거의 경련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자각한 것은 우리 모두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는 거였고, 심지어 시선을 돌릴수도 없다는 거였다. 아무도 그럴 수 없었다. 모두들 이 전시성(display)과 친밀성, 통제와 유기, 흉포함과 비참함의 장면에 꽂혀버렸다. 사람들은 감탄을 자아내는 가벼운 신음소리를 내고, 휘파람을 불고, 발을 구르고, 소리를 지르며 공연자들을 부추겼다. 이들은 콤팩트하면서도 친밀한 그룹으로 공연을 지켜봤다. 결국에 윗 무대에 있는 공연자가 처음에 두개, 그리고 세개의 손가락을 낮은 무대에 있는 공연자의 목 안으로 넣고, 그가 반복되는 절정을 위해 자신의 배를 사용하는 동안, 우리는 이 정도의 신뢰와 침해의 공연을 이전까지 한번도 보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우린 숨을 죽이고 지켜봤다. 하지만 학자로서의 본연에 충실했던 우리는 질문들 또한 떠올랐다. 우리가 물어보고 싶었던 것들은 이러했다. 듣기로, 공연자 남자아이는 이성애자라고 했는데, 도대체 이 남자아이의 이성애성이 이러한 공연의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어떻게 이 남자아이가 이런 공연을 하고 싶다는 것을 깨닫게 됐는지? 이런 일을 같이 해보고 싶어했던 윗 무대의 공연자는 도대체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왜 하필 가죽 바에서 이공연을 하게 됐는지? 여기 아니면 어디서 이런 공연을 할 것인지? 당신 공연자들의 새로운 파트너인 여기 이 관객들에 대해서 어떤 느낌이 드는지?


우리는 이런 질문들을 물을 기회가 없었지만, 지금에 이르러서 위에서 설명한 장면들에 대해서, 즉 섹스가 서술 그 자체보다 숭고하게 보이는 장면들에 대해 새로운 질문들이 떠올랐다. 구원적이지도 위반적이도 않은, 도덕적이지도 비도덕적이지도 않은, 이성애적이지도 동성애적이지도 않은, 그리고 사회적 정당성의 그 어떤 축에도 엮여있지 않은 장면들. 우리는 섹스가 사회적 규범들의 정적인 이해 혹은 그것들이 갖는 의미의 원천이라 여겨지는 생기없음(deadness)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규범들에 변화의 틈새를 낼 것이라 주장했다.[각주:1] 하지만 이러한 사례들에서 공공성을 가로지르는 여러 길들은 비이성애규범적 신체적 맥락들의 생산으로 나 있었다. 그들이 비이성애규범적 세계들을 의도하게 된 것은, 이들이 사생활이 자신들의 근간인 척 하는 것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자신들이 돈, 가정과 좋은 삶의 장면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끊는 사회성의 형태들이기 때문에, 섹스를 예측불가능했던 쾌락을 만들어낸 공공 매개와 집단적 자가활동의 결과물로 만들어냈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들의 실천을 위한 지지의 맥락을 만들려고 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쾌락을 섹스의 구원적 목회주의나 실패, 수치심, 그리고 혐오에 대한 의무적 망각과 맞바꾸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각주:2]


우리는 섹슈얼리티를 친밀성과 주체성의 한 형태로 생각하는 것이 익숙하며, 이 논문을 통해 그러한 재현이 얼마나 제한적인지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미국 문화의 이성애규범성은 개인 의지에서 비롯된 행동, 공공 형성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닌 개인의 것으로 상상되는 전위성, 혹은 우리가 이 논문에서 연출해 내던 적대적인 문화적 서사를 방해하는 서정시적 순간들에 의해 쉽게 재구역화되거나 부인될 수 있는것이 아니다. 일반적인 친밀성의 삶 뒤에 가려져 있는 유토피아적 소망을 기억함과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그러한 소망과 불변의 관계를 맺은 게 아니라는 사실 또한 기억하고 싶다.


  1. 정동으로서의 생기없음(deadness)과 규범적 사회구성원의 지위(normative social membership)에 대해서는 벌랜트의 “Live Sex Acts (Parental Advisory: Explicit Material)” 장 <미국의 여왕 워싱턴시에 가다The Queen of America Goes to Washington City> 59-60쪽, 79-81쪽 참조. [본문으로]
  2. 규범적 성적 이념의 구원적 섹스 노마디즘에 반대하는 고전적 논증은 버사니Bersani의 “Is the Rectum a Grave?”를 참조. 좀 더 일반적인 구원적 상(象)에 대해서는 그의 <구원의 문화The Culture of Redemption> (1990)참조.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