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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차] 로렌 벌랜트Lauren Berlant, 마이클 워너Michael Warner. "공적(公的) 섹스(Sex in Public)" (1998)

3. 퀴어적 대항공론장 (Queer Counterpublics)


우리가 퀴어 문화라는 표현을 통해 뜻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세계만들기 기획(world-making project)이다. 여기서 “세계”란, “공론장”(public)과 마찬가지로, 공동체 혹은 단체와는 구별되는데, 이는 “세계”라는 것이 정체성의 범주로 규정되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고, 몇몇의 참조점들만 가지고 파악될 수 있는 공간보다 훨씬 큰 공간을 포함하며, 타고난 것이 아닌(rather than experienced as a birthright) 학습될 수 있는 감정의 양상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퀴어 세계는 입구, 출구, 체계화되지 않은 친분의 선, 투영된 지평선, 전형화된 사례들, 대안 경로, 장애물(blockages), 측량할 수 없는 지리(geographies)의 공간이다.[각주:1] 세계만들기는 인쇄매체를 통한 재현의 양상을 띈 만큼 동시에 지저분한 수다의 양상 또한 취하고 있으며, 셀 수 없는 많은 곳으로 확산되어 있고, 그 의미 자체로 보면 공동체나 정체성으로서는 ‘실현될 수 없다’(unrealizable). 소설이 되었든, 밤늦게 운영되는 클럽이 되었든, 학술강연이 되었든, 모든 문화적 형태는 형식적 레퍼토리(repertoire of styles)부터 시작하여 화법 장르, 그리고 참조적 메타문화에 이르기까지의 방식들을 통해 가상 사회 세계의 색인 역할을 한다. 앤드류 홀러란Andrwe Holleran의 <무용의 무용가Dancer from the Dance> 같은 소설은 입소문을 통해 살아남는 클럽들보다는 (이런 클럽들은 주류 씬을 이루고 있을 수도 있다) 참조적 메타문화에 훨씬 크게 의존하는데, 이는 홀러란의 소설이 씬(scene)이라고 받아들여지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소설과 클럽은 둘 다 퀴어적 대항공론장의 구체화를 가능하게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세계만들기의 기획을 추구하며, 이를 위한 첫 걸음은 바로 퀴어 문화가 견해의 문화와 국가 공식화된 공론장들(official publics), 혹은 일반적으로 섹슈얼리티와 관계있는 민영화된 형태의 방법이 아닌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퀴어와 다른 저항세력은 오랫동안 (주로 위험하거나 대중적 물의를 빚는 방식으로) 착한 일반인들이 “범죄자들 사이의 친밀감”이라고 불러오던 것을 추구하고자 싸워왔다. 우리들은 퀴어 문화에서만 친밀한 것으로 인식되는 관계들과 서사들을 전개시켰다. 예를 들면, 여자친구들(girlfriends), 여사친들(gal pals), 섹스파트너(fuckbuddies), 고객(trick) 같은 것들. 퀴어 문화는 이러한 관계들뿐만 아니라 다른 관계들도 섹슈얼화하도록(sexualize) 학습했을 뿐만 아니라, 이 모든 관계들의 맥락 속에서 개인적이고 강도 높은 정동을 목격하는 법, 그리고 소속감과 변화의 공적 세계(public world)를 설명하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퀴어 세계를 만드는 것은 가정 공간(domestic space), 친족성(kinship), 커플의 형태, 재산(property), 혹은 국가 등에 필연적인 관계를 지니지 않은 종류의 친밀성의 발달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친밀성은 오히려 대항공론장과 필연적인 관계를 지니는데, 여기서 대항공론장이란 무기한적인 접근성을 갖추고, 자신의 하부적 관계에 대해 자각하고 있는 세계를 뜻한다. 또한, 이러한 친밀성은 퀴어 세계만들기의 창조적 전형이며, 동시에 퀴어세계가 가진 연약함의 전형이기도 하다. 예전에 그랬듯이, 일반적인 친밀성이 배우자(consort)로부터 시작해서 보필자(courtier), 친구, 정사(情事) 관계, 동료, 공모자를 포함한 모든 관계들을 망라하는 것이라면, 비표준적인 친밀성은 좀 덜 범죄적이고, 좀 더 항구적으로 보일 것이다.[각주:2] 친밀성은, 친밀성으로 인해 정당화되는 섹스와 함께 사적인 것이 되었고, 진실한 인격(personhood)을 전달하던 담론의 맥락들은 시민들과 노동자와 전문직들을 대표하는 것에서 분리되어 버렸다.


친밀성이 취하는 문화적 형태의 이러한 변화는 근대 공론장(public sphere)의 역사와, 가장 근본적인 인간의 역량으로써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근대 담론, 이 둘 다와 연결되어 있다. <공론장(public sphere)의 구조변동>에서 하버마스는 가정 내 친밀성의 제도와 형태들이 사적 인간들(private people)을 사적(private)으로 만들었다는 것, 그리고 시장이나 국가가 아닌 사적 사회(private society)의 공론장을 이루는 구성원들로 만들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친밀성은 추상적이고 형체가 없는 시민들을 보편적 인류(universal humanity)라는 이름으로 공고화한다. <성의 역사>에서, 푸코는 섹스의 개인화(personalization of sex)를 다른 방향에서 묘사한다. 시민사회에 대한 고백적이고 전문적인 담론들은 지속적으로 내면의 개인적 본질이라는 것을 상정하며, 이 진실한 인격(true personhood)이라는 것을 섹스와 등치시키고, 이 섹스를 비밀과 폭로의 드라마로 둘러싼다. 마치 각기 다른 행성을 묘사하는 듯한 이 두 사상가 사이에는 사실 시사하는 바가 많은 짐합점이 있다.[각주:3] 하버마스는 사회적 지식의 학문들에서 사적화된 섹스(privatized sex)를 둘러싼 관리적이고 규범화적인 층위를 간과하는데, 이는 하버마스가 국가와 시민사회간 비판적 관계의 규범에 대해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푸코는 섹스와 다른 사적인 관계의 변화를 가능하게 할 수도 있는 비판적 문화를 간과한다. 그는 근대 성적 인간성(sexual personhood)에 대한 인식론들이 성적인 공공(sexual publics)을 구현하기는 커녕 오히려 고립의 기술로 작용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한다. 이 인식론들은 사람들을 개인으로 의약화(medicalize)하거나 관리하려는 목적을 위해 이들을 정상 혹은 변태라는 범주로 규정하려 한다. 하지만 푸코와 파버마스 둘 다 헤게모니적 공론장이 (hegemonic public) 어떻게 섹스의 사생활화(privatization of sex)와 사적 인간성의 섹슈얼화 (sexualization of private personhood)에 기반하고 있는지를 가리키고 있다. 결국 이 둘 모두 섹슈얼리티가 공적으로 아니면 공공에 대항하는 방식(counter-publicly)으로 접근가능한 문화의 일부가 아닌, 주체성의 특징처럼 보이게 하는 조건들을 규명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이념들처럼, 정상적인 친밀성의 이념 또한 실제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에 대한 정확한 묘사인 적이 한번도 없었을 수 있다. 애초부터, 그것은 경제공간과 가정공간의 구조적 분리로 인해 매개되었을 뿐만 아니라, 견해의 문화(opinion culture), 서신교환 (correspondence), 소설, 그리고 낭만소설 등에 의해 매개되기도 했다. 루소의 <고백록>은 이념, 그리고 활자매체와 삶의 서사의 새로운 혼종 형태에 대해 이념이 갖는 의존도의 전형이다. 하버마스는 “개인적인 것의 가장 내부에 위치한 핵심으로써의 주체성은 항상 청취자에게 맞춰진다”라고 이야기하였다.[각주:4] 여기에 그는 이 친밀성의 구조가 근본적으로 경제와 모순적인 관계를 포함하고 있다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시장에서 사유재산 소유자가 갖는 자주권은 가족 안 인간의 자기표현(self-presentation)과 맞닿는다. 사회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 보이는 후자의 친밀성이 경쟁에서 행사되는 개인 자주권(private autonomy)의 진실을 밀봉한 것과 다름 없다. 그리하여, 그것은 개인 자주권(private autonomy)이 자신의 …부르주아 가족에게 자신에 대한 자의식을 제공하는…경제적 근원을 거부하는 것과도 같다.[각주:5]


이러한 구조적 관계는 그것의 실천에서 불완전하다는 데에 있어서 매우 규범적이다. 이것의 위력은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갖는 비표준적 친밀성에 대한 인식, 기억, 설명, 혹은 제도화를 방지한다. 정동적 삶(Affective life)은 일터로 그리고 정치적 삶으로 흘러들어간다. 사람들은 처음 보는 이들, 그리고 지인들과 핵심적인 자기구성적 관계들을 맺으며, 그들은 커플의 형태 바깥에서 (섹스가 아니라면) 에로티시즘을 취한다. 이러한 경계 친밀성(border intimacies)들은 사람들에게 어마어마한 쾌락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이러한 쾌락이 섹슈얼리티라 불리우게 된다면, 에로티시즘이 사회적 삶의 일상으로 흘러 넘치는 것은 관습을 거스르는 것으로 보이게 되고, 이는 규범적인 반감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러한 반감은 위생적인 차원의 반동(hygienic recoil)과도 같은 것인데, 현대의 소비자와 미디어 문화가 변소를 향해 치달으며, 친밀성의 삶에 관한 것들을 국가 문화의 가장 높은 층위에까지 흩뿌려대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더글라스 크림프 (현재 로체스터대학교 시각비판연구학과Visual Critical Studies 교수)


남성 게이 문화에서는 범죄적 친밀성의 가장 주요 장소들은 공중변소(tearoom), 길거리, 섹스 클럽, 그리고 공원이었다. 공중 화장실을 향한 굴성인 셈이다.[각주:6] 성적 문란함(promiscuity)은 친밀하지 않은 것이라는 깊은 낙인이 찍혀 있으며, 이로 인해, 누군가의 이름이 언급되든 않든 성적 문란함은 익명성으로 작용한다. 에이즈(AIDS) 사태에서 우리가 배운 교훈 중 가장 흔하게 잊혀지는 것은 이 문란한 친밀성이 사실 구명 역할을 하는 공공 자원으로 작용했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의 의도대로가 아닌 방식으로, 게이들은 좀 더 안전한 섹스를 발명했고, 더글라스 크림프Douglas Crimp가 1987년에 썼듯, 

전염병이 유행하든 하지 않든, 우리는 섹스가 삽입섹스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언제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안전한 섹스를 고안해 낼 수 있었다. 우리의 문란함은 굉장히 많은 것들을 가르쳐 주었다. 단지 섹스의 쾌락 뿐만이 아니라, 그러한 쾌락의 끝모를 다양성에 대해서도 말이다. 우리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그러한 심적 대비, 그러한 실험, 그리고 그러한 의식적인 작업을 통해서 우리중 많은 이들은 우리의 성적 습관을 매우 빠르게, 그리고 매우 극적으로 바꿀수 있었고, 이는 다들 흔히 “행동 요법”이라고 알고 있는 야만적인 것이 지난 한 세기동안 우리를 강제하는 데에 실패했던 것이다…게이 남성의 문란함이 단순히 친밀성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야기되는 성적 ‘충동’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그들의 편견에 거스르는 매우 적나라한 증거들을 직면하게 되었다... 게이 남성 문란함은 어떻게 성적 쾌락이 추구되는지, 그리고 이러한 쾌락이 제도화된 섹슈얼리티의 매우 좁은 한계 안에 갖혀있지 않게 될 때 어떻게 모두에게 허용되는지에 대한 긍정적 모델로써 보여져야 한다.[각주:7]


에이즈는 매우 특별한 케이스이며, 이러한 성적 문화의 모델은 일반적으로 남성이었다. 하지만 성행위(sexual practice)는 대항적 친밀성(counterintimacy)의 한가지 종류일 뿐이다. 그러한 관계들이 친밀한 것으로 여겨지게 하도록, 그리고 단순히 이름뿐인 해방 혹은 전복이 아니라 자기계발의 공통적 언어, 공유되는 지식, 그리고 내향성의 교류가 되게 하도록 만드는 비판적인 실천적 지식이야말로 더 중요한 것이다. 


퀴어 문화는 드래그, 청년 문화, 음악, 무용, 퍼레이드, 과시(flaunting), 그리고 크루징(cruising; 역: 성적 파트너를 찾고자 거닐거나 드라이브 하는것)등의 유동적인 현장들에서 이러한 지식을 개발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알아내었다. 현장의 유동성은 이러한 것들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과 동시에, 이러한 것들을 세계만들기로 인식하게 어렵게 만드는 역할도 수행한다. 이들이 매우 취약하고 일시적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전형적으로 “라이프스타일”이라는 이름으로 사소화된다. 하지만 그들을 자기표현(self-expression)이나 인정을 향한 요구로만 이해하는 것은 사회적 재생산의 제도들이 이성애문화의 형태들과 맺어지게 하는, 근본적으로 불평등한 물적 조건들에 대한 오해와도 같다.[각주:8] 퀴어 세계만들기의 맥락들은 소문, 댄스클럽, 소프트볼 리그, 그리고 폰섹스 광고들을 통한 기생적이고 탈주적인 착상에 의존하는데, 이러한 요소들은 점차 일반적으로 활자로 매개되는 좌파 문화를 위한 상업적 기반이 되어간다.[각주:9] 퀴어는 문화’로써’ 텍스트화(entextualization)되기 어렵다.


이러한 점은 특히나 친밀성의 문화에 있어서 매우 그러하다. 친밀성의 이성애규범적 형태들은 우리가 주장했듯이 사랑의 서사나 감수성 등의 대놓고 참조적인 담론을 통해서가 아닌, 물적으로 결혼 그리고 가족법 안에서, 가정의 구조물 안에서, 그리고 일터와 정치의 구역화 안에서 뒷받침된다. 이에 반해 퀴어문화는 자신의 대항적 친밀성(counterintimacies)에 대한 어떠한 제도적 매트릭스도 가지고 있지 않다. 결혼상태를 중심으로 삶을 구성하는 의식(ritual)들과 결혼의 부재 안에서, 즉흥(improvisation)은 발언을 통한 서약이나 연애의 서사적 실천, 혹은 공동점검이라는 이름의, 비경제적으로 보이는 경제들을 위해 항상 필수적이다. 이러한 실천들 속에서 이성애규범성은 약하고 간접적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어쨌든, 동성 커플은 가끔 이러한 실천들의 변형을 발명해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을 커플 형태, 그리고 개인적 중요성이라는 이성애규범성의 언어와 맺어지는 방법을 통해 이를 수행했을 뿐이고, 친밀성을 역사, 정치, 그리고 공공으로부터 나누는 물적 그리고 이념적 조건들은 전혀 변하지 않은 상태였다. 우리가 상상하는 퀴어적 기획은 그저 이러한 평범한 친밀성의 낙인을 제거하는 것도, 그저 동성의 사람들에게 커플의 감수성에 대한 접근을 허용하는 것도, 그리고 절대 게이와 레즈비언들의 개인적인 삶을 제대로 사적인 것(properly private)으로 보증하려는 것도 아니다.[각주:10] 오히려, 이 기획은 정동적이고, 에로틱하며, 개인적인 삶의 형태들을 지지하기 위함이며, 이러한 삶의 형태들은 접근성이 있다는 점에서, 기억에 남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집단적 활동을 통해 지속된다는 점에서 공적(public)이다.


친밀성의 이성애규범적 문화가 퀴어 문화를 도시 공간과 활자 문화 속에서의 일시적인 착상에 의존하도록 내버려두기 때문에, 퀴어 공론장 또한 루돌프 줄리아니 시장의 새 구역법(zoning law)같은 것에 특이하게도 취약하다. 이 법안은 대항-공적인 성문화(counterpublic sexual culture)의 경제적 조건들을 통제함으로써 이를 제한하려고 한다. 이것의 여파는 법안이 드러내놓고 통제하려고 하는 성인업소 이외의 많은 곳에서 느껴질 것이다. 크리스토퍼 가의 게이 바들은 그곳에서 일어나는 성매매를 위해 찾아오는 고객들을 대상으로 한다. 또한, 이 거리가 크루징하기 더 용이한 이유는 섹스 샵들 때문이다. 자유반지(freedom ring)나 “Don’t Panic” 티셔츠를 파는 부티크 가게들도 똑같은 이유로 더 많은 다른 사업들을 하고 있다. 크리스토퍼 가로 성지순례를 오거나 이주하는 몇천명의 사람들이 모두 포르노 가게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 모두 이러한 점 덕분에 이득을 본다. 특정 지점을 지나면, 양적 변화는 질적 변화와 등치된다. 임계질량(critical mass)이 형성되는 것이다. 거리는 퀴어해지고, 그곳에서 공적으로 접근이 가능한, 밀집된 성문화가 형성된다. 그래서 그곳이 오스카 와일드 서점같은 비-포르노 사업장들의 근거지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은 게이 유권자 블록을 형성하여 정치인들을 압박하는 정치적 근거지가 된다. 


크리스토퍼 가에 위치한 오스카 와일드 서점


퀴어들 말고 도시 공간의 이러한 종류의 양상에 의존적인 이들은 없다. 우리가 다른 곳에서 공적으로 접근가능한 문화를 통해 모이지 못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숫적 열세에 몰리고 억압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함께 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야말로 성문화이기 때문에, 세계에서 퀴어 인구가 가장 많이 모이는 장소들 중 섹스 사업에 기반하지 않는 장소는 아주 적다. 이 적은 몇몇의 장소들, 예를 들어 마사추셋주 노스햄턴에서 형성된 레즈비언 문화조차, 웨스트 빌리지, 듀퐁 서클, 웨스트 할리우드, 그리고 카스트로 같은 장소들과의 인연으로 인해 보다 더 힘이 있는 것이다. 존중받는 게이(respectable gays)들은 자신들이 지저분하다고 여기는 성적 하위문화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고 싶을지 몰라도, 그들의 성공, 그들의 삶, 그들의 정치적 권리, 그리고 그들의 정체성은 그들이 싫어하는 공적인 성문화의 존재가 없었다면 애초에 가능하지도 않았다. 이런 존재를 지워버린다면, 거의 모든 “공개적”(out) 게이 혹은 퀴어 문화는 덩쿨째 시들어버릴 것이다. 우파들만큼 이러한 연결점을 잘 아는 이들이 없다. 보수파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과다-통제적인 시도를 중요한 승리로 여기지 않았다면, 그렇게 대놓고 정부의 개입에서 자유로운 시장에 대한 자신들의 명시적 믿음을 거스르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요점은, 퀴어 정치학이 자유시장 이념을 보다 필요로 한다는 게 아니라, 자본의 재생산과 축적에 너무나도 중심적인 이성애규범적 형태들 역시 자본을 통제하려 드는 큰 개입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구역법 계획에서 가장 소름끼치는 판타지 중 하나는, 도심의 로컬(urban locale)이 주거지와 사유재산에 기반한 공통 이해관계로 구성된 공동체라고 믿는 것이다. 동네지역의 이념(the ideology of the neighborhood)은 현 논쟁에서 정치적인 시비가 걸려있지 않다. 이 논쟁은 성적 주체는 오로지 거주하기만 한다는 환상, 성 정치학과 관련된 공간은 동네지역(neighborhood)라는 환상에 지배되고 있다. 하지만 크리스토퍼 가 같은 구역은 그저 동네지역의 관심사(neighborhood affair)뿐인 것은 아니다. 동네지역의 로컬적 특성은 매일 생겨나는 몇천명의 비주거민의 존재에 의존한다. 웨스트 빌리지에 실제로 주거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동네를 방문하는, 대부분의 퀴어 성지순례자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 또한 시민 계급과 사유재산 소유계급을 혼동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된다. 크리스토퍼 가로 놀러 나오는 많은 이들 (주로 젊은이들, 퀴어들, 그리고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그곳에서 월세를 내고 사는 일이 불가능하다. 도심 공간은 항상 호스트 공간(host space)이다. 도시에의 권리는 도시를 사용하는 이들에게까지도 연장된다.[각주:11] 이는 사유재산 소유자들만의 것이 아니다. 이러한 권리의 연장은 구역법의 정치학에서 발생하는 요행으로 인해 도심 공간이 깊게 오인식되어서가 아니다. 정상적 섹슈얼리티라는 것은 인간성의 허상(illusion of humanity)을 유지하기 위해 이러한 오인식을 필요로 하고, 이러한 오인식에서 비롯되는 경제적 그리고 법적 집행 또한 필요로 한다.


  1. 몇몇 사회이론 전통에서는 여기서 우리가 설명한 세계만들기의 과정이 모든 사회적 수행원들에게 공통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예를 들어, <사회적 세계의 현상학Phenomenology of the Social World>에서 알프레드 슛츠Alfred Schutz가 강조한 전형화의 실천(practices of typification)과 사회적인 것에 대한 일상적 지식에 관련된 행동의 프로젝트(projects of action)를 참조해보라. 하지만 대부분의 맥락에서 사회적 세계는 어떤 천형이나 프로젝트에 대한 참조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재생산이 가능한 형태의, 예시화된 어떤 완전한 것(instantiated whole)으로 이해된다. 가족, 국가, 이웃, 인간 종(human species), 혹은 학교과 교회같은 제도들같은 사회적 존재의 이미지들은 다성(plentitude)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고, 이러한 점은 퀴어 세계만들기의 맥락에서 잘 접근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후자의 경우가 얼마나 일상적인 맥락에서의 세계 구성의 과정과 닮아있다 하더라도, 퀴어세계는 당연시 여겨지는 사회적 존재를 재현할 힘이 없다. [본문으로]
  2. 예를 들어, 앨런 브레이Alan Bray의 “엘리자베스 시대 영국의 동성애성과 남성간 우애의 표시들Homosexuality and the Signs of Male Friendship in Elizabethan England” 1-19쪽 참조. 로리 J. 샤논Laurie J. Shannon의 “에밀리아의 논증: <두 귀족 친척>에서의 우정과 ‘인간’Emilia’s Argument: Friendship and ‘Human Title’ in The Two Noble Kinsmen,” 64쪽 참조. 아서 골드해머 Arthur Goldhammer 역, 로저 샤르티어Roger Chartier 편 <르네상스의 격정Passions of the Renaissance>참조. 필립 아리에Phillippe Aries 조르주 두비Georges Duby 편 <사생활의 역사 A History of Private Life> 3권 참조. [본문으로]
  3. 푸코와 하버마스의 관계에 대해서 우리는 톰 매카시Tom McCarthy의 <이상과 환상Ideals and Illusions> 43-75쪽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본문으로]
  4. 하버마스, <공론장의 구조변동> (토마스 버거, 프레데릭 로렌스 역) 49쪽. [본문으로]
  5. 같은 책, 46쪽. [본문으로]
  6. 공중변소, 화장실, 목욕탕 등의 반쪽짜리 공공장소(semipublic spaces)들이 게이 남성 삶에서 갖는 중심성에 대해서는 촌시Chauncey의 <게이 뉴욕Gay New York> 과 리 에델만Lee Edelman의 “Tearooms and Sympathy, or, Epistemology of the Water Closet”을 참조하라. 게이 그리고 레즈비언들의 반쯤은 공공인 성행위들(semipublic sexual practices)은 David Bell, Gill Valentine 편 <욕망의 지도그리기Mapping Desire: Geographies of Sexualities> 참조. [본문으로]
  7. 더글라스 크림프, “How to Have Promiscuity in an Epidemic”, <옥토버October> no.43, 253쪽 [본문으로]
  8. 인정을 향한 요구라는 개념은 최근 여러 사유가들에 의해 다문화적 정치학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내세워지기도 했다. 예를 들어, 액셀 호네스Axel Honneth의 <인정을 향한 투쟁The Struggle for Recognition: The Moral Grammar of Social Conflict> (1995) 혹은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 Examining the Politics of Recognition> (1994) 참조. 우리가 제시하는 것은, 퀴어 정치학이 인정의 영역에 대해 갑론을박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이를 분배정의에 반대되는 인정의 정치학으로 여겨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구분은 낸시 프레이저의 “재분배에서 인정으로?From Redistribution to Recognition? Dilemmas of Justice in a Postsocialist Age” (1995) 라는 논문에서 제시되고 있다. [본문으로]
  9. 세지윅의 <옷장의 인식론Epistemology of the Closet>, 그리고 이본 집터Yvonne Zipter의 <다이크의 절친 다이아몬드Diamonds Are a Dyke’s Best Friend: Reflection, Reminiscences, and Reports from the Field on the Lesbian National Pastime> 참조. [본문으로]
  10. 이러한 정치학은 점차 게이운동 내에서 권장되고 있다. 에를 들어, 앤드류 설리반Andrew Sullivan의 <동성애 결혼, 장점과 단점Same-Sex Marriage, Pro and Con> (1997), 마이클앤젤로 시뇨릴레Michaelangelo Signorile, <바깥의 삶Life Outside: The Signorile Report on Gay Men, Sex, Drugs, Muscles, and the Passages of Life> (1997). 가브리엘 로텔로Gabriel Rotello, <성적 생태계Sexual Ecology: AIDS and the Destiny of Gay Men> (1997), 윌리엄 N 에스크릿지 주니어William N Eskridge, Jr., <동성애결혼을 위한 옹호론The Case for Same-sex Marriage: From Sexual Liberty to Civilized Commitment> (1996), 로버트 M 베어드Robert M. Baird와 스튜어트 E 로젠바움Stuart E. Rosenbaum 편, <동성애 결혼Same-Sex Marriage: The Moral and Legal Debate> (1996), 그리고 마크 스트라서Mark Strasser, <법적 혼인Legally Wed: Same-Sex Marriage and the Constitution> (1997) 참조. [본문으로]
  11. “도시에 대한 권리”라는 표현은 앙리 르페브르의 것이다. <도시에 대한 권리Le Droit a la ville> 참조. 또한, 마뉴엘 카스텔스Manuel Castells의 <도시와 풀뿌리운동The City and the Grassroots> 참조.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