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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시 박 홍, 「아방가르드계의 백인성의 허상 (Delusions of Whiteness in Avant-Garde)」

아방가르드계의 백인성의 허상 (Delusions of Whiteness in Avant-Garde)

Lana Turner Journal (Issue 7)

 

캐시 파크 홍 Cathy Park Hong

원문: http://arcade.stanford.edu/content/delusions-whiteness-avant-garde

 

 

아방가르드 시의 역사를 마주하는 것은 인종차별의 전통을 마주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방가르드의 시작점인 20세기 초반부터, 그것의 일부 현재형에 이르기까지, 미국 아방가르드 시는 압도적으로 백인들만의 분야였다. 즉, 이 분야의 주요한 혁신적 흐름을 형성했던, 주로 과거 흑인 문학운동 시인들의 뛰어난 작업들은 소외계층을 활성화시키고, 제도권에 도전했으며, 급진적인 언어와 형식을 도입했지만, 이러한 것들은 흑인들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은 아방가르드주의자들에게 도용되었다. 오늘날까지도, 가장 유력한 아방가르드계의 종사자들은 유럽중심적인 개편을 고집한다. 오늘날까지도, 가장 목소리가 크고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아방가르드의 스타들은 백인 일색이며, 오늘날까지도, 케네스 골드스미스 (Kenneth Goldsmith) 같은 시인들은 시가 "표현에 저항하며” “탈-정체성”을 견지해야 한다는,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뱀기름 같은 주장을 내뿜는다. 제임스 볼드윈 (James Baldwin)은 “흑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역사가 형성한 조건을 직면하고 그것을 바꾸도록 강요되는 것을 뜻한다 ... 그것은 분명히 백인성의 망상을 극복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고 썼다. 아방가르드계의 "백인성의 망상”은, 주체와 목소리를 포기하는 것이 반-권위주의적이라고 믿는, 그럴듯해 보이는 신념이다. 이들은 주체와 자신의 “목소리”를 포기하는 것이 반-권위주의적이라고 믿지만, 사실상 그러한 믿음은, 소외계층이 역사 속에서 형성된 조건을 스스로 바꾸기 위해서는 자신의 “목소리” 같은, 부르주아적인 하찮은 편의마저도 필수적이라는 사실에 대한 무지와 다름없다. 아방가르드계 내의 "백인성의 망상”은,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괴롭힘을 받거나, 감시당하거나, 프로파일링 되거나, 추방당하는 사람들이 즐비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탈-정체성”을 견지할 수 있고 비디오 게임 아바타마냥 자연스럽게 정체성을 들락날락할 수 있다는 사치스러운 생각이다. 아마, 이것이 역사적으로 소수자 시인들이 신비롭고 조그만 아방가르드 클럽으로 들어가는 것이 종종 거부된 이유일 것이다. 우리는 결코 이것을 웃어넘기거나 하나의 더러운 농담으로 취급해 버림으로써, 때묻은 주체성과 역사로부터 진정으로 탈피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지워짐(erasure), 완전한 전사(transcription), 총체적이고 병렬적인 난잡함 등을 대동하여 들이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주체는 없어지지 않으며, 더 나아가 작가의 형상이라는 유령, 그리고 그 유령의 피부색은 아무리 열심히 지워내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다.

 

아방가르드 시가 인종에 대해 견지하는 태도는 주류 제도권 문단의 태도와 다르지 않다. 물론 나는,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두 진영 사이에 인공적인 전기 울타리를 세우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시학에서의 현재 미학 스타일은 서로 겹쳐지는 벤다이어그램에 더 가깝고, 독립출판계와 잡지는 대놓고, 그리고 당연하게 이 두 전극을 거부했다. 지금은 진정으로, (예를 들어 피터 버거가 내놓은 아방가르드에 대한 정의에 따라서) 무엇이 아방가르드고 무엇이 아닌지 논쟁하는 것은 정신을 마비시키고, 자멸적이고, 자위적인 해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나는 그러한 냉전 관계가 존재한다고 가정할 것이며 (비록 꽤 오랫동안 데탕트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방가르드 예술인으로 여기는 시인들과 학파들은 이미 이 시점에서 앞서 언급한 식으로 제도화 되었을 것이다. 또한, 여기에 개념주의 시인들과 같은, 자신들을 아방가르드 선봉의 재림으로 여기는 신예들까지 포함시키려고 한다. 요점으로 돌아가보면, 유색인종 시인들은 항상 주류시와 아방가르드 시의 뒷 벤치에 조용히 앉아있을 것이 요구되었다. 우리 중 몇명은 제일 무지한 형태의 형식적 다양성을 통해 몇몇 선집과 학회로 걸러져 나올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런 곳에서 모든 구성원들이 백인인 것은 쪽팔리는 일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마조리 펄로프(Marjorie Perloff)가 아방가르드 시선집이라고 천명한, 도널드 알렌(Donald Allen)의 고전인 1959년판 선집(과 심지어 업데이트된 1982년판 선집)인 <<New American Poetry>>에서는 아미리 바라카(Amiri Baraka)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리로이 존스(Leroi Jones) 단 한명의 유색인종 시인만을 포함하고 있다. 형식적 다양성의 가장 우아한 형태가 아닐까 싶다.

 

예시를 계속 들자니 끝이 날것 같지 않으므로 일단 여기서 그만두자. 나는 여기에 제도권 주류시와 아방가르드 문단에서는, 유색인종 시인이 인종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가에 따라 이들을 받아 들일 것인지 말것인지를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주류시 문단은 얼치기 리버럴 백인 죄의식에 도전하기보다는 이를 덜어주려 노력하며 가장 목소리가 작은 마이너리티 시인들에게만 상을 주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그들은 이런 유색인종 시인들의 비판적인 태도보다는 찬사적인 태도를, 그리고 신랄한 제도권 비판보다는 자신의 가계와 조상에 대한 내용을 탈색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적인 서정시로 써내는 것을 선호한다. 거기에, 아방가르드계 종사자들은 가장 목소리가 작은 유색인종 시인을 선호하며, 이들의 작업 중에서 인종이라는 요소가 부수적인, 보이지 않는 형태, 또는 최소한 매장된 형태로 나타나는 작업들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존 야오 (John Yau)와 같은 전위시인들의 작품에서 인종 정체성이 모티브로 반복되어 다루어 지더라도, 실험시학 비평가와 큐레이터는 재빨리 그것을 도외시하거나 무시한다. 대학원 시절 내 동기들은 나의 시가 “단지 인종에 관한 것만이 아니었기” 때문에 관심이 갔다는 말로 내게 손쉬운 찬사를 보냈다. 이와 같은 태도는 크레그 드워킨(Craig Dworkin)과 케네스 골드스미스의 선집 <<Against Expression>>에서도 드러난다. 이 책에서 선집된, M. 누르베세 필립 (M. NourbeSe Philip)의 탁월한 작품인 <<Zong!>>은 18세기 후반, 흑인 노예선의 선장이 보험금을 타기 위해 150명의 흑인노예들을 배 밖으로 던져냈던 영국 법원 사례를 파고든다. 이 작품은 한쪽 분량의 원본 법적 문서에서 나온 단어들만을 이용해 쓴, 제약적 형식을 활용한 명작이다. 드워킨과 골드스미스는 <<Zong!>>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원본 법적 문서의 윤리적 부적절함은 … 실험적 글쓰기를 위해 충실해야 할 본 작품의 전용(detournement)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노예와 대량 학살과 같은 빌어먹게 무겁고 눈물이나 짜낼법한 소재가 위대한 형식미를 압도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러한 "윤리적 부적절함"은 실험적 글쓰기에 "충실"할 정도로 잘 훈육되었다는 이야기다.

특이한 형식적 제약이 없었다면, 필립의 <<Zong!>>은 "정체성 정치 (identity politics)"로 일축될 위험에 처했을 것이다. “정체성 정치”의 개념은 지난 몇 십 년 동안 일련의 뒤처진 취향들을 연상시키는 용어로 전락했다. 정체성 정치 시인이 된다는 것은 반지성적이며 문학적 가치도, 복잡성도 없고, 감상적, 생산적, 여성적이며 틈새시장만을 노리는, 비참할 정도로 시대에 뒤떨어지고 따라서 힙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가벼우며, (가장 치명적으로) 시장논리에 포섭된, 부티크 리버럴리즘을 위한 미끼 취급을 받는것과 같다. 이를, 신자유주의에 대한 형식적 비판을 가능하게 하는 (주로 남성들 위주의) 마르크스주의자 시인들과 비교해 보라. 미학적 가치가 거의 없거나 아예 없는 정체성 정치 시가 항상 "인종관련 소재”를 써먹는 것과는 다르게, 막스주의자들의 어렵고 엄격한 글쓰기는 “오로지 계급에만 관련된 것은 아니다". 이러한 편견은 골드스미스(Goldsmith)와 같은 맹목주의자들, 그리고 그들 중 가장 위험한 마조리 펄로프(Marjorie Perloff)와 같은 실험시학 서클뿐만 아니라 자신의 작업에 대해 가장 가혹한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유색인종 실험시인들 사이에서도 만연하다. 일화로, 친구들 사이 혹은 학생들 사이의 대화에서 항상 나타나는 양상 중 하나는, 우리들 중 일부가 “정체성 정치” 시인으로 평가받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가장 끔찍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만큼 우리 자신들을 갉아먹고 있을 수도 있다. 즉,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글쓰기에서 인종에 관한 내용을 긁어내고 자신을 통제함으로써, “정체성 정치”라는 빈민굴로 추방당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아방가르드 시학 학술사회의 문지기이자 저명한 비평가인 마조리 펄로프(Marjorie Perloff)는 여러번 정체성 정치 문학에 대한 자신의 혐오감을 표출한 바 있다. 그녀가 MLA(Modern Language Association: 미국 현대어문학 협회) 소식지에 기고한 발췌문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기타 소수 민족, 그리고 탈식민주의라는 미명 하에, 중요하고 흥미로운 다량의 소설과 시가 많이 연구되었습니다. 하지만 연구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셨습니까? 한 학생이 제임스 조이스나 게르트루드 슈타인을 공부하고 싶다고 가정해 봅시다. 버지니아 울프, T.E. 로렌스 또는 조지 오웰을 공부하고 싶을 수도 있지요. 윌리엄 포크너, 아니면 프랭크 오하라는 어떻습니까? 1차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문학? 대공황 시대의 문학? 테크놀로지가 소설과 시에 끼치는 영향? 모더니즘? 실존주의? 근대 풍자 혹은 전원문학? 아니면 좀 더 일상적인 언어로 표현하자면, 디지털 문화뿐만 아니라 활자문화를 포괄하지만, 반드시 한 가지 하위 문화나 한 가지 이론적 성향만을 고집하지 않는, 그런 자신만의 문학 세계에 열정적인 관심을 가진 유망한 학생들을 받아줄 곳은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이 발췌문을 도로시 왕(Dorothy Wang)의 훌륭한 저서 <<존재감을 사유하기: 현대 아시아계 미국인 시에서의 형식, 인종 및 주체성Thinking Its Presence: Form, Race, Subjectivity in Contemporary Asian American Poetry>>에서 발견했다. 도로시 왕은 이 발췌문에서 펄로프가 즉각적으로 “우리 대 그들”의 이분법을 설정하고 있다고 말하며, 이는 물론 미래주의자들과 다다주의자들부터 언어시에 이르기까지, 과거 아방가르드 분파들이 즐겨 사용하던 수사학적 도구라고 지적한다. 아방가르드 선언은 언제나 남성주의적이고 확장론적이며 전투적인 음색을 가정하고, 독자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공격적으로 분할통치적인 전략을 사용했다. 물론, "우리 대 그들”의 수사학은 이 이분법에 혁명적인 정당성이 있을 때 짜릿한 효과와 함께 사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난동을 피우는 이방인이고, "그들"이 헤게모니를 이루는 주류일 경우에 말이다. 그러나 펄로프는 매우 황당한 이분법을 설정한다. 이상하게도, 헤게모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기타 소수민족, 탈식민주의"의 이름없는 떼거리가 점유하고 있는 것이 되었다. 반면에 "우리"는 멸종 위기에 처한, “진정한" (백인)문학을 찾고있는, 희생당한 학생들이 되었다. 언제부터 <<율리시스>>가 영문학 정전의 정점에서 희귀도서 목록으로 급강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리타 도브(Rita Dove)를 강하게 비판한 자신의 <<보스턴 리뷰>> 기고문 “벼랑 끝의 시 Poetry on the Brink”를 포함한 수많은 다른 사례들에서, 펄로프는 지속적으로 인종차별적인 이분법을 구성해 왔고, 그 감성은 항상 이런 내용이다. 구분하기도 힘든 이들 유색인종 작가들의 쉽고 평범한 시와 소설이 우리의 문학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셔먼 알렉시(Sherman Alexie)와 같은 작가들이 "우리를 압도하려 하는 미학의 적"이라고 단언한 해롤드 블룸(Harold Bloom)이 대표하는 보수문학하고, 실험시학의 지지자들이 도대체 어떻게 다르다는 것인가? 펄로프가 몇 년동안이나 이러한 잘못된 관찰들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명절 저녁식사 때 "그 사람들"이 "우리 동네” 땅값을 떨어뜨린다며 불평하는 이모님의 말을 못 들은 척 하듯, 아주 최근까지 실험시 문단의 시인들은 펄로프에게 미운털이 박히지 않도록 다른 곳에 눈을 두고 있었다.

 

레나토 포지올리 (Renato Poggioli)에 따르면, 아방가르드의 가장 핵심적인 기능은 "사회학적 사실과도 같은 미학적 사실로서가 아니라,” 부르주아 사회에서 제도권 예술의 역할을 심문하고 일상과 예술적 실천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것을 말한다. 찰스 번스타인 (Charles Bernstei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문학계의 관습을 포함해, 평상시와 다를 것 없는 일상에 훼방을 놓는 시의 역할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나는 형식적 차원에서의 이견을 (formal dissent) 포함한, 이의 제기 그 자체로서의 시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발화되지 않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하는 시 말이다." 아방가르드의 정신은 반항적인 것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때때로의 시혜의 정치를 제외한다면 아방가르드 시인들과 학자들은 흑인 예술 운동(BAM; Black Arts Movement)이나 할렘 르네상스와 같은 주요하고 획기적인 움직임들에 대한 무시로 일관해왔다고 할 수 있다. 블랙 파워(Black Power)운동에서 영감을 얻어 혁신에 대한 열정으로 무장했던 흑인 예술 운동가들은 서구 문화 제도권을 뒤엎고 흑인 공동체에 활력을 불어 넣었으며, 서구의 영향권 아래에 있던 장인 정신을 배제한 언어와 양식을 개발하려고 노력했다. 우리 모두가 꼭 읽어야 할 저서 <<변절 시학Renegade Poetics>>에서 학자이자 시인인 에비 쇼클리(Evie Shockley)는 "흑인 예술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필요와 열망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문화적 지표와 기준을 수립할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라고 서술한다. 아미리 바라카 (Amiri Baraka)는 흑인 민족주의와 다다이즘의 언어적 혼란을 그의 시에서 섞어 냈고, 그의 반사회적 재담가 인격은 마치 필리포 마리네티 (Filippo Marinetti), 트리스탄 짜라 (Tristan Tzara), 앙드레 브레통 (Andre Breton) 과 마찬가지로 쇼맨쉽 넘치는 유전자가 각인되어 있다. 심지어 오로지 흑인 청중만을 위해 글을 쓰자고 주장했던, 흑인 예술 운동권 내에서 가장 많은 비판을 받았던 분리주의 노선조차도 주류와 동화되지 말고 거리를 두자는 아방가르드 정신을 닮았다. 다원성, 혼종성, 콜라주, 무의식적 글쓰기 및 즉흥시 등이 아방가르드를 정의하는 형식들이라고 한다면, 실제로 이 형식들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작가들에 의해서도 사용되었거나, 더 나아가 이들로 인해 최초로 도입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작가들이 아방가르드 시학의 초기 종사자들이었던 셈이다. 진 투머(Jean Toomer)가 1923년에 쓴 <<케인Cane>>은 분열, 의식의 흐름, 초현실주의적 언어 사용 등의 광범위한 실험이 두드러져, 장르를 횡단한다고 할 수 있고 따라서 분류가 불가능하다. 혼종성이나 이형성과 같은 학술적 개념들이 유행하기 전부터, 할렘 르네상스 사회주의 시인인 클로드 멕케이(Claude McKay)는 <<콘스탑 발라드 Constab Ballads>>에서 자메이카 방언과 부호전환(code-switching)등의 실험을 선보였다. 그는 네그리튜드(Negritude) 운동을 주도한 에메 세제르 (Aimé Césaire)나 레오폴 셍고르(Leopold Senghor)에게 영감을 주기도 하였다. 테레사 학경 차 (Theresa Hak Kyung Cha)의 시대를 앞선 작업들은 개념적 글쓰기(conceptual writing)의 선구적인 예시이기도 하다. 1982년, 사후 출판 된 장르횡단적 작업 <<딕테Dictee>>로 알려진 그는 다원예술가였으며 비디오 몽타주와 퍼포먼스를 통해 텍스트를 비물질화하는 하이퍼텍스트적 방식으로, 후대의 디지털 기반 예술가 세대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 시인들의 명성 중 상당수는 오랫동안 민족 연구(ethnic studies)의 기치 아래 축적되어 왔지만, 실험시 문단 내에서는 핵심 인사로 간주되는 일이 거의 없다. 따라서 <<딕테Dictee>> 는 아시아계 미국 문단 내에서는 게르트루드 슈타인의 <<텐더 버튼Tender Buttons>>만큼이나 핵심적인 저작으로 간주되는 반면, 아방가르드계 내에서는 여전히 비주류 클래식 취급을 받는다.

 

카바레 볼테르 (Cabaret Voltaire)부터 산 레모 (San Remo)와 시더 태번 (Cedar Tavern)에 이르기까지, 아방가르드 학파들은 공동체를 물신화하면서 자신들의 계보를 신화화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자신들의 공동체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몇몇 시인들의 말을 들을 때, 내게 드는 감정은 나와 그들 사이에 경계가 그어져 있다는 자의식적이고 가시적인 불편함 말고는 별로 떠오르는 것이 없다. 세인트 마크스 시가 프로젝트 (St. Marks Poetry Project)나 로우어 이스트 사이드(Lower East Side)에 있는 갤러리에서 열리는 온라인 매거진 발간식에서나 볼 수 있는 “공동체”는 그저 백인 힙스터들로 가득찬 공간을 가리킬 뿐이다. 시인이자 세인트 마크스 시학 프로젝트의 큐레이터인 시몬 화이트(Simone White)는 <<해리엇 Harriet>>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다시 말하자면, 나는 어떤 공간에서 유일한 흑인인 것에 익숙하다. 하지만, 사실 그것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그것이 합리적이고 견딜만한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이다. ... 점점 더, 이러한 악영향에 대해 몰지각한 상태로, 백인들로만 구성된 모임을 축하하며 즐거워하는 지적인 "공동체"를 거부해야 한다는 확신이 선다. 시 문단이 인종적으로 분리된 것처럼, 인종적으로 분리된 사회 혹은 예술 공동체에서 기쁨을 느낀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개소리다."

 

그렇다면 해리엣 물렌(Harryette Mullen)이 정의한 대로의 혁신, 즉 “언어의 가능성에 대한 열린 연구, 질문, 그리고 탐험”을 따르는 유색인종 시인은 뭘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선집과 문학공간에서 자신들의 머릿수를 늘려야 할까? 더 정중하게, 목소리를 높여 더 많은 대표성을 구걸해야 하나? 다음년도 밀랍인형 박물관 학회에서 잊혀진 서발턴 시학에 대한 패널을 몇 명 더 늘려달라고? 가짜 다양성의 기치 아래서 이런 기계적 제스쳐를 몇번 더 연습해야 되는 걸까? 관대하게, 몇 조각만 더 주세요! 우리가 있을 공간도 조금만 더! 나랑 비슷하게 생긴 얼굴들 몇명만 더 보여줘! 

너무나도 오랫동안, 백인 시인들은 “새로운 것” 에 대한 소유권을 점유한 뒤 자신들의 것으로 영토화했으며, 너무나도 오랫동안 실험적인 마이너리티 시인들은 동시대 백인 시인들의 파생물로 취급되어 왔다. 마조리 펄로프와 같이 문학적 취향을 형성하는 이들이 흑인들로 가득한 행성에 대해 두려워 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압도하는 미학의 적”이 되어 혁신의 통제권을 쥐어야 한다. 오늘날 가장 급진적인 작업들은 블랙 툭 콜렉티브Black Took Collective, 로드리고 토스카노Rodrigo Toscano, 바누 카필Bhanu Kapil, 탄 린Tan Lin, M. 누베세 필립M. NourbeSe Philip, 더글라스 키어니Douglas Kearney, 파리드 마툭Farid Matuk, 모니카 드 라 토레Monica De La Torre, 데이빗 로우David Lau, 디비야 빅토르Divya Victor, 라타샤 네바다 딕스LaTasha Nevada Diggs 등의 유색인종 작가들과 시인들이 생산하고 있다. 우리들의 “목소리”는 생존의 문제로서 가곡화되고 디지털화 되며, 연극화된 인공물로써, 파생들의 혼합물로써, 다양한 출입구간들을 통해 토착언어와 함께 컴백했다. (사실상 “목소리”는 딴 곳으로 가버렸던 적도 없다) 이들의 형식은 부호 전환, 즉 언어 간, 영어 언어들 간, 장르 간, 인종 간, 신체 간 전환이다. 데릭 월콧 (Derek Walcott)이 “국가가 없는 곳엔 상상력이 있다”라고 말했듯, 카필(Kapil)과 같은 시인들은 지정학적 상상계를 창조하고 세계구축을 비판하는 세계를 구축한다. 개념주의 글쓰기는 개념주의 선언의 모든 것에 비춰 보면, 한심할 정도로 시대에 뒤떨어져 있으며, 원본을 향해 끊임없이 짖어대야 하는 그 아날로그적 필요성에 있어 도식적이다. 들뢰즈가 말한다. "우리가 왜 나무 몸통을 모방하는 악어가 되어야 하나? 왜 우리는 핑크 팬더(pink panther)처럼 될 수 없는가? 핑크 팬더는 아무것도 모방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재생산하지 않으며, 세계에 분홍색을 입히며 자신의 색으로 칠한다. 이것이 그 자신이 지각할 수 없게 되는 방식, 스스로를 의미화하지 않는 방식, 자신의 탈주선과 단절을 만드는 방식이다." 과도하고 표현주의적인 로날도 윌슨Ronaldo Wilson, 던 룬디 마틴Dawn Lundy Martin 및 딕스와 같은 시인들은 직접 경험, 분쇄된 텍스트, 그리고 음악으로부터 사이보그 발언들을 창작해냈다. 이들은, 문단에서 이상하게도 오랫동안 무시되온 힙합에서 영감을 얻고 공연, 비디오 또는 오디오 녹음을 통해 죽어가는 인쇄 매체를 파쇄해 확장적인 시를 다루며, 불협화음 가득한 별난 미래주의를 구축하고 있다. “관계미학”(relational aesthetic)이라는 용어를 고안한 비평가 니콜라스 부리오(Nicholas Bourriaud)는 예술 작품을 예술가와 시청자 사이의 상호 작용이라고 규정하면서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살아내기” 위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시를 마주함은 인터넷을 통해, 운동과 공연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해야 하기 때문에, 시는 계속해서 동요의 지점이 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관객은 반사조건의 소켓으로서가 아니라, 불안정한 상태에 놓이게 되어 참여적 반응을 이끌어내게 된다. 그러나 이 시인들은 새로운 아방가르드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아방가르드는 화석화되어, 자신의 과거에 매혹되어 영원히 후진적이고 영원히 배타적인 자세를 고수하고 있다. 아방가르드는 엿이나 먹어라 (Fuck the avant-garde).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길을 헤쳐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