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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리 라슨Chari Larsson, 라슬로 네메시의 『사울의 아들』 속 괴물 만들기Making Monsters in László Nemes’ Son of Saul (2016)

 

라슬로 네메시의 『사울의 아들』 속 괴물 만들기

 

 

샤리 라슨Chari Larsson

원문: http://sensesofcinema.com/2016/feature-articles/son-of-saul/ 

 

내가 쓰고, 보고, 구도를 잡고, 사진을 찍고, 나의 사진을 전시하고 이러한 것들 모두에 대해 생각하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면, 그것은 그토록 불완전한 문장을 내놓기 위해서이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상상해야만 한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각주:1]

 

 

 

호러 스토리, 얼굴은 호러 스토리이다.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각주:2]

 

 

 

2015년 8월, 프랑스 철학자이자 미술사학자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헝가리 감독 라슬로 네메시에게 다음과 같은 공개 서한을 보낸다.

 

 

 

친애하는 라슬로 네메시,

 

 

 

당신의 영화 <사울의 아들>은 괴물과도 같습니다. 필연적이고, 일관적이고, 이로운, 선량한 괴물 말입니다.[각주:3]

 

 

 

이 서두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괴물을 만든다는 게 무슨 뜻일까? 디디-위베르만이 영화를 보고 난 바로 뒤에 쓰여진 이 편지는 감독이 만들어낸, 1944년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 그리고 말살캠프의 가스실 안에서 일어난 극단적인 인간 비극의 끔찍한 재현을 향한 친밀하고 감정적인 헌정사다. 네미시는 홀로코스트와 영화적 이미지의 관계에 관한 길고 경협 가득한 철학적 논의의 역사에 자신의 목소리를 덧붙이고 있다. 영화가 어떻게 해야만 홀로코스트를 정당하게 재현할 수 있을까? 재현의 한계점에서, 특정 사건을 감상주의적으로 다루거나 사소화 시키지 않는다면 이미지는 어떤 역할을 맡을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헤게모니적 사유의 계보에 맞서,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등의 보다 젊은 세대의 철학자들이 재현의 금지에 대한 절대주의를 문제삼기 시작하면서, 홀로코스트의 재현불가능성을 강조하는 담론은 점점 더 많은 비판을 맞이하였다. 이 논문은 <사울의 아들Saul Fia (2015)>이 프랑스 철학자이자 미술사학자이며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미지Images malgré tout>의 저자, 이미지에 대한 주요 사상가인 조르주 디디-위베르만과의 대화 속에서 명시적으로 진전되어 왔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 논문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첫 부분은 <사울의 아들>을 프랑스 내에 있었던 홀로코스트 재현 문제에 관한 최근의 논쟁의 맥락에 위치시킬것이다. 두번째 부분에서는 네메시가 디디-위베르만의 사유 기획을 어떻게 확장시키는지, 어떻게 영화를 통해 최근의 프랑스 지성사 내에서 지속되고 있는 논의들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지를 다룰 것이다. 여기서 핵심적인 논의는 이미지가 제시하는 과거로의 접근 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영화는 어떻게 역사를 가시화할까? 다시 말해, 이미지는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역사를 상상할 수 있게 할까? 홀로코스트는 전통적으로 재현의 한계 너머에 위치한 것, “상상 불가능한” 것, 그러므로 “재현 불가능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사유의 계보는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 쓰기가 불가능해졌다는 아도르노의 인용률 높은 어구로부터 칸트적 숭고와 우상 숭배를 금지했던 고대 히브리 규약에 대한 장-프랑수와 리오타르의 해석까지 이른다.[각주:4] 리비 색스튼Libby Saxton은 재현의 윤리에 관한 물음이 홀로코스트 영화에 대한 다양한 미학적 응답들이 출몰하기 시작하면서 최근에 점점 많은 탄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각주:5] 칸느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각 2015 그랑프리 그리고 최고 해외영화상을 받은 라슬로 네메시의 데뷔영화 <사울의 아들(2015)>은 이러한 홀로코스트 영화사에 있어 중요한 업데이트라고 할 수 있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그 모든 영화감독들과 마찬가지로, 네메시 또한 어떻게 영화가 이 사건의 거대함을 가장 효과적으로 재현알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 그리고 역사의 증인으로서 영화의 역할이라는 가장 논의가 분분한 문제를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러한 영화적 예시들은 알랭 르네의 <밤과 안개Niut et Brouillard (1956)>로 시작해, 클라우드 란츠만의 <쇼아Shoah (1985)>, 그리고 스티븐 스필버그의 <쉰들러리스트 (1993)>까지 이른다. 르네의 아카이브적 필름 푸티지 사용이나 증언에 대한 란츠만의 비범한 형태의 헌신과는 다르게, <사울의 아들>은 완전히 차별되는 미학적 선택지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다. 네메시는 실제 역사적 사건을 픽션적 서사와 함께 엮어내며, 픽션과 영화의 지시성에 대한 바쟁스러운 확신 사이의 긴장관계를 이용한다. 디디-위베르만이 말하듯, “[네메시는] 상상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역사적 사실을 마주하는 어떤 사실주의를 만들어내는 위험을 짊어졌”다.[각주:6]

 

 

 

네메시의 영화는 존더코만도Sonderkommando, 혹은 “특수 분대”라고 완곡하게 명명되었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의 역사 속의 그림자와도 같은 존재들에게 가시성을 부여한다. 존더코만도는 화장터 운영의 일상 업무를 맡았던, 주로 유대인 수감자들로 구성되어 있던 집단이다. 그들의 업무는 새로 수감된 인원들 간의 질서를 유지하고 탈의실, 그리고 가스실로 이들을 인도하며 시체를 화장터로 운반하거나 공터에서 화장하는 업무를 맡았다. 이후 그들은 이들의 소지품을 분류하는 일을 맡았고, 이는 수감자들의 귀중품, 금니, 보석들을 따로 분류하는 업무도 포함했다. 또다른 이들의 업무는 이 모든 과정이 반복되기 전에 재가 된 시체를 땅에 묻거나 강으로 흘려보내는 것이었다. 아우슈비츠 생손자인 프리모 레비는 존더코만도에 대해 서술할 때, 역사에게 주어진 업무는 그러므로 윤리적이었다고 서술한다. “혹자는 이 끔찍함으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마음을 닫아버리고 싶은 유혹에 빠질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거부해야 할 유혹이다.”[각주:7] 네메시는 이러한 관중의 윤리적 책임을 가져와서,  <사울의 아들>의 주제로 만든다. 사울 아우스렌더 (게자 뢰리히)는 헝가리인 수감자이며 존더코만도의 일원이다. 하루는, 가스실에서 시체를 치우던 사울이 아직 숨이 붙어있던 어린 남자아이를 발견한다. 이 남자아이는 바로 SS 의사에게 질식당해 죽는다. 가스실에서 생존했던 그의 시체는 부검실로 보내진다. 이러한 끔찍함을 직면한 사울은 이 아이가 자신의 아들이라며 구원을 향한 단 하나의 계획을 세운다. 랍비를 찾아 이 아이에게 제대로 된 장례식을 치루는 것이다. 이 영화는 1.5일간 랍비를 찾아 미친듯이 헤메는 사울을 쫒는다. 이 아이가 진짜로 사울의 아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관중들도 영원히 알 수 없다. 이것이 주主 서사이며, 영화에는 사울이 캠프 주변을 미친듯이 돌아다니는 동안 마주치는 다른 부副 서사들도 존재한다. 이중 처음 보여지는 것은 사울과 그의 동료 존더코만도 일원이 바깥쪽 구덩이에 태워지고 있는 시체들의 사진을 화장터 안쪽에서 몰래 찍고 있는 것이다. 가스실은 SS의 삼엄한 감시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공간을 제공해 준다. 두번째 이야기는 경비에 대한 폭동을 계획하는 것이다. 네메시는 사실과 픽션을 섞어, 이 두 역사적 사건을 스토리라인에 겹친다.  

 

 

랍비를 향한 사울의 여정은 굉장한 저항의 행위다. 이는 강력한 역설에 기반한다. 이미 죽어있는 이들이 이미 죽은 이들을 구하려고 하고 있다는 것. 완벽한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존더코만도들은 주기적으로 제거되었다.[각주:8] 영화에서는 무장 봉기를 위핸 절박한 계획들이 구성되고, 동시에 “쓰고 버려질” 이들의 이름의 리스트가 작성된다. 에이브러햄 (레벤트 몰나르)이 사울이 남자아이의 시체를 병영 숙소에 숨겨 자신들을 위험에 처하게 하고, 따라서 존더코만도를 배신했다고 매섭게 비난하자, 사울은 다음과 같이 대응한다. “우린 이미 죽어있어.” 이러한 점을 강조하기 위해, 사울은 시체처럼 분장되고, 그의 여윈 얼굴은 무감정하다. 삶과 죽음 사이,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비공간이 바로 사울이 살아가는 공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굉장히 인간적인 소망, 즉 아이의 영혼을 구원하고, 아마도, 자신의 영혼도 구원하려는 소망에 의해 움직인다.

 

 

<사울의 아들>은 프랑스 철학자이자 미술사학가 조르주 디디-위베르만과의 대화를 통해 진전되었다. 디디-위베르만은 동시대 프랑스 미술사와 시각 문화에서의 이미지에 관한 주요 사상가 중 한 명이다. 디디 위베르만의 명성은 그가 1990년대 프랑스에서 미술사라는 학제와 그 학제의 규범적 실천을 지속적으로 개혁해 나가면서 쌓이게 되었다.[각주:9] 2000년대 초반, 디디-위베르만의 연구 기획은 굉장히 독특한 지점에 다다르게 되는데, 이 때 그는 르네상스 예술에서의 재현, 홀로코스트 담론에서의 재현과 이미지에 대한 깊은 불신, 그리고 재현과 역사의 관계에 대한 주제로 눈을 돌리게 된다. 15년을 앞으로 빨리감기 해보면, 디디 위베르만이 네메시에게 <어둠에서 벗어나기Sortir du noir>라는 제목의 공개서한을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서한은 재빨리 <Les Éditions de Minuit>지에 의해 2015년 말 출판되었고, 디디-위베르만은 이 서한에서 영화에 대한 비판적 독해를 제시하며, 이를 홀로코스트의 시각적인 유산을 좀 더 넓게 재사유하기 위한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틀에 배치시킨다. 

 

 

 

홀로코스트와 이미지에 관한 가장 뜨거웠던 논쟁 중 몇몇은 프랑스에서 일어났다. 조르지오 아감벤, 장-룩 낭시, 자크 랑시에르 등의 철학자들은 모두 다양한 방법으로 홀로코스트 담론을 지탱했던 재현의 금지라는 것에 대해 물음을 던졌다.[각주:10] 최근의 재현에 관한 논쟁들이 더이상 나치 수용소의 재현 불가능성이라는 주장을 옹호하지 않기 시작하는데, <사울의 아들>이야말로 이러한 변화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영화평론가 앙투완 드 백크와의 인터뷰에서 네메시는 디디-위베르만의 2003년 저서인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미지>에 빚을 졌다고 선언한다.

 

 

 

이 네 장의 사진들은 제게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 사진들은 소각을 증명하고, 증거를 이루며, 필수적인 물음을 던집니다. 이 이미지를 갖고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이게 무엇을 재현할 수 있나? 죽음과 야만성을 직면한 우리는 어떤 관점을 갖춰야 하나?[각주:11]

 

 

 

네메시가 이야기하고 있는 이 네 장의 사진들은 2001년 설리 호텔에서 열린 <수용소의 기억Mémoire des camps>이라는 사진전에서 전면적으로 전시되었다.[각주:12] 이 사진들이 돋보였던 것은 대량 학살의 매커니즘을 기록했던, 수용소에서 촬영된 유일한 이미지들이라는 것이다. 1944년 8월에 한 존더코만도 일원에 의해 촬영된 이 필름은 치약통 안에 숨겨져 수용소 밖으로 밀반출 되었으며, 결국엔 폴란드의 레지스탕스 세력에게 다다르게 되었다. 이 전시에 동반된 전시문은 디디-위베르만의 카탈로그 에세이인 <Images malgré tout>,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미지>였다. 이 글에서 그는 공터에서 시체를 소각하기 위한 모닥불을 몰래 찍었던 사진사, 그리스인 죄수 알렉스의 움직임을 조심스럽게 재구성한다.[각주:13] 디디 위베르만의 글은 홀로코스트를 “상상 불가능하다”, “알 수 없다”, “사유 불가능하다”고 주장한 사유의 계보를 문제삼음으로써, 홀로코스트 담론에서의 색다른 전환점을 찍었다. 이상하게 구도가 잡힌, 흐리고 초점이 나간 이 네 장의 사진들은 사건 그 자체 속에서 생산된 증언들이다. 첫 두 장은 존더코만도 일원들이 바깥에서 시체를 태우는 업무를 가스실 안으로부터 찍은 것이다. 첫번째 사진은 매우 흐릿하고 초점이 나가있다. (Fig. 3) 두번째 사진은 좀 더 선명한데, 이 선명함은 마치 촬영자가 자신이 놓였던 극단적인 위험의 상황을 잠시나마 잊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듯하다. (Fig 4) 다음 두 장의 이미지들은 굉장히 찍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가스실이라는 비교적 안전했던 공간을 떠나, 촬영자는 카메라 렌즈를 제대로 잡을 시간 없이 ‘후딱 찍어진’”snatched” 것으로 보인다. 세번째 순서의 이미지에서 보건대, 자작나무로 인해 대열의 일부가 가려진 한 무리의 여성들이 감지된다. (fig 5) 마지막 이미지는 완전히 추상적이다. (fig 6) 가스실 안쪽으로부터 대량 학살의 과정을 촬영한 이미지들인 이것들이 유일하다. 이미지는, 모든 기록을 말소하려 했던 나치의 모든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존재한다.

 

 

디디-위베르만의 카탈로그 에세이는 자극적이게도 영화감독 클라우드 란츠만을 선명하게 염두에 두고 시작한다. “알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부터 모두 상상해야 한다.”[각주:14] 이는 란츠만이 홀로코스트는 상상 불가능한 것이므로, 재현 불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을 날카롭게 그리고 단호하게 반박한다. 란츠만이 “이미지는 상상력을 죽인다”[각주:15]라는 이유로 아카이브용 이미지를 부인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파격적인 9시간 반짜리 영화 <쇼아>에서 란츠만은 당시 쓸 수 있었던 모든 아카이브용 자료사용을 삼가고 오로지 생존자들의 구술 증언만을 강조했다. 이들은 홀로코스트의 피해자와 목격자들이었다. 란츠만은 간결하게 홀로코스트가 재현이란 것에 던지는 과제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그것이야말로 이미지가 가지는 모든 문제이며, 재현이 갖는 모든 문제이다. 일어났던 그 어떤 일도 이 사건같지 않았다. 모든 것이 진짜로 보일지라도 말이다.”[각주:16] 홀로코스트를 재현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불가피하게 그것을 ‘잘못 재현함으로’써, 실패할 것이다. 디디-위베르만이 봤을 때, 란츠만의 주장에서 사용된 용어들은 대부분 검토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고, 이로 인해 영화를 둘러싼 신비로운 경외심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설명이 되었다. 디디-위베르만은 절대적인 용어들을 사용하려는 충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일반적으로 좋은 의도를 가지고, 철학적으로 보이고, 실제로는 게으른 용어들이—“말할 수 없는” 그리고 “상상 불가능한” 이란 용어들이다.[각주:17] 증언을 이미지보다 더 우선시했던 이러한 규범적인 경향에 맞서 디디-위베르만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아우슈비츠에서 존더코만도 일원에 의해 후딱 찍어진snatched 이 네장의 사진들은 또한, 그러므로, 나치가 가리고 싶어했던, 그 어떤 말도 이미지도 없이 놔두려 했던 세계에서 잡아채온snatched 네 개의 반박문들이다.[각주:18]

 

 

 

프랑스 언론과 학술지에서 진행되었던 이 논란과 격정적인 반론들은 매우 잘 기록되어 있다.[각주:19] 디디-위베르만은 관음증, 페티시즘, 도상성애 등의 비난을 받았다.[각주:20]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논란은 홀로코스트 담론에서 불가역적인 전환점을 남겼고, 좀 더 젊은 세대의 학자들과 영화인들은 점점 더 홀로코스트 재현에 대한 경고에 대해 물음을 던지게 되었다. 란츠만의 <쇼야>가 유럽 유대인 학살에 관한 영상적인 참조점이었다고 한다면, <사울의 아들>은 이와 중요한 업데이트로써 신호탄을 쏘아 올린다. 란츠만이 증언에 부여된 진실가치를 우선시하는 데 반해, <사울의 아들>은 픽션과 실제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이 섞인, 혼종적인 영상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디디-위베르만이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미지>에서 보여주듯, 1944년 8월 알렉스가 후딱 찍어낸snatched 네 장의 사진은 홀로코스트의 “전체” 혹은 절대적인 진실을 말할 수는 없다. 이러한 것은 이미지로부터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디-위베르만이 주장하듯, 이 사진들에는 진실 가치가 부여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들, 오늘날 우리들의 눈에게는 진실 그 자체이다. 진실의 흔적, 진실의 가느다란 조락들, 즉 아우슈비츠로부터 시각적으로 남겨진 것 말이다.”[각주:21] 이미지는 가스실에 관한 모든 그리고 절대적인 진실을 말해줄 수 없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미지는 부분적인 진실, 파편화된 진실을, 부분적이고 파편화되었더라도 진실은 진실인 것을 보여줄 수 있다. <사울의 아들>에서 네메시는 알렉스가 사진을 찍었던 실제 역사 사건을 재창조한다. 사울과 다른 수감자는 열쇠공인 척 하며 자신들이 있는 지붕 바로 옆 구덩이에서 불타고 있는 시체들을 촬영하려고 했다. (fig 7) 이 순간에 대해, 네메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이 순간을 영화의 심장부로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장면이 캠프에서 사울의 여정 중 갑자기 그가 학살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구성하는 데 일순간 참여하는 부분과 일치하기 때문이죠. 또 그리고, 이미지의 재현 속의 재현이라는 것으로 인해, 바로 그 지점 그리고 오로지 그 지점에서 우리는 재현이 갖는 지위 그 자체에 물음을 던집니다.[각주:22]

 

 

 

디디-위베르만의 에세이는 알렉스의 현상학적 경험을 재구성하며, 자신의 목숨을 걸고 사진들을 촬영한 이 수감자에게 주체성을 회복시켜 주고자 한다. 소각장을 지나는 촬영자의 은밀한 움직임은 흐릿하고 초점이 나간 사진들을 찍었으며, 이는 경비의 감시를 피해서 이미지를 찍어야 하는, 내재된 어려움의 시각적 기록이다. 디디-위베르만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카메라를 꺼내는 것은 그저 불가능하며, 조준하는 일은 더욱 불가능하다. ‘익명의 촬영자’는 몰래, 시선을 다른 곳에 둔 상태로 두개의 스냅샷을 찍는다. 아마 걸어가면서 찍었을지도 모른다.”[각주:23] 네메시는 이러한 격동적이고 부산한 카메라 움직임을 자신 영화논리에 그대로 융합했다. 구분이 불분명한 흐릿함은 디디-위베르만으로 하여금 이미지를 “패닉 이미지”로 묘사하게 했다. 디디-위베르만은 이렇게 서술한다. “이 패닉 이미지는 공포의 시각적 매개체이다.”[각주:24] 우리가 가까이서 사울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동안, 카메라의 움직임은 공포를 따른다. 이 시선은 제레미 벤담의 전지적인, 팬옵티콘적 시선이 아니며, 모든 곳에 스며든 SS 감시탑의 감시망도 아니다. 대신, 이 시선은 죄수에 의해 훔쳐진, 은밀하고 패닉적인 곁눈질이며, 이 죄수는 수용소의 대혼돈 속에서 몰래 랍비를 찾아 헤멘다. 이로 인해, <사울의 아들>은 물리적으로 시청하기 어려운 영화다. 이것이야 말로 네메시의 의도이다. 펼쳐지는 눈앞의 끔찍함으로부터 우리의 시선을 돌리지 말 것. 이것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윤리적 책임이다. 더 나아가, 이는 시선을 거두지 말라는 디디-위베르만의 간청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보여야 할 응답이다. 끔찍한 실재Real의 경험으로부터 몇몇 수감자들이 우리를 위해 낚아채온snatched 말들과 이미지에 우리는 빚을 지고 있다.”[각주:25] 디디-위베르만의 텍스트의 중심부에 자리한 것은 관중의 윤리학이다. 네메시는 이 윤리학을 카메라 움직임 그 자체의 논리로 구성한다. 쉴 틈이 없다는 것은 고통스럽고, 네메시는 관중의 시선을 꽉 쥐고 있으며, 이 통제권을 절대 놓을 생각이 없다. 

 

기존의 영화적 기법대로, <사울의 아들>의 시작부분은 롱샷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이 롱샷은 다른 롱샷들과 아주 핵심적인 차이를 지닌다. 장면을 세팅해 관중을 의도대로 이끄는 것과는 다르게, 이 이미지는 정확히 반대로 기능한다. 이미지는 완전히 흐릿하고 초점이 나가있으며, 제대로 볼 수 있게 초점을 회복하는 것을 거부한다. (fig 8) 지저귀는 새들과 화면의 초록색 일부만이 관중으로 하여금 이 장면이 시골에서 찍힌 것이라는 걸 암시할 뿐이다. 점점 이 흐릿함으로부터 인간의 형상이 나타나고 이를 다른 세명이 따라간다. 이 형체는 느리게 초점 안으로 들어오며, 관중은 사울 아우스렌더를 처음 만나게 된다. 카메라의 클로즈업 구도에 정확하게 맞춰진 사울은 흐릿한 초록 배경과 극적인 대비를 이룬다. 관중은 그의 얼굴의 디테일한 부분들을 검토하게 된다. 그의 그루터기 수염, 아랫입술에 난 상처, 까만 머리에 보이는 새치들. 사울의 얼굴은 감정의 드러남이 없다. 또다시, 배경에서 들리는 음성은 중요한 암시로서 작용한다. 새로운 수감자가 도착한 것이다. 목소리, 소음, 휘슬, 여러 언어들, 그리고 불길한 경비견들의 짖는 소리로 이루어진 불협화음이 들린다. 카메라는 사울의 얼굴에만 초점을 단단히 고정하고 있으며, 그의 무표정하고 중립적인 얼굴은 수감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운명에 대해 전혀 알 수 없게끔 한다. 그의 시선은 돌려진 채, 다른 수감자들과의 신체적 접촉은 최소한이다. 사울과 다른 존더코만도 일원들은 수감자들을 탈의실로 인솔하고 마지막에는 샤워와 따스한 수프를 약속하며 가스실로 인솔한다. 가끔 몇몇 얼굴들이 시야로 들어오지만, 이는 아주 일순간일 뿐이며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진다. 사울의 얼굴에 가차없이 고정된 초점으로부터 나가 떨어지듯 말이다.

 

 

사울의 아들은 긴 시퀀스 샷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네메시의 지속적인 클로즈업 사용과 합쳐져 있다. 관중은 사울의 얼굴 표정에서 가장 미세한 부분들을 관찰하게끔 된다. 조그맣고, 실제로 거의 인지할 수 없을만큼 작은 움직임들은 사울의 얼굴이라는 지형에서 사건을 형성한다. 사울이 방들과 복도의 미로를 지나는 동안, 핸드헬드 카메라는 주로 사울의 뒤통수에 위치하고 있다. 이 효과는 매우 섬칫한데, 이 극단적인 근접성이 관중을 장면 안으로 위치시키는 것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울이 가는 곳으로 가게 된다. 카메라의 타이트한 구도는 장면 사이의 고통스러운 길이와 겹쳐져 관중으로부터 시각적 쉴 틈을 박탈한다. 그 어떤 장면에도 눈을 쉬게 둘, 위안을 찾을 지평선 따위는 없다. 극단적으로 얕은 피사심계도는 사울을 이 혼돈의 세계의 중심에 위치시킨다. 사울이 가스실 사이로 움직이면서, 관중은 쌓여진 시체들이 카메라 구도 바깥쪽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네메시는 우리의 관음증적 욕구를 일으키지만, 시체들을 흐릿하게 하고 초점을 나가게 하고 추상화함으로써, 그 욕구를 위축시키기만 한다. 장면을 통달하고 싶은 관중의 욕구는 블러 효과로 인해 거부된다. 튕겨져 나간 관중의 시선은 다시 사울에게로 향하며, 그의 얼굴은 클로즈업으로 인해 섬칫하게도 선명하다. 디디-위베르만은 이러한 얕은 피사심계도를 촉감적으로 묘사한다. 

 

 

 

어둠에서 벗어나는 이미지는 자신의 촉감적 한계로 인해 특징지어진다. 선명하게 나타날 때, 두께—피사심계도—는 매우 얇다. 선명함의 구역은 마치 칼날과도 같다. 이는 가시적 공간의 절개와도 같지만, 그러한 효과적 공간, 즉 절개의 공간은 너무나도 얇다. 실제로, 공포는 매우 날카롭게 벤다.[각주:26]

 

 

 

장면 외곽의 구분이 힘든 블러와 클로즈업의 디테일 사이에서 조성된 시각적 불안정감은 영화 내내 사용된다. 이러한 방법으로 네메시는 카메라의 구도 속에서 사실주의와 추상간의 긴장감을 추적한다. 관중은 사람, 시체, 그리고 동료 수감자들이 그곳이 있다는 걸 알지만, 시각적으로 제대로 이를 잡아낼 수 없으며, 시야가 제대로 맞지 않고 희미하다. 결과적으로 관중의 상상력이 이러한 틈새들을 채워야만 한다. 란츠만의 “상상력 없는 이미지”라는 비판과 달리, 상상력은 재생산적이거나 열등한 복사본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대신, 상상력은 생산적이 된다. 흐릿함과 부재 속에서 새로운 것이 창조된다. 

 

 

 

이쯤에서 디디-위베르만의 텍스트, <어둠에서 벗어나기>로 번역된 <Sortir du noir>라는 제목을 잠시 찬찬히 살펴보자. 앙투완 드 백크와의 인터뷰에서 네메시는 아우슈비츠를 자신의 가족사에 있어 일종의 “블랙홀”이라고 말한다.

 

 

 

제 가족 중 일부는 아우슈비츠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매일 이야기하는 거였죠. 제가 어렸을 때는 뭔가 “사악한 일이 행해졌다”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저희들 사이에 파고든 블랙홀 같은 것으로 상상했죠. 무언가가 나왔고, 그 무언가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저는 고립되었습니다. [각주:27]

 

 

 

디디-위베르만은 네메시의 선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으며, 그가 정확히 반대 급부의 일을 행했다고 주장한다. 디디-위베르만이 네메시에게 쓴 편지에서, 어둠과 빛의 이미지가 만연한 텍스트에서 “블랙홀”은 매우 핵심적인 은유로서 사용된다. 예를 들어 가스실은 일종의 암실로서 재상상된다. 수감자들은 가스실의 어둠이 제공하는 엄폐물 뒤로 숨어서 바깥 구덩이에서 태워지는 시체들의 사진을 찍는다. 중요한 것은 디디-위베르만은 아도르노가 이야기했던 동시대 예술의 필수적인 선조건으로서의 어둠의 이미지와 연결시킨다는 것이다. 아도르노가 미학적 기권과 이탈을 더 선호했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디디-위베르만은 <미학 이론>의 한 구절을 가져오는데, 여기서 아도르노는 자신이 묘사했던 어둠의 미학을 세계 2차대전의 끔찍함의 잔해에 대한 필연적 응답이라고 설명한다.

 

 

 

가장 극단적이고 암울한 현실에서 생존하기 위해 위로의 한 형태로서 매매되고 싶지 않은 예술이라면 자신들을 그 현실과 등치시켜야 한다. 오늘날의 급진적인 예술은 어둠의 예술과 같다. 그들의 주 색채는 까만색이다…내용에 있어 검정이라는 이상은 것은 추상화가 야기하는 가장 깊은 충동 중 하나이다.[각주:28]

 

 

 

이러한 어둠의 미학에 반하여, 디디-위베르만은 네메시의 영화가 ‘어둠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한다. 디디-위베르만은 다음과 같이 쓴다. “하지만 친애하는 라슬로 네메시, 당신은 극단적인 검정 혹은 극단적인 침묵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영화는 지독하게도 불순하고, 낭랑하며, 색채로 가득합니다…당신은 그러므로 어둠을 잊은게 아닙니다. 하지만 대신 당신은 어둠의 추상화로부터 어둠을 꺼냈습니다.”[각주:29] 네메시가 만들어낸 지옥은 시끄럽고, 색채 가득한 지옥이다. 구별이 어려운 흐릿함 속에서 색채들은 폭발한다. 사울의 재킷 등쪽에 있는 빨간 십자가는 그를 존더코만도의 일원으로서 식별한다. 가스에 중독당한 피해자가 뿜는 피, 인간 잿더미에서 나오는 회색 연기, 그리고 영화의 시작과 끝 장면들은 자작나무의 선명한 초록색으로 가득 차있다. 영화의 굉장한 음성지형soundscape은 경합하는 다양한 언어들, 도움을 찾는 비명소리, 그리고 항상 들을 수 있는 화장터의 웅웅거리는 소리의 지층들이 풍부하게 겹쳐짐으로써 이뤄진다. 

 

 

 

네미시와 마찬가지로 디디-위베르만 또한 그의 가족 일원들을 홀로코스트에서 잃었다. 그리고 그는 2001년부터 계속되는 기사와 에세이를 통해 홀로코스트 재현에 관한 질문으로 돌아왔다. <Écorces>는 굉장히 개인적인 사진에세이로, 이는 디디-위베르만이 2011년 6월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로 떠난 여정을 기록하고 있다. 이 조그만 텍스트의 제목은 수용소를 둘러싼 독특한 자작나무에서 디디-위베르만이 가져온 세 개의 나뭇가지 조각에서 유래한다. 이 나무들은  60년 전 수용소의 참사를 목격했던 바로 그 나무들이다. 열 아홉 장의 사진들이 책에 수록되었으며, 각 사진은 디디-위베르만의 관찰을 동반한다. 상상의 개념이 바로 여기서 돌아오는데, 바로 여기서 디디-위베르만은 클라우드 란츠만과의 논의를 계속 이어간다. 이번에는 직접 수용소 주변을 다니며(déambulation) 관찰하고 기록했던 디디-위베르만의 상상력이 전면으로 등장한다. 디디 위베르만의 사진들 중 하나는 지평선의 일부를 그리는 자작나무의 이미지이다. 선명한 수평선들에 의해 다른 것들과 구별되는 이 이미지에서 두꺼운 구름들이 멀리 서 있는 자작나무 숲과 교차한다. 조용하게 오른편에 서 있는 것은 단 하나의 감시탑이다. 디디-위베르만은 묻는다. “비르케나우에서 지평선이란 뭘까? 모든 희망을 산산조각내는 장소로 여겨지는 이 공간에서 지평선이란 무엇일까?”[각주:30] 지평선을 그리는 나무들은 영화에서도 다시 등장하며 수감자의 수감 감각을 강화시킨다.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지평선이다.”[각주:31] <사울의 아들>에서, 자작나무 숲은 자연적 방벽이자 위장이며, 네미시는 지평선의 부재를 영화가 전달하는 강렬한 폐쇠공포증의 감각을 강화하는 데 사용한다. 

 

 

 

<어둠어서 벗어나기>에서, 디디-위베르만은 영화가 “다큐멘터리 우화”(conte documentaire)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디디-위베르만은 1930년대 발터 벤야민의 글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 두 가지 줄기를 끌어온다. 첫번째는 <사울의 아들>을 문학적 몽타주로서 위치시키는 것이다. 벤야민은 문학에 있어서 몽타주가 갖는 급진적인 가능성들에 아주 깊은 관심을 보였다. 반야민에게 있어서, 몽타주 기법은 다다의 예술적 실천에서 기인했으며, 이는 문학의 새로운 “대서사” 형식이라는 것을 창조할 신호탄이었다. 그의 1930년 에세이 “소설의 위기”에서 벤야민은 의욕적으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몽타주 기법은 소설의 틀을 폭파하고 스타일적인 그리고 구조적인 한계점들을 터뜨리면서 새로운, 대서사적 가능성들을 위한 길을 닦는다.”[각주:32] 디디-위베르만은 <사울의 아들>에서 고대 우화들이 함께 엮여가며 새로운 스토리텔링의 다큐멘터리적 장르가 창조되는 것을 목격한다. 영화는 고대 문학 전통에서 유래하는 동시에, 신화와 구전에도 깊이 스며들어 있는 영상적 우화와도 같다. 예를 들어, 지옥의 수용소 안에서 탈의실, 가스실, 병영, 그리고 화장터로 만들어진 미로를 헤메는 사울의 여정을 보자. 사울은 에우리디체를 구하기 위해 지하 세계를 떠도는 오르페우스와 같은 인물이 된다. 하데스를 만나러 지하세계로 떠난 오르페우스의 여정처럼, 사울 역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라는 죽음의 공간과 마주한다. 오르페우스와 같이, 사울은 그가 사랑하는 이와 함께 ‘어둠에서 벗어나려’ 한다. 오르페우스와 같이, 그의 여정은 애초에 비극적인 결말이 내재되어 있었다 (“우린 이미 죽어있어.”)

 

 

 

아니면 최종 탈출 장면, 즉 SS부대의 추적에서 도망치는 도중 강을 건널 때 남자아이의 시체가 사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장면을 상기해보자. (fig 9) 이 장면은 유대교의 역사 중 건국신화인 모세의 이야기를 비극적으로 뒤집어 놓은 것이다. 출애굽기서에서, 파라오는 모든 남성 히브리 아이들을 물에 던져 수장할 것을 명한다. 모세는 나일 강에서 둥둥 떠다니는 와중에, 파라오의 딸에 의해 구해지고 이집트의 왕자로서 자란다. 사울의 남자아이와는 다르게, 모세는 생존하며, 이스라엘인들을 탈출시켜 노예에서 해방시킨다. 디디-위베르만은 그리스 신화 이야기와 히브리 성서 이야기들의 맞부딪힘에서 몽타주적인 충동을 감지한다. 디디-위베르만이 네메시에게 쓴 편지는 영화 “논리가 굉장히 오래되고 굉장히 현대적인 문학 전통에서 유래한다”[각주:33]는 관찰과 함께 끝을 맺는다. 고대 우화와 이야기들은 생존하여, 새로운 서사 형식을 창조하기 위해 배치된다. 

 

 

 

두번째 줄기는 죽어가는 스토리텔링의 전통을 향한 벤야민의 애도이다. 그의 1936년 에세이 “이야기꾼Storyteller: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저작들에 대한 관찰들”에서 벤야민은 스토리텔링이라는 예술에 있어 핵심적인 것은 공통된 경험의 소통이라고 주장했다. 벤야민은 세계1차대전에서 돌아오는 군인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관중들과 소통할 적절한 언어를 찾으려고 힘겨워 하는것을 알아냈다. 전쟁터에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들은 오래된, 이야기꾼들에 의해 내려져온 구전 형식의 소통방법은 더이상 새롭고 현대적인 대중매체와 정보의 세계에서 가치가 부여되고 있지 않음을 발견했다. 소설가의 고립, 그리고 뉴스 정보라는 것의 짧고 제한적인 가치에 대항해, 이야기꾼은 자신의 소재를 경험에서 끌어오며, 이를 그의 관중과 공유한다. 이야기는 그리하여 관중들에게 내재되고, 집단적, 공통 경험이 된다. 벤야민은 다음과 같이 쓴다. “이야기꾼은 경험에서 비롯한 것을 말한다. 그것이 자신의 경험이 되었든 타인이 겪었던 것이든 말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 경험을 그의 이야기를 듣는 이들의 경험으로 만든다.”[각주:34] 벤야민에게 있어서 스토리텔링이란 지식과 지혜를 전하는 기예이며, 이를 세대를 넘어 전파하게 하는 기예이다. <사울의 아들>을 다큐멘터리적 정확성으로 재단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디디-위베르만이 제시하듯,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 우화이다. 즉, 오르페우스와 모세 이야기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네메시는 우리의 이야기꾼이며, 경험들을 편년적으로 나열한다. 그는 이 경험들을 우리에게 전하고, 네메시의 서사는 우리의 서사, 우리의 공통된 경험이 된다.

 

 

 

영화와 홀로코스트 사이의 관계는 길고 굴곡진 역사를 가지고 있다. 존더코만도와 가스실을 <사울의 아들>의 주제로 삼음으로써, 네메시는 이러한 역사에 대한 중요한 업데이트를 가져다 준다. <사울의 아들>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적합한 응답으로서의 미학적 기권의 개념을 견고하게 비판한다. 란츠만이 이미지를 폄하하고 말과 증언을 우선시하는 것에 반해, 네메시는 우리에게 1944년 8월 알렉스가 낚아챈 네 장의 사진이 현재진행형이자 살아있는 유산을 제시한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네메시는 디디 위베르만이 주장했던 것들을 영화 그 자체 속에서 사유한다. 이는 그저 그의 사유를 영화화한것이 아니고, 관중의 윤리학을 영화의 형식으로 녹여낸 것이다. 관중에게 네메시가 요구하는 것의 기준은 매우 높다. 시선을 돌리지 말라. 시선을 돌리는 것은 당신의 윤리적 책임, 즉 보고 상상하는 일을 포기하는 것이다.

 


 

 

 

  1.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Écorces (Paris: Les Éditions de Minuit, 2011) 30쪽. 원저자 영역. [본문으로]
  2.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A Thousand Platea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브라이언 마수미 역.(Minneapolis, Minn.: Univ. of Minnesota Press, 1987), 168쪽. [본문으로]
  3.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Sortir du noir (Paris: Les Éditions de Minuit, 2015), 7쪽. 원저자 영역. [본문으로]
  4. 테오도르 아도르노, Prisms 새뮤얼 웨버, 쉬에리 웨버 역. (Cambridge, Mass.: MIT Press, 1981). 장 프랑수와 리오타르. The Differend: Phrases in Dispute, 조르주 반 덴 아벨레 역.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8). [본문으로]
  5. 리비 색스튼, Haunted Images: Film, Ethics, Testimony and the Holocaust (London and New York: Wallflower Press 2008) [본문으로]
  6. 디디-위베르만, Sortir du noir, 25쪽. [본문으로]
  7. 프리모 레비, The Drowned and the Saved, 레이먼드 로젠탈 역. (London: Penguin, 1988), 37쪽 [본문으로]
  8. 아담 브라운, Judging ‘Privileged’ Jews: Holocaust Ethics, Representation, and the ‘Grey Zone’ (New York: Berghahn Books, 2013) 참조. 아우슈비츠 존더코만도에 대한 역사서술적 개론을 위해서는 이사벨 월러스턴의 “Emerging from the Shadows? The Auschwitz Sonderkommando and the ‘Four Women’ in History and Memory,” Holocaust Studies: A Journal of Culture and History, 20, no. 3 (2014) 참조. [본문으로]
  9. 예를 들어,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Confronting Images: Questioning the Ends of a Certain History of Art, 존 굿먼 역 (University Park: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2005) 참조. [본문으로]
  10. 조르지오 아감벤, Remnants of Auschwitz: The Witness and the Archive, 대니얼 헬러-로젠 역. (New York: Zone Books, 1999). 장-룩 낭시, “Forbidden Representation,” in The Ground of the Image, 제프 포트 역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2005); 자크 랑시에르, “Are Some Things Unrepresentable? ,” in The Future of the Image, 그레고리 엘리엇 역 (London and New York: Verso, 2007).) [본문으로]
  11. 앙투완 드 백크, “Interview with László Nemes”, Son of Saul, Paris, Rendez Vous (2015) [본문으로]
  12. 클레몽 세루 편Clément Chéroux, ed. Mémoire des camps: photographies des camps de concentration et d’extermination nazis, 1933-1999 (Paris: Marval, 2001) [본문으로]
  13. 카탈로그 에세이 원본은 단행본 Images malgré tout (Paris: Les Éditions de Minuit, 2003) 으로 개편되었으며 영어로는 셰인 B 릴리스가 번역한 Images in Spite of All: Four Photographs from Auschwitz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8)가 있다. [본문으로]
  14. 디디-위베르만, Images in Spite of All, 3쪽. [본문으로]
  15. 클라우드 란츠만, “Holocauste, la répresentation impossible” Le Monde, March 3, 1994, vii쪽. 원저자 번역. [본문으로]
  16. Ibid. vii쪽. 원저자 번역. [본문으로]
  17. 디디-위베르만, Images in Spite of All, 25. [본문으로]
  18. Ibid., 20. [본문으로]
  19. 브루노 샤오아Bruno Chaouat, “In the Image of Auschwitz,” Diacritics 36, no. 1 (2007), 스벤-에릭 로즈Sven-Erik Rose, “Auschwitz as Hermeneutic Rupture, Differend, and Image malgré tout: Jameson, Lyotard, Didi-Huberman.” In Visualising the Holocaust, 데이빗 배스릭David Bathrick, 브래드 프레이저Brad Prager 마이클 데이빗 리처슨Michael David Richardson 편 (Rochester: Camden House, 2008) 참조. [본문으로]
  20. 제랄 와이먼Gérard Wajcman, “De la croyance photographique,” Les Temps modernes, 613 (2001) 엘리자벳 프라뉴Elizabeth Pagnoux, “Reporter photographe à Auschwitz.” Les Temps modernes, 613 (2001) 참조. [본문으로]
  21. 디디-위베르만, Images in Spite of All, 38쪽 [본문으로]
  22. 앙투완 드 백크, “Interview with László Nemes”, Son of Saul, Paris, Rendez Vous, 2015. [본문으로]
  23. 디디-위베르만, Images in Spite of All, 16쪽 [본문으로]
  24. 디디-위베르만, Sortir du noir, 30쪽. 원저자 번역. [본문으로]
  25. 디디-위베르만, Images in Spite of All, 3쪽 [본문으로]
  26. 디디-위베르만, Sortir du noir, 29-30쪽. 원저자 번역 [본문으로]
  27. 앙투완 드 백크, “Interview with László Nemes”, Son of Saul, Paris, Rendez Vous, 2015 [본문으로]
  28. 테오도르 아도르노, 미학이론, 로버트 훌롯-켄터Robert Hullot-Kentor 역(London and New York: Continuum, 2002), 39-40쪽 [본문으로]
  29. 디디-위베르만, Sortir du noir, 15-16쪽. 원저자 번역 [본문으로]
  30. 디디-위베르만, Écorces, 34쪽 원저자 번역 [본문으로]
  31. 위와 출처동일. 원저자 번역. [본문으로]
  32. 발터 벤야민, “The Crisis of the Novel,” in Walter Benjamin: Selected Writings, vol 2, 마이클 제닝스Michael W. Jennings 편 (Cambridge, Mass.: Belknap Press, 1999), 301쪽. [본문으로]
  33. 디디-위베르만, Sortir du noir, 49쪽. 원저자 번역. [본문으로]
  34. 발터 벤야민, “The Storyteller: Observations on the Works of Nikolai Leskov,” in Walter Benjamin: Selected Writings, vol 2, 마이클 제닝스Michael W. Jennings 편 (Cambridge, Mass.: Belknap Press, 1999), 146쪽. [본문으로]